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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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무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비단 나무를 이용할 때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을 형성할 때조차 나무에게 빚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숲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나무가 우리 육체와 정신을 만들었다.(17)

 

자본주의 세상에서 신분은 돈이 결정한다. 돈으로 양반이 된 사람은 돈 없는 사람을 쌍것으로 여긴다. 쌍것은 드라마에서 자주 듣는 대로 표현하면 근본 없는 것이다. 돈의 유무가 근본의 유무를 결정한다면, 말 그대로 자본주의 양반은 돈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돈이 양반의 정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돈 없는 사람을 근본 없는 것이라 하는 그 말로써 확증된다. “육체는 어떤가? 임신과 출산이 육체 만드는 일의 전부가 아닌 한, 양반의 육체를 근본 없는 것의 육체와 전혀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 또한 돈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양반은 돈에 빚지고 있는가?

 

여기서 빚이 부채가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없다. 은혜는 어떤 실재일까? 단순한 관념이나 비유가 아님은 물론이다. 압구정동 성골의 정신과 육체의 실상을 떠올리면 은혜가 어느 정도 단단한 물질성을 지니는지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철옹이다. 철옹 물질성은 나무와 사람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될까?

 

나무가 우리 육체와 정신을 만들었다.는 말에 나는 레토릭이 저변에 깔려 있지 않을까?” 문득 의심한다. 이 의심은 현실을 위해 이상을 취하며 세상에 헛된 주문을 걸어서는 안 된다.”(101)는 저자의 말에 근거한 것이다. 과학주의를 거절하기 위해 신비주의에 귀의할 필요가 없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과학주의가 저지른 죄악분명히 죄악이다!을 직시할 때, 차라리 신비주의로 회귀하는 게 어떨까, 하는 극단적 이상에 마음 두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렇게 회귀할 현실 가능성과 필요가 거의 없다는 데 있다. 현실 가능성과 필요는 경계를 향한다. 경계에서는 부단히 성숙·숙성하는 비대칭의 대칭 진리가 약동한다. 약동하는 비대칭의 대칭 진리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에서 종적 고립을 걷어낸다. 종적 고립을 걷어내면 나무가 우리 육체와 정신을 만들었다.는 말이 과학주의자와 신비주의자에게 교차적으로 들린다. 전자에게는 공감 감성이 열리고 후자에게는 수긍 이성이 열린다. 감성과 이성의 협응이 일어날 때 비로소 나무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만들었다는 단단한 진실의 전경이 열린다.

 

나무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생명 원리를 따라 인간 육체를 구성한다. 나무는 실제적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음식과 약으로 공급해 인간 육체를 유지한다. 나무는 인간에게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인도하고 고결한 감정을 고취한다.(18) 나무는 인간의 공격성과 폭력성을 누그러뜨린다.(31~32) 나무가 있었어도 이 모양인데 나무가 없었다면 인간은 진즉 자멸했을 것이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고도 배은망덕한 대표적 인간이 한국다른 나라 사정은 모르고불교 승려다. 나무에 둘러싸여 나무를 먹어서 도를 이루었음에도 나무가 스승, 그러니까 부처인 줄 모르고 동물 불살생만을 자비로 삼으니 말이다. 이런 인간이 한 소식 전한다며 우쭐대는 세상에서 과학주의 비판하는 일이란 얼마나 물색없으랴.

 

다시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나무에게 진 빚을 확인한다. 내 몸을 찬찬히 살핀다. 내 마음을 초군초군 톺는다. 모든 것이 숲에서 왔음을 느낀다. 내가 지금 숲에 있음을 느낀다. 내가 숲임을 느낀다. 나는 나무사람이다. 나는 사람나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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