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우주를 살아 있는 존재로 보는 관점과 기계로 보는 관점 사이의 갈등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베르트 마이어의 다음 시를 읽어보자.

 

바로 지금

돌 하나가 깜짝 놀랐다.

나를 보는 순간

죽은 척

나를 피해버렸다.

 

이제, 이 시를 미국 철학자 켄 윌버의 글과 대조해보자.

 

그대와 그대의 노리개인 돌멩이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똑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점뿐이다.

 

  .......마이어의 시가 인격의 생동감과 어린아이 같은 경이감을 활성화시킨다면, 윌버의 글은 듣는 이로 하여금 몸의 영역에서 벗어나 정신의 영역으로, 냉소적 영리함 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80~81)

 

각자 관지觀地에 따라 다른 느낌을 가지기 마련이다. 나는 노이베르트 마이어의 시를 읽고 우울증 환자 모습을 떠올렸다. 이어서 지구가 인간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고통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번져갔다. 이것은 필경 직업의 영향이다. 자기부정을 공포·불안의 방어기제로 발동시키는 질병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수긍이 가능하다.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우르개 감수성이 우스개 감수성 전면에 놓여 있는 내 내면 풍경화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노이베르트 마이어를 모른다. 켄 윌버는 (꿰뚫어) 안다. 뜨르르한 평판을 지닌 그의 책을 선물 받아 읽다가 돌연 접었다. 이후 다른 사람들의 찬사에 아랑곳없이 나는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와 원효를 비교한 글이 있다기에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행여나 해서 끝까지 읽고는 켄 윌버의 그 책처럼 돌연 접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의 웅혼한(?) 사상은 치명적인 독침을 지닌다. 그 독침에 발라진 맹독의 핵심이 위 본문에 드러나 있다.

 

나는 현저하게 반인간중심주의적 태도를 견지해온 사람이고, 누구보다 낭·풀 본성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사람임에도, 고백하건대 여전히 인간 편에서 사유하고 실천하는 끈질긴 관성을 지녔다. ·풀의 영에 가 닿는 현실적인 문제와 씨름할 때 도구적 접근에 아직도 끌려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맹성무인지경을 헤맨다. 이 고백과 반성에 입각해 보면 확실히 인간은 모성살해를 자행하면서도 한없이 뜯어가려고 포악질 해대는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전 글(5. 과학 너머)의 마지막 문장이 이 감수성을 향해 낭·풀은 말을 걸어온다.”였다.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감수성을 갖춘 인간이 기다리고 있으면 낭·풀이 먼저 다가온다는 태도가 담긴 말이다. 장구한 역사로 보면 그렇다 싶지만 오늘 현실에서 보면 당연히 인간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 인간은 살해자며 수탈자다. 참회와 감사를 담아 고통의 언어를 앙청하고 경청해야 한다. ·풀의 고통에 책임에 있으므로 치유서약부터 하는 것이 도리다.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5백세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지마다 인간의 소원 또는 탐욕을 담은 수많은 연등이 걸렸다. 불교는 회화나무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상징으로 여긴다고 들었다. 가격별 다른 색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연등과 피안의 길이 무슨 관련 있을까. 엊그제 그 앞에 예를 갖추어 섰는데 반짝이는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동전이다. 몇 푼 안 되는 저 동전을 수피 틈새에 끼워 넣은 인간은 대체 무엇을 달라고 빌었을까.

 

돌아서다 문득 나 또한 이 풍경 속에 자리 차지하고 있는 파렴치한에 지나지 않는구나!” 탄식을 터뜨린다. 자연을 수단으로 삼는 한 그 어떤 고매한 사상도 몽매다. 이른바 생명이란 이른바 생명에서 흘러나온 일종의 적응방식일 뿐이라는 진리에 무지한 한 어떤 심오한 철학도 과오다. 돌이든 풀이든, 달이든 나무든 인간의 변방인 존재란 없다. 이들을 극진히 모시는 일이 아니라 인과율이나 거대인격신만을 신봉하는 과학과 고등종교가 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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