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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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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오래 전부터 우리의 스승이자 치료사였다. 체로키족과 크리크족은 이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식물이 자손인 인간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기 때문에, 제각각 인간의 질병 치료를 위한 약을 제공해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생각 속에는 깊은 지혜가 담겨 있다. 인간을 식물의 자손으로 생각하면 가족적 유대감이 생겨난다. 그럴 때, 식물을 이용가치 있는 자원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가족의 일원, 나아가 연장자로 대우한다. 관계 양상이 바뀌는 것이다. 게다가 힘을 지닌 쪽은 인간이 아니라 식물이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식물은 재산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그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각성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프면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식물도 우리를 도우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고대 그리스인은 어떤 식물을 일컬어 생명을 주는 자라는 의미의 암브로시아라고 불렀다. 그들 또한 식물과 관련한 중대한 각성에 이미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315~316쪽)
국가화한 인간이 건국설화나 상고사, 심지어 신화까지 전거 삼아 기원 문제를 앞세우고 나올 때는 반드시 정치적 노림수가 있기 마련이다. 기원을 예찬하는 척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 정치판에서 낭·풀이 인간의 기원이라는 진리 주장은 그야말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다. 천상에서 강림한 위대한 존재 기원은 인간 자의식의 과잉 팽창을 반영한다. 음성 피드백의 고리가 끊어진 진화의 폭주가 이런 ‘예술’을 창조했다. 이 예술의 끝판왕은 단연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했다는 서사다. 신의 형상인 인간에게 낭·풀은 죽인다는 생각조차 없이 죽여도 되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의 이런 어리석은 생각과 무관하게 낭·풀이 인간의 생육자요 교육자요 치료자라는 진실은 불변이다. 이 진실의 부정은 지구 역사의 부정이며 인간 현존 자체의 부정이다. 인간본성에서 낭·풀 본성을 제거하면 인간은 무엇일까? 인간 아닌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