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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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제양약의 대부분은 질병을 치료하지 못한다. 몸속에 일정량의 화학매개물을 주입함으로써 병의 증상을 억제할 뿐이다. 한 예로, 조제양약으로는 고혈압을 치료할 수 없다. 고혈압 환자가 정기적으로 대개는 일생 동안 조제양약을 복용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식물과 달리, 고혈압 증상 억제제는 물론 조제양약 대부분이 일상적 식품도 아니고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섭취한 적이 있는 음식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은 낮 동안에 대소변을 통해 이 물질들을 배설해버린다. 복용한 약물의 50-95%는 화학적인 변화나 물질대사를 거치치 않은 채 그대로 배설된다.(122~123)

 

인체에서 배출된 조제양약과 그 대사물질은 대부분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화학적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환자들이 지속적으로 복용하거나 새로운 환자가 생길 때마다 새로 처방을 내리므로, 분해가 가능한 것도 정기적으로 재공급되고 있다.

  순수한 형태로든 물질대사를 거친 형태로든, 인체에서 배설된 조제양약은 폐수와 뒤섞여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환경 속에 흘러들어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연구에 따르면, 조제양약과 인체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부산물로 만들어진 화학물질은 본래 조제양약보다 더 오래 환경 속에서 잔존하며, 그 작용도 훨씬 강력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124)

 

조제양약, 곧 백색화학합성물질에는 3대악이 있다. (1) 증상만을 억제할 뿐이면서 치료약이라고 기만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진짜 치료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2) 목표 증상 억제라는 작은 이득보다 훨씬 더 큰 손해를 목표 이외의 곳에서 보게 만든다. 예를 들면 해열진통제에 들어 있는 암페타민 유사물질은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3) “인체에서 배설된 조제양약은 폐수와 뒤섞여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환경 속에 흘러들어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게다가 조제양약과 인체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부산물로 만들어진 화학물질은 본래 조제양약보다 더 오래 환경 속에서 잔존하며, 그 작용도 훨씬 강력한 경우가 많다.”

 

이 책에는 (2)가 빠져 있고, 내 책에는 (3)이 빠져 있다. 관심사의 작은 차이가 낳은 큰 결과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받은 충격은 남다른 것이었다. 기왕에 알고 있던 농약, 환경호르몬, 플라스틱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복용한 약물과 그 부산물이 배설되어 이런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에는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곰곰 생각하니 이 또한 내 내면에 잔존해 있는 인간중심주의라는 결론이 나온다. 중독은 참으로 끈질기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 예측도 이해도 불가능하지만 기어코 닥치고야 말 파국을 코앞에 두고도 설마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참혹한 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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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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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꿈의 필요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꿈꾸기가 필요한 이유는 사물의 이치와 자신의 정체성, 본질을 이해하고 매순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의미를 처리해서, 삶의 바탕 속에 짜 넣으려는 타고난 욕구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꿈꾸기의 목적은 무의식으로 하여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삶의 의미를 처리하게 해주는 데에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기 인격의 바탕 속에 의미를 통합한다. 이로써 그의 삶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더욱 분명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더욱 깊어진다.......얄팍한 꿈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 TV. 그 결과 인간은 어느 특정 산업과 사고방식만을 반영하는 천박하고 균질적인 의미의 꿈에 반복해서 노출된다. 무의식은 TV가 제공하는 자료에 대해서도 꿈이나 그와 유사한 다른 것을 대할 때처럼 반응한다. TV가 제공하는 내용을 똑같이 처리해서 의미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 수준이 낮은 탓에 인간은 깊은 의미에 다가가기 갈수록 힘든 세계를 살게 되었다. 결국 인간은 TV가 최대한 쉽게 알아먹도록 가공된 꿈에 볼모잡혀 삶을 탕진하고 있는 것이다.(102~109)

 

나는 이 부분, 정확히 말하면 꿈, TV, 그리고 꿈과 TV를 여러 번 되작거리고 집적거리고 끼적거리고 덤비면서 곰삭혔다. 매우 결정적인 문제여서다.

 

꿈은 무의식과 의식을 상호 소통시키는 경계사건이다. 꿈은 생시에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이 지휘하는 서사다. 무의식 서사를 기축으로 의식과 무의식이 교류함으로써 의식적 삶의 기품을 조절한다. 무의식 서사 여하에 따라 의미와 무의미의 실체 허무주의에 떨어지기도 하고 네트워킹 가치에 실려 날아오르기도 한다.

 

무의식 서사의 바탕은 야생 자연과 함께 한 경험이다. 그 경험에서 길어 올린 생명지식과 정서, 그리고 지향이 어우러져 짜인 무의식 서사는 의식 서사에 modularity, networking, collective intelligence로 배어들어 가치를 창조한다. 프랑크 마르텔라의 언어로 번역하면 자율성, 관계맺음, 유능감과 선의다.

 

인간의 삶에 깃든 가치를 경험하는 데 꿈은 필수다. 꿈이 가치를 창조하는 데 야생 자연, 특히 낭·풀에 참여한 경험은 필수다. ·풀에 참여한 경험을 제거하고 어느 특정 산업과 사고방식만을 반영하는 천박하고 균질적인 의미의 꿈가공해 인간으로 하여금 거기 볼모잡혀 삶을 탕진하도록 꼬드기는 것이 TV.

 

TV는 단순히 바보상자가 아니다. TV는 악마상자다. 인간에게서 가치를 훔쳐가고 대신 가격을 매겨 팔아먹는다. 고가의 유명인 패거리들이 만들지 않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 고가 유명인일수록 천박하고 균질적이다. “최대한 쉽게 알아먹도록해줘야 대박친다. 바야흐로 유튜브 세상에서 인간은 각자 TV에 지나지 않는다.

 

꿈과 가치, 끝내 인간자체를 삼키고야 만 TV는 화학합성약물, 플라스틱, 원자력발전소, 이산화탄소 배출 공장, 4대강 보보다 훨씬 더 해롭고 독하다.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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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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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원주의자들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서로 다른 자연 풍경은 제각각 서로 다른 분명한 정서적 색조를 뿜어낸다.......후쿠오카 마사노부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두들 인간의 감정이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가본데, 내 생각은 다르다.......감정들은 모두 자연에서 비롯한다.”(98~99)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말한 인간 정신은 주류 인식으로 정확히 하면 뇌다. 정신을 뇌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뇌가 감정을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당연해 보이는 이 생각은 전제 오류이므로 자연히 거짓이다. 감정 분자, 소화기관을 위시한 다른 장기, 특히 장내미생물과 감정의 관계 연구로써 그 허구성이 시시각각 드러나고 있다.

 

감정은 인간의 고유한 내부 심리가 아니다.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reaction 또는 감응response 작용이다. 외부 자극은 근원적으로 자연이다. 이 책에서는 눈으로 보는 풍경을 언급하지만 훨씬 더 방대하면서도 내밀하다. 오감과 제6감 모두를 넘어서 인간 생명은 자연, 특히 미생물과 그 네트워킹인 낭·풀에서 비롯한 감정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대중매체를 통해 이미 상식이 된 세로토닌 이야기를 해보자. 논란이 없지 않지만 우울장애와 연관 짓는 대표적인 신경전달물질이다. 주류의학과 제약회사는 뇌만 문제 삼는다. 세로토닌 선택적재흡수억제제SSRI로 뇌 내 세로토닌 작용을 정상화시키면 우울장애가 치료된다고 떠든다. SSRI의 총아 프로작은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400만 명이 복용하고 있다.

 

세로토닌은 거의 대부분 뇌가 아닌 장이 만든다. 정확히 말하면 장도 아니고 그 점막 바깥에서 인간과 공생하고 있는 미생물들이 만든다. 대표적인 것이 미코박테리움 바케라는 토양박테리아다. 숲을 걷거나 흙을 만질 때, 코나 피부를 통해 인체 속으로 들어와 장 점막 바깥에 둥지를 틀고 살게 된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세로토닌을 인간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숲이라는 풍경, 대지라는 환경을 보고 접촉하면서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직접 감정을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놀라운 얘기를 지금 하고 있다. 박테리아의 참여 없이는 행복, 다행, 균형의 정서조차 누리지 못할 주제가 만물의 영장, 신의 형상 운운하며 거들먹거려온 세월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머리 땅에 박고 발바닥 하늘로 향하게 선다,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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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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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가 그런 것처럼, 인간은 복합적인 박테리아 공생체다.......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의 친족이다. 그러므로 인간 속에 내재하는 생명사랑biophilia의 마음은 다른 생명체들과의 본질적인 친연성과 인류 출현 이래 오랜 세월 지속된 긴밀한 관계에서 비롯한 것이다.(90)

 

자연에 지속적으로 몰입하게 되면 자연과의 합일이 일어나고, 이는 곧 생명지식biognosis(단편적으로 축적한 정보의 단순한 조합이 아닌, 자연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깊이 있는 지식)으로 심화된다. 자연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이나 개개의 요소들이 자연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지식은 그 과정의 각 단계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도 터득할 수 있다. 사실 생명지식은 꿈이나 순간적인 깨달음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단계 같은 것은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지식은 생명사랑에 몰입함으로써 풍경이나 식물, 동물 그 자체에서 직접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지식을 자각하게 만드는 요인은 있다. 그러나 그 전의 많은 요인들은 여전히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유기체를 탄생시킨 모체 속에 새겨져 있는 유기체들 간의 오랜 상호작용의 표지, 즉 본질적으로 서로 친족인 종들 사이에 상호작용한 표지는 여전히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94)

 

삼지三知가 있다. 나면서 아는 것生而知之, 배워서 아는 것學而知之, 애써서 아는 것困而知之. 곤이지지는 통이지지痛而知之와 통한다. 괴로움이나 아픔을 겪어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랑해서 아는 것愛而知之은 어떤가? 어쩌면, 아니 이치상 자연스럽게 곤이지지-통이지지-애이지지는 한 뜻으로 이어질 법하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로 다리를 놓아주면 금방 흐름이 생긴다. 심지어 상호작용이라는 사실까지 통찰하게 된다.

 

생명사랑biophilia생명지식biognosis을 일으킨다. 사랑이 몰입으로 일으키는 지식은 이성이 분석으로 일으킨 지식과 근원 지점에서 다르다. 전자는 ‘~아는 것이고, 후자는 ‘~에 대하여아는 것이다. ‘~은 또 하나의 주체인 객체를 직관하고, ‘~에 대하여는 대상인 사물을 해부한다. 주체인 객체는 쌍방적으로 교감을 나누고, 대상인 사물은 일방적으로 판단을 받는다. 쌍방적 교감은 관계를 고양하고, 일방적 판단은 존재를 고립시킨다.

 

고립된 존재는 죽음으로 오그라들고 고양된 관계는 창발로 번져간다. 창발로 번져가는 시공이 바로 영의 누리다. 참된 영의 누리는 복합박테리아공생체 네트워킹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포함 모든 인간중심적 영성 이데올로기 운동은 죄다 죄다. 영성의 지성소인 낭·풀 생명을 수탈하고 살해한 반사랑, 그악한 신성모독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저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참람한 무지 집단이다.

 

참람한 무지로 무지하게 무시한 것이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고요다. 이 고요는 유기체를 탄생시킨 모체 속에 새겨져 있는 유기체들 간의 오랜 상호작용의 표지로서 워낙 소미하기 때문에 거대만을 좇아온 문명인류가 들을 수 없었다. 들리지 않자 적요로 처리했다. 적요는 생명지식을 지식세계에서 축출했다. 생명지식을 축출하자 생명사랑이 말라버렸다. 생명사랑 말려버린 인간이 목하 해맑은 표정으로 온 생명을 죽이는 중이다.

 

사랑은 지식으로 신이 되고 지식은 사랑으로 영이 된다. 사랑이란 말이 천지에 범람하고 지식이 우주를 밝히건만 신도 없고 영도 없는 세상인 것은 그 사랑과 그 지식의 인간성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을 넘어선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면 낭·풀 사랑으로 낭·풀 지식에 귀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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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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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를 살아 있는 존재로 보는 관점과 기계로 보는 관점 사이의 갈등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베르트 마이어의 다음 시를 읽어보자.

 

바로 지금

돌 하나가 깜짝 놀랐다.

나를 보는 순간

죽은 척

나를 피해버렸다.

 

이제, 이 시를 미국 철학자 켄 윌버의 글과 대조해보자.

 

그대와 그대의 노리개인 돌멩이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똑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점뿐이다.

 

  .......마이어의 시가 인격의 생동감과 어린아이 같은 경이감을 활성화시킨다면, 윌버의 글은 듣는 이로 하여금 몸의 영역에서 벗어나 정신의 영역으로, 냉소적 영리함 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80~81)

 

각자 관지觀地에 따라 다른 느낌을 가지기 마련이다. 나는 노이베르트 마이어의 시를 읽고 우울증 환자 모습을 떠올렸다. 이어서 지구가 인간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고통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번져갔다. 이것은 필경 직업의 영향이다. 자기부정을 공포·불안의 방어기제로 발동시키는 질병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수긍이 가능하다.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우르개 감수성이 우스개 감수성 전면에 놓여 있는 내 내면 풍경화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노이베르트 마이어를 모른다. 켄 윌버는 (꿰뚫어) 안다. 뜨르르한 평판을 지닌 그의 책을 선물 받아 읽다가 돌연 접었다. 이후 다른 사람들의 찬사에 아랑곳없이 나는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와 원효를 비교한 글이 있다기에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행여나 해서 끝까지 읽고는 켄 윌버의 그 책처럼 돌연 접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의 웅혼한(?) 사상은 치명적인 독침을 지닌다. 그 독침에 발라진 맹독의 핵심이 위 본문에 드러나 있다.

 

나는 현저하게 반인간중심주의적 태도를 견지해온 사람이고, 누구보다 낭·풀 본성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사람임에도, 고백하건대 여전히 인간 편에서 사유하고 실천하는 끈질긴 관성을 지녔다. ·풀의 영에 가 닿는 현실적인 문제와 씨름할 때 도구적 접근에 아직도 끌려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맹성무인지경을 헤맨다. 이 고백과 반성에 입각해 보면 확실히 인간은 모성살해를 자행하면서도 한없이 뜯어가려고 포악질 해대는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전 글(5. 과학 너머)의 마지막 문장이 이 감수성을 향해 낭·풀은 말을 걸어온다.”였다.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감수성을 갖춘 인간이 기다리고 있으면 낭·풀이 먼저 다가온다는 태도가 담긴 말이다. 장구한 역사로 보면 그렇다 싶지만 오늘 현실에서 보면 당연히 인간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 인간은 살해자며 수탈자다. 참회와 감사를 담아 고통의 언어를 앙청하고 경청해야 한다. ·풀의 고통에 책임에 있으므로 치유서약부터 하는 것이 도리다.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5백세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지마다 인간의 소원 또는 탐욕을 담은 수많은 연등이 걸렸다. 불교는 회화나무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상징으로 여긴다고 들었다. 가격별 다른 색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연등과 피안의 길이 무슨 관련 있을까. 엊그제 그 앞에 예를 갖추어 섰는데 반짝이는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동전이다. 몇 푼 안 되는 저 동전을 수피 틈새에 끼워 넣은 인간은 대체 무엇을 달라고 빌었을까.

 

돌아서다 문득 나 또한 이 풍경 속에 자리 차지하고 있는 파렴치한에 지나지 않는구나!” 탄식을 터뜨린다. 자연을 수단으로 삼는 한 그 어떤 고매한 사상도 몽매다. 이른바 생명이란 이른바 생명에서 흘러나온 일종의 적응방식일 뿐이라는 진리에 무지한 한 어떤 심오한 철학도 과오다. 돌이든 풀이든, 달이든 나무든 인간의 변방인 존재란 없다. 이들을 극진히 모시는 일이 아니라 인과율이나 거대인격신만을 신봉하는 과학과 고등종교가 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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