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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평점 :
(1) 나는 서구정신의학, 특히 미국정신의학협회가 만든 DSM 모델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려 20가지에 가까운 분류 기준에다 물경 400개에 가까운 병명을 나열한 DSM-5가 내게는 사이비종교 경전과 다름없어 보인다.
그들에게서 건너오는 환원적·분석적 지식과 정보를 읽고 참조는 하지만, 나는 독자적으로 정신장애를 정의하고 분류하며, 그에 의거 진단하고 치료한다. 내 분류 기준은 크게 둘이고, 둘 가운데 하나에 다시 작은 기준이 둘이다. 따라서 병은 세 종류, 다섯 개가 전부다.
병의 원인도 번다하지 않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비대칭의 대칭구조·운동인 생명을 폭력적으로 침습한 것이 모든 병의 원인이다. 폭력적 침습은 폭력적 분리와 폭력적 병합이다. 전자는 둘이어서는 안 되는데 둘로 쪼갠 것이다. 후자는 하나여서는 안 되는데 하나로 포갠 것이다.
진단은 이 쪼갬과 포갬을 소상히 살피는 일이다. 치료는 쪼갬과 포갬 때문에 훼손된 생명의 전체성, 그러니까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비대칭의 대칭구조·운동을 복원하는 것이다. 이 복원 행위가 바로 우스개며 우르개다.
(2) 조직적이지는 않지만 테리 이글턴을 좇아 우스개의 여러 면모를 살피는 동안 그것이 어떻게 우르개와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는지 틈틈이 언급했다. 그 대강을 정리하면, 의미: 재미, 자유: 평등, 구축: 해체, 분리: 합일, 정신: 육체, 에너지(삶): 정보(앎), 일: 놀이, 감동: 동감, 구심: 원심, 통렬: 통쾌다. 특정 내용 중에 언급된 것은 수렴: 발산, 곡진: 허령, 색: 공이다.
마음병에 적용하면, 우울형 장애: 분열형 장애, 강박형 장애: 전환형 장애가 된다. 서구의학에서 말하는 좁은 의미의 우울증, 정신분열증, 강박장애, 전환장애와 각각 다른 범주적 표현이다. 특히 전환은 그 뜻 자체가 전혀 다르다. 이 넷은 공포·불안에 대한 병적 반응이므로 공포·불안 자체가 병이 되는 공포·불안형 장애와 비대칭의 대칭을 이룬다.
폭력적으로 쪼갬을 당해 생긴 병으로서 한사코 포개지려는 증상을 공시적으로 드러내면 우울형 장애, 통시적으로 드러내면 강박형 장애다. 폭력적으로 포갬을 당해 생긴 병으로서 한사코 쪼개지려는 증상을 공시적으로 드러내면 분열형 장애, 통시적으로 드러내면 전환형 장애다. 공시·통시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니 결국 마음병은 셋과 다섯 사이를 요동한다.
(3) 우울형 장애를 예로 들어 진단·치료에서 우스개와 우르개, 그 감각을 어떻게 쓰는지 임상 경험을 토대로 말해본다.
전형적인 우울증 포함 다양한 우울형 장애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병을 알지 못한 상태로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행 자체가 그대로 증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증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치료자의 감각이며 능력이다. 무엇보다 아픈 사람이 마음을 열고 말하거나 울고 웃을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애는 일부터 해야 한다. 아픈 사람과 치료하는 사람 사이의 높낮이를 없애는 수평화, 이것이 우스개의 시작이다.
내 상담실은 너무 밝지 않은 부분 조명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내 쪽을 더 밝게 하면 조금 더 어두운 쪽에 앉아 있는 아픈 사람이 덜 노출되므로 편안해진다. 두 사람이 마주앉는 책상 위는 전체적으로 정돈된 듯 보이지만 많은 물건들이 올망졸망 저마다의 방향을 잡고 널려 있어서 푼푼한 느낌을 준다. 날카로운 분석적 인상을 풍기는 왼쪽 얼굴보다 동네 아저씨 같이 푸근한 인상을 풍기는 오른쪽 얼굴이 아픈 사람을 향하도록 한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해도 아픈 사람은 동감에 든다. 조용한 우스개다. 여기서부터 아픈 사람은 말하고 울고 웃기 시작한다. 아픈 사람의 말, 웃음, 울음은 모두 접혀 있거나 구겨져 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하는 말·부풀리는 말·비판이 가득한 말이 그렇다. 늘 웃다시피 하는 웃음·웃을 상황이 아닌데 툭 웃는 웃음·허허거리는 뒤끝 긴 웃음이 그렇다. 흐느끼는 울음·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울음·꺽꺽거리는 울음이 그렇다.
이 증상들에 깊이 침륜되어 있는 아픈 사람에게 사실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치료자의 우선적 임무다. 연약한, 어찌 보면 한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심지어 흔쾌히 끌어안게 하는 이 정보 전달은 매우 중요한 우스개다. 예컨대 흐느껴 우는 사람을 한참 지켜보다가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한가, 묻는다.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듣고, 흐느낌 자체가 병의 한 증상임을 알려준다. 아, 그렇구나, 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흐느끼다 말고 문득 어떤 깨달음과 조우한 아픈 사람에게 화장지를 통째로 안겨준다. 그리고 말한다. “엉엉 소리 내어 통곡하세요!” 바로 이때 리미널리티가 쏜살같이 날아든다. 아픈 사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성통곡의 문을 열어젖힌다. 나는 그 소리에 영혼을 적시며 고요히 기다린다. 더 부추기지도 않는다. 아픈 사람이 통곡을 멈출 무렵 축하의 말을 건넨다. 원 없이 통곡한 사람은 해시시 웃는다. 내 언행은 우르갠가 우스갠가?
울게 했으니 우르개 맞다. 통곡은 접힌 것을 펴는 예술적 표현이었으니 우스개 맞다. 원 없는 통곡은 해시시 웃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으니 역설적 중첩이다. 해시시 웃는 웃음은 또 다른 눈물을 머금고 있으니 중첩은 다시 중첩을 일으킨다. 또 다른 눈물은 앎이 삶으로 전화되는 물적 과정을 창조한다. 자기부정으로 소거되던 삶에서 자기인정의 경계를 그려가는, “경박한 동일시를 추방하는 그 다름”(마사 누스바움)을 복원하는 본격 치료다.
우스개와 우르개는 서로를 가로질러 간다. 서로 포개지면서 쪼개지면서 무적의 무애를 빚어간다. 우울을 팡파르와 레퀴엠으로 노래하면서 장엄쥐뿔을 이루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