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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평점 :
나무는 경계가 매우 불분명하고 난해한 형태의 존재다. 따라서 이 생명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우리에게 나무는 신비스러우면서도 우리 시각에 따라 재구성되는 존재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세상의 일부분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존재할 것이다.(8쪽)
어린 시절 1년에 1회 정도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어머니와 이혼한 뒤 아버지는 서울에서 다른 여성과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께 서울이 어디냐고 여쭈어보곤 했다. 할머니께서는 해가 넘어가는 쪽 오대산 능선을 가리키며 저 산 너머라고 대답하셨다. 내 가늠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이 그 산이었다. 어느 해인가는 잠시 머물다 아버지가 상경한 뒤 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엉성한 지도를 할머니 앞에 들이밀며 틈만 나면 여쭈었다. 평창과 서울 사이를 연결한 직선 부근에 대충 걸려 있는 도시 이름을 대며 지금이면 아버지가 여기 어디쯤 가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물론 당신 이름 석 자 겨우 쓸 정도인 할머니께서 지도를 보고 대답을 하셨을 리 만무다. 나는 아득하다고 느끼지도 못 하는 아득함에 사로잡힌 채 아버지와 서울을 그저 아이깜냥으로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 정도만일 뿐인 상상은 아버지도 서울도 더욱 알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알 수 없는 아버지를 따라 알 수 없는 서울로 올라온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이가 아버지와 서울을 꿰뚫어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인 아버지와 대도시인 서울은 “경계가 매우 불분명하고 난해한 형태의 존재”가 아니었다. 이들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신비”가 없어서 내 “시각에 따라 재구성되는 존재”로 간단히 끝났다.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세상의 일부분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존재”하기는 일사 글렀던 것이다. 그렇게 알아버린 아버지와 서울은 57년째 재구성할 그 무엇도 없다.
인간은 인간을 아는 그 이하로 나무를 알고, 인간을 모르는 그 이상으로 나무를 모른다. 여태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그런 것도 있지만, 경계가 매우 불분명하고 난해한 형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인간이 목재나 땔감으로 쓸 때, 켜고 재고 자르고 손에 쥠으로써 파악하는, 다만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음식물이나 약물로 취할 때, 인간이 품은 목적과 맛과 효능 안에 사로잡히는, 다만 그런 존재가 아니다; 풍경과 배경으로 삼을 때, 대칭의 윤곽이나 분방한 실루엣으로 그려지는, 다만 그런 존재가 아니다.
나무는 인간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매혹함으로써 매순간 그 한계를 넘어간다. 한계 너머는 정량 외부가 아니다. 접근 불가능한 정성 차원이다. 많은 인간이 대문자 일자the One가 그렇다고 믿지만, 그것은 소미한 다자의 네트워킹을 겉에서 본 허상일 뿐이다. 소미한 다자의 네트워킹이 일으키는 예측불허 창발 때문에 나무가 나무인 것이고, 그런 면에서 나무는 접근 불가다. 인간의 나무 지식은 끝내 환유다.
환유가 환원을 불러냈을 때 비극은 시작되었다. 접근할 수 없는 세상이란 없다고 단언하는 과학주의 참람한 인식이 참담한 결과를 목하 맹렬하게 생산하는 중이다. 과학이 말하는 만큼만 실재인 세상 속에서 나무는 프로크루스테스에게 발목 잘린 여행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제발 나무를 놓아주라. 접근할 수 없는 세상의 일부분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존재함에 경의를 표하라. 그러면 모를 듯 알게 된다. 모름지기 나무가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