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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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가 그런 것처럼, 인간은 복합적인 박테리아 공생체다.......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의 친족이다. 그러므로 인간 속에 내재하는 생명사랑biophilia의 마음은 다른 생명체들과의 본질적인 친연성과 인류 출현 이래 오랜 세월 지속된 긴밀한 관계에서 비롯한 것이다.(90)

 

자연에 지속적으로 몰입하게 되면 자연과의 합일이 일어나고, 이는 곧 생명지식biognosis(단편적으로 축적한 정보의 단순한 조합이 아닌, 자연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깊이 있는 지식)으로 심화된다. 자연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이나 개개의 요소들이 자연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지식은 그 과정의 각 단계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도 터득할 수 있다. 사실 생명지식은 꿈이나 순간적인 깨달음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단계 같은 것은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지식은 생명사랑에 몰입함으로써 풍경이나 식물, 동물 그 자체에서 직접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지식을 자각하게 만드는 요인은 있다. 그러나 그 전의 많은 요인들은 여전히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유기체를 탄생시킨 모체 속에 새겨져 있는 유기체들 간의 오랜 상호작용의 표지, 즉 본질적으로 서로 친족인 종들 사이에 상호작용한 표지는 여전히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94)

 

삼지三知가 있다. 나면서 아는 것生而知之, 배워서 아는 것學而知之, 애써서 아는 것困而知之. 곤이지지는 통이지지痛而知之와 통한다. 괴로움이나 아픔을 겪어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랑해서 아는 것愛而知之은 어떤가? 어쩌면, 아니 이치상 자연스럽게 곤이지지-통이지지-애이지지는 한 뜻으로 이어질 법하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로 다리를 놓아주면 금방 흐름이 생긴다. 심지어 상호작용이라는 사실까지 통찰하게 된다.

 

생명사랑biophilia생명지식biognosis을 일으킨다. 사랑이 몰입으로 일으키는 지식은 이성이 분석으로 일으킨 지식과 근원 지점에서 다르다. 전자는 ‘~아는 것이고, 후자는 ‘~에 대하여아는 것이다. ‘~은 또 하나의 주체인 객체를 직관하고, ‘~에 대하여는 대상인 사물을 해부한다. 주체인 객체는 쌍방적으로 교감을 나누고, 대상인 사물은 일방적으로 판단을 받는다. 쌍방적 교감은 관계를 고양하고, 일방적 판단은 존재를 고립시킨다.

 

고립된 존재는 죽음으로 오그라들고 고양된 관계는 창발로 번져간다. 창발로 번져가는 시공이 바로 영의 누리다. 참된 영의 누리는 복합박테리아공생체 네트워킹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포함 모든 인간중심적 영성 이데올로기 운동은 죄다 죄다. 영성의 지성소인 낭·풀 생명을 수탈하고 살해한 반사랑, 그악한 신성모독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저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참람한 무지 집단이다.

 

참람한 무지로 무지하게 무시한 것이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고요다. 이 고요는 유기체를 탄생시킨 모체 속에 새겨져 있는 유기체들 간의 오랜 상호작용의 표지로서 워낙 소미하기 때문에 거대만을 좇아온 문명인류가 들을 수 없었다. 들리지 않자 적요로 처리했다. 적요는 생명지식을 지식세계에서 축출했다. 생명지식을 축출하자 생명사랑이 말라버렸다. 생명사랑 말려버린 인간이 목하 해맑은 표정으로 온 생명을 죽이는 중이다.

 

사랑은 지식으로 신이 되고 지식은 사랑으로 영이 된다. 사랑이란 말이 천지에 범람하고 지식이 우주를 밝히건만 신도 없고 영도 없는 세상인 것은 그 사랑과 그 지식의 인간성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을 넘어선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면 낭·풀 사랑으로 낭·풀 지식에 귀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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