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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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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기 안의 어린아이에게 다가가는 문을 열면, 세계는 물론 세계 속의 미묘한 의미에 다시 다가가는 문도 열린다.......식물과 소통하는 많은 원주민이 어린아이 같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333쪽)
유아에게는 모든 일을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유아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세계를 전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334쪽)
정신치료 분야의 “상처 입은 내면아이”라는 용어는 치료 받으러 온 사람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상처를 입어 성장을 멈추고 방어 자세로 고착되어 있는 정신 상태를 개별 인격체로 이미지화한 것이다. 이 내면아이는 어른으로 성장시킬 대상이므로 본문이 말하는 “자기 안의 어린아이” 또는 “유아”와는 전혀 다르다. 전혀 다른 상처 입은 내면아이 이야기를 들머리에 꺼낸 이유가 있다. 바로 “언어”라는 관건 때문이다.
언어를 전혀, 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어린아이는 당연히 그만큼 언어를 매개로 하는 사유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세계는 물론이고 세계 속의 미묘한 의미”를 “전체로 인식”한다. 전체로 인식하는 것은 분석하지 않는 것이다. 분석은 틀이 있어야 하므로, 분석하지 않는 인식은 틀이라는 매개 없이 직접 세계를 본다. 직접 전체를 인식해 도달한 지식, 그러니까 반야 지혜는, 그것을 품은 주체, 그러니까 어린아이의 존재와 행위에 합일된 생명 사건이다.
주체의 존재와 행위에 합일된 반야 지혜야말로 낭·풀의 본성에 가 닿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진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나. 임상가인 나는 상처 입은 내면아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상처 입은 시기가 이를수록, 그러니까 언어 사용이 차단될수록 치유는 어려워진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 또한 주체의 존재와 행위에 합일되는 ‘반야’ 사건이다. 반야 상처는 언어로 치유되지 않는다. 언어와 언어의 경계에서 고요를 모셔야 한다. 고요가 바로 영이다.
영인 고요는 언어로 ‘성장시킬’ 대상이 아니다. 인간이 그 참된 기원을 기리며 끝내 보존해야 할 지성소다. 언어 어른 안에 있는 고요 아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시생대에서 그치지 않는다. 고요 아이는
인간 역사의 아득한 시원, 저 고대인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생명 역사의 아득한 시원, 저 낭·풀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고요 아이를 깨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