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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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얽혀 있는 뭇 생명 사이에서 나무는 나무의 자리를 잡고, 나무의 기준으로 세상을 만들고, 나무의 본성에 따라 영향을 미쳐.......나무의 영향을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인간의 기나긴 여정 동안 인간과 세계를 연결해준 것이 바로 나무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나무의 서식지요 점유지인 어느 행성이다.(6~7)

 

관악산의 맥 가운데 정북으로 향한 야트막한 능선 이름이 까치다. 까치능선이 더욱 낮게 엎드려 길을 터준 것이 한강이다. 까치능선 동쪽으로 흐르다 한강에 깃드는 지천 가운데 반포천이 있다. 그 반포천과 한강 사이에 지어진 50년 된 아파트로 지난겨울 막바지에 이사했다. 반포천 둔치를 따라 조성한 산책로가 새로운 출퇴근길이 되었다.


 

이 출퇴근길 처음과 마지막 일부로 일부러 넣은 편도 500m가량 코스가 있다. 나는 이 곳을 메타 길이라 부른다. 본디 산책로와 나란하게 만든 지도상에 나오지 않는 길인데다, 양쪽에 메타세쿼이아를 줄줄이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길을 아침저녁으로 걸은 지 이제 3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 사이 나는 이상한 나무 경험을 한다. 세 번째 버드나무 이야기다.

 

여기가 20년 전 나무 고아원이었던 습지고 천변이라는 사실에 터해 버드나무를 찾아보았다. 그러니까 인사동·광화문 경험과 정반대 패턴이었던 셈이다. 보이지 않았다. 찾기를 단념하고 잊어가던 어느 날, 홀연히 수양버들 한 그루가 눈앞에 나타났다.” 다음날부터 주의를 바짝 기울이며 다시 버드나무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성과는 미미했다. 갯버들 한 그루를 보았을 뿐이다. 다시 주의가 느슨해지던 어느 날, 다시 사이 거리 1m도 채 안 되는 수양버들 두 그루가 홀연히 나타났다.” 거기 둘이나 있었는데 어떻게 보지 못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 뒤에도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번 더 나타났다.” 도합 6그루지만 더 기다려 본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모르니까. 그나저나 길 이름을 바꿔야 하려나.

 

익히 아는 대로, 우주 공간에서 바라본 지구별은 푸르다. 그 푸름은 바다의 블루와 나무의 그린을 끌어안은 푸름이다. 바다의 블루에서 나무의 그린이 생겨났지만 나무의 그린 없는 바다의 블루란 아무 의미도 없다. 지구 생명 네트워킹은 나무의 자리에서 비롯하여, “나무의 기준으로 구성되며, “나무의 본성을 따라 번져간다. 인간은 나무가 연결해주고서야 비로소 행성의 일원이 된다. 이 행성은 나무의 서식지요 점유지. 점유자가 이 행성을 이끈다. 나무가 내게 나타나는 것이지 내가 나무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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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14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로 너무 멋지네요. 그 산책로에서 나타날 버드나무를 찾는 bari_che님도 멋집니다. ^^

bari_che 2021-04-15 08: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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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타상Jacques Tassin나무처럼 생각하기는 본디 Penser comme un arbre. 나는 이름에서 부정관사 un을 뺀다. 그러면 나무로서 생각하기가 된다.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선, 심지어 본성이 일치하는 느낌을 준다. 내가 요 몇 달 동안 나무삼매경에 들어서, 나무하고 내 눈 사이가 초점거리 안으로 썩 들어와 있기에 다다른 프랑스어 지식이다. 그래. 나무로서 생각하기, .

 

나무로서 생각하기는 책상물림이 성마르게 끌어당긴 관념성의 증좌일 수도 있다. 실재에서 인간이 나무로서 생각하는 것은 처럼에서 로서로 말을 바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원한다고 똑 되는 일이 아니다. 올지 오지 않을지조차 모르는 때, 그 때가 차는 순간, 홀연히 깨달을 일이다. 내가 우정 로서라고 한 것은 그 때를 앞당기려 함이 아니다. 오직 흘리지 않으려 함이다.

 

많은 낭·풀의 사람이 그랬듯, 자크 타상은 자신만의 놀라운 통찰을 도처에 놓아둔다. 어떻게 다른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했을까, 싶은 것들이 이번에도 여기저기서 반짝거린다. 인간의 지식은 아무리 촘촘히 짜도 숭덩숭덩한 것이다. 죽는 날까지 자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런 깨달음이 바로 나무로서 생각하기의 꼭스러운 예다. ‘그만하면 됐다싶은 찰나, 인간이다.

 

나무로서 생각하는 것은 나무 본성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우종영이 바림에서 제시한 본성 나무는 단단하면서 유연하다, 나무에게는 리더가 없다, 나무는 속을 비운다.”를 따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질상 modularity, networking, collective intelligence 와 같으므로 생각의 기축은 이미 굳건하게 서 있다. 문제는 인간 본성과 나무 본성 사이에 존재하는 격절이다.

 

본성 간 격절은 어떻게 얼마나 극복할 수 있는가? 내가 처럼에서 로서로 바꾸고자 한 능동·적극 지향이 유의미할 만큼 유효한 통로가 실재하는가? 혹 그것은 내 능동·적극 문제가 아니고 나무의 능동·적극 문제가 아닌가? 나무삼매경이 내 무엇을 변화시켰는지 내가 지금 아는 만큼으로서는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닌가? 질문을 더 다지려 나무처럼 생각하기앞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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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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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에 걸쳐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의 식물은 위대한 화학자를 음미했다. 시종일관 서로 갈마들며 내 의중을 사로잡았던 것은 세 가지 의문이다. 하나, 인간으로서 어찌 하면 낭·풀과 생동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 임상가로서 어찌 하면 낭·풀과 깊은 의학적 일치에 이를 수 있을까? ,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내가 낭·풀을 위해 뭘 해야 할까?

 

같은 인간끼리도 생동하는 관계를 맺기 쉽지 않은데 어떻게 낭·풀과? 얼핏 생각하면, 아니 과학적으로 생각할수록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얘기 같다. 그러나 인간은 겉(의식)과 속(무의식)이 분리되어 있(다고 굳게 믿)어서 어려운 것이다. 의식의 소유권을 포기하면 어린아이처럼 단도직입으로 낭·풀과 접속할 수 있는 것이 이치다. 나는 이 이치에 따를 것을 결곡하게 서약한다.

 

나는 이미 낭·풀을 약으로 써온 한의사다. 여태까지는 동아시아 전통 방식을 주축으로 하고 서구과학 방식을 참고했다. 여기에 내가 낭·풀과 맺을 생동하는 관계를 개입시키면 양상이 달라진다. ·풀 생명 이치가 처방의 구성과 서사를 재조정하게 함으로써 도구적 지위에서 벗어난다. 동등한 숙의로 의학적 일치를 창조한다. 나는 이 일치에 따를 것을 곡진하게 서약한다.

 

하루 하나씩 낭·풀을 멸종시키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내게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 물론 초국적 제약회사의 주구 노릇을 하는 양의사만큼은 아니지만 의료인으로서 더 통감해야 할 책임도 작지 않다. 월세 걱정해야 하는 변방 한의사 주제지만 최선을 다해 낭·풀이 일군 이 녹색생명세계를 보살피는 데 옹글게 일조해야 한다. 나는 이 일조에 신명 다할 것을 엄숙하게 서약한다.

 

서약이 내게 지우는 짐은 현실 삶에서, 의료 실천에서, 사회 참여에서 물적으로 변화가 드러나야 한다는 직접적 요구다; 시대정신을 거슬러 미친 삶으로 나아가라, 진욕進辱을 결행하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마지막 공부라 한 것이다. 내 생이,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일는지 모르는 채, 네트워킹 생명운동에 운명을 내맡기고 건곤일척해보기로 한다. ·풀의 가피를 삼가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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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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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아는 데는 정신 이외의 다른 능력이 필요하며, 그 시작은 바로 상상력에 있다.(395)

 

상상력은 인과성·확실성 너머로 번져가는 유연하고 창발적인 심리 지향에서 나온다. 이치로 보면 사랑은 상상력의 소산, 아니 상상력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역으로 사랑이 상상력의 원천일 수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상상력이 사랑과 연동된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없다.

 

상상력에서 발휘되기 시작하는 정신 이외의 다른 능력은 사랑과 연동된 영이다. 영이 아는 세계는 정신, 그러니까 과학 너머의 세계다. 과학 너머의 세계를 보는 지식이 궁극의 지식이다. 궁극의 지식은 네트워킹으로 여는 창발이다. 창발의 불쏘시개가 다름 아닌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상상 이상으로 옹글고 성긴 생명운동이다. 옹글어서 실재를 만들어내고, 성글어서 물질을 풀어헤친다. 무애자재 상상력을 타고 영으로 만나 합일하는 낭·풀과 인간을 상상한다. 이 상상은 어떤 상상보다 황홀하다. 거룩하고 질탕하다. 여한 없는 상상을 여한 없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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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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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사랑하는 것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돌보게 된다. 그 것에 몰입하고, 그것을 위해 싸운다. 마찬가지로 식물과 관계 맺기를 재발견하면치유라는 통로보다 더 본질적인 길이 어디 있겠는가?식물왕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깨어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의 보호자가 된다.(386~387)

 

사랑은 식물적이고 소유는 동물적이다. 사랑은 타자를 위한 전사가 되는 일이고 소유는 자기를 위한 전사가 되는 일이다. 식물은 타자의 결핍을 떠안고 동물은 타자의 결핍에서 떠난다. 떠안는 것은 공존공생이고 떠나는 것은 각자도생이다.

 

우리는 다음 이야기를 알고 있다. 추운 설산을 지나던 한 사람이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본다. 자기만이라도 살기 위해 서둘러 길을 간다. 다른 한 사람이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본다. 자기만 살 수는 없어서 그를 업고 느릿느릿 길을 간다. 얼마 뒤, 홀로 가던 그 한 사람이 얼어 죽은 모습을 두 사람이 본다. 다른 사람을 업고 힘쓴 사람 몸에서 나는 열이 두 사람 모두를 살린 것이다.

 

문명 이후 인류는 인류만 번영하는 길에 탐닉해왔다. 돌이키지 않으면 인류마저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파멸의 위기 앞에선 인류가 재발견해야 할 것은 식물과 관계 맺기다. 정확히 말하면 식물 본성에 겸손하게 참여하기다. 겸손하게 참여해야 할 식물 본성이 바로 사랑이다. 오늘 여기의 사랑은 치유다.

 

치유라는 통로보다 더 본질적인 길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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