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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평점 :
자크 타상Jacques Tassin의 『나무처럼 생각하기』는 본디 『Penser comme un arbre』다. 나는 이름에서 부정관사 un을 뺀다. 그러면 『나무로서 생각하기』가 된다.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선, 심지어 본성이 일치하는 느낌을 준다. 내가 요 몇 달 동안 나무삼매경에 들어서, 나무하고 내 눈 사이가 초점거리 안으로 썩 들어와 있기에 다다른 프랑스어 지식이다. 그래. 나무로서 생각하기, 다.
나무로서 생각하기는 책상물림이 성마르게 끌어당긴 관념성의 증좌일 수도 있다. 실재에서 인간이 나무로서 생각하는 것은 “처럼”에서 “로서”로 말을 바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원한다고 똑 되는 일이 아니다. 올지 오지 않을지조차 모르는 때, 그 때가 차는 순간, 홀연히 깨달을 일이다. 내가 우정 “로서”라고 한 것은 그 때를 앞당기려 함이 아니다. 오직 흘리지 않으려 함이다.
많은 낭·풀의 사람이 그랬듯, 자크 타상은 자신만의 놀라운 통찰을 도처에 놓아둔다. 어떻게 다른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했을까, 싶은 것들이 이번에도 여기저기서 반짝거린다. 인간의 지식은 아무리 촘촘히 짜도 숭덩숭덩한 것이다. 죽는 날까지 자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런 깨달음이 바로 나무로서 생각하기의 꼭스러운 예다. ‘그만하면 됐다’ 싶은 찰나, 인간이다.
나무로서 생각하는 것은 나무 본성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우종영이 『바림』에서 제시한 본성 “나무는 단단하면서 유연하다, 나무에게는 리더가 없다, 나무는 속을 비운다.”를 따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질상 modularity, networking, collective intelligence 와 같으므로 생각의 기축은 이미 굳건하게 서 있다. 문제는 인간 본성과 나무 본성 사이에 존재하는 격절이다.
본성 간 격절은 어떻게 얼마나 극복할 수 있는가? 내가 “처럼”에서 “로서”로 바꾸고자 한 능동·적극 지향이 유의미할 만큼 유효한 통로가 실재하는가? 혹 그것은 내 능동·적극 문제가 아니고 나무의 능동·적극 문제가 아닌가? 나무삼매경이 내 무엇을 변화시켰는지 내가 지금 아는 만큼으로서는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닌가? 질문을 더 다지려 『나무처럼 생각하기』 앞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