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극 예술은 유한성이 아니라 특이한 종류의 불멸성, 즉 가장 파괴적인 재앙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만화 같은 능력을 내포한다.·······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면 그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죽음을 측면 돌파할 수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눈에 잘 띠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다. 반면, 높은 자리의 힘 있는 자는 무모하고 위험한 짓을 벌인다. 이런 오만을 그리는 장르가 바로 비극이다. 무한정 살아남는 것은 무조건 무의미하다.(101-102쪽)


비극 속 영웅은 자신의 죽음과 패배를 자유자재로 활용함으로써 본인의 유한한 지위를 초월하고, 너덜너덜해진 시간으로 뭔가 영원하고 귀한 것을 직조해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희극의 등장인물은 무한한 생존이라는 의미에서 영원성이 아니라, 불멸성을 달성한다. 그는 그저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다. (103쪽)


영원과 불멸은 영원불멸로 붙여 써서 동일한 의미를 강화하는 어휘처럼 인식하는 것이 상식이다. 테리 이글턴은 양자를 구별한다. 영원은 “무한한 생존”이라는 정의에 준한 언급이 있어서 추상적이나마 포착하기 쉬운 개념이다. 불멸은 그렇지 않다. “특이한 종류의 불멸성, 즉 가장 파괴적인 재앙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만화 같은 능력”이란 말은 그야말로 만화 같다. “그는 그저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다.”라는 말은 더욱 알쏭달쏭하다. 다른 근거가 없으니 이 두 문구를 가지고 행간을 상상해본다.


재앙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멸이란 말을 사건적으로, 카이로스적으로 쓰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눈으로 ‘그저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라는 말을 들여다보면 ‘오직 찰나마다 일어설 뿐’이라는 뜻이 살그머니 드러난다. 비로소 영원의 크로노스적 시간 지배와는 전혀 다른 불멸의 진면목이 다가온다.


영원은 “높은 자리의 힘 있는 자”가 관념으로 “직조”한 허구다. 권력 이데올로기다. 불멸은 “눈에 잘 띠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 몸으로 일군 “돌파”다. 몸의 돌파는 시간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찰나마다 시간과 조우한다. 그 조우가 “무한정 살아남는 것은 무조건 무의미하다.”는 진리를 증명한다. 무한정 살아남는 것은 무의미 이전에 무‘실재’다. 무실재의 영원은 오직 탐욕의 실재를 증명한다. 불멸은 찰나실재다. 찰나실재인 불멸이 탐욕을 무실재로 만든다. 탐욕의 무실재화, 이거 우스개의 로망 아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