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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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분의 부족과 종의 풍요는 양립한다. 심지어 조화를 이루면서 말이다. 토양의 척박함은 식물 증식에 안정을 주고 구성원 각각이 조화롭게 공생하도록 한다.

  모든 식물생태계에서 식물의 공생뿐만 아니라 생태계 안정은 영양이 부족하거나 다양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는 결핍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는 대부분 열대우림의 풍요가 비옥한 토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토양은 넘치는 강우에 씻겨나간다. 땅속 비옥함이 재생되는 곳은 다름 아닌 나무다.(55~56)

 

귀 밝은 인간은 리베카 솔닛의 재난공동체를 이미 들어 알고 있다. 재난공동체의 원조는 나무다. 나무의 생명원리를 심신에 지니고 있던 인간이 부족결핍상황에서 영양 공급의 평등을 이루는 절제”(57)를 발휘하는 것이다. 코 밝은 인간은 이제 기후위기와 마주친 인류가 풍길 재난공동체의 향기를 미리 맡아 알고 있다. 그 향기는 피토케미컬이다. 피토케미컬은 휴먼케미컬로 하여금 대멸종을 막는 근원적radical이고 급진적radical인 길로 가도록 이끈다. 종말론적 민주주의, 그 네트워킹을 향한 길에 다른 선택과 우회의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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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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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협상한 결과를 기억하는 나무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적절히 허리를 굽히며 성장한다.......새나 곤충의 예측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움직임과 함께하는 세심한 나무의 우정이 우리를 심오한 시간성으로 데려간다.(51, 53)


이 장면은 문득 로빈 월 키머러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시간을 마치 그저 하나의 사물인 것처럼, 마치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냥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제각각 나름의 이야기를 가진 순간만 있을 뿐.”(향모를 땋으며439)

 

시간을 본성에 따라 인식하고 실재the Real로 경험하는 일은 대부분 통념에 차여 삶의 저편으로 나가떨어진다. 통념인 인간의 시간, 그런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호작용인 나무의 시간은 사건으로 창조된다. “바람과 협상한 결과를 기억하고 바람의 방향을 따라 적절히 허리를 굽히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가진 순간이 창조된 나무의 시간이다. “새나 곤충의 예측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움직임과 함께하는 세심한.......우정이 창조된 나무의 시간성이다.

 

인간의 시간은 얼마나 일방적이며 고립적이며 강박적이며 탐욕적인가. 저자는 점잖게 비판한다. “시간을 들여 있는 그대로 자라는 나무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열정이 이를 망친다.”(54) 망치는 열정이라니.

 

이 장면은 문득 한정망월閒情望月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 @LaetitiaWilf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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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 단련과 정신 수양을 강조하는 동양사상에서 나무자세는 아래로 뿌리박고 위로 뻗어 나아가며 주변과 연결된다. 온전히 존재하는 나무가 명상 자세로 구현되는 것이다.(51)

 

간디는 딱 하나의 요가 자세로 평생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 살람바 시르사사나salamba sirsasana, 즉 물구나무 자세다. 보통 이 자세를 아사나asana, 즉 요가 자세의 왕이라고 부른다. 아사나의 여왕도 있다. 어깨서기, 즉 사르반가sarvanga. 공통된 지향은 온전히 존재하는 나무. “아래로 뿌리박고 위로 뻗어 나아가며 주변과 연결하는 나무 생명원리다.



 

나도 대학 시절 어느 선배에게 배운 뒤 제법 오랫동안 두 자세로만 하루 운동을 갈음했었다. 나이 들어서는 걷기와 살람바 시르사사나가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게 한다. 불가피하게 걷지 못 하는 날은 살람바 시르사사나와 사르반가로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게 한다.

 

물론, 지금 나는 이들을 운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보통 환우들에게는 운동으로 소개하지만 숙의치료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존재론적 행동나아가 존재 자체인 행위라고 말한다. 이 말을 대뜸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얼마 동안 실천해보고 나서야 감을 잡기 시작한다. 걷기에 관해서는 녹색의학 이야기42, 50~57번 글에서 자세히 말했으므로, 꼭 한 마디만 보탠다. 거북 섬(속칭: 북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은 걷기를 어머니 대지에게 인사하는 행동으로 여긴다니, 정녕 존경스러운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나무 자세는 인간 위주로 보면 거꾸로 서기다. 거꾸로 서야 나무가 된다, 곧 인간은 거꾸로 진화된 나무다, 라는 것은 다만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다. 상징이나 비유를 가지고 요가의 근본정신을 형성하고 자세를 취했다면, 이는 몸을 허구에 헌정하는 짓이다. 머리를 맨 아래 두는 자세는 실재의 자세다. 실재의 자세로 나는 명상하지 않는다. 나는 제의, 그러니까 제례와 축의를 실재의 자세로 행한다. 제의는 존재 깊숙이 존재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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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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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를 현재와 이어주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중첩적인 행동이다. 자신과 세계 사이 거리를 없애는 것이자 지각적 인식이 변질되지 않은 채로 세계에 투여되는 방식이다.(49)

 

세계에서 보편적이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형태만을 취해온, 인간의 아리스토텔레스 문화는.......고립을 악화시킨다.......이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시각과 청각 세계를 경험하는 데에 감각을 내주며 현실 밖 세계를 떠돈다. 현실과 단절된 사고는 현실 주변을 맴돌며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인터페이스인.......나무는 생명을 서로 연결하고 대립을 해소하며 경계선을 무너뜨려 상호주관성을 배가한다.......우상파괴자인 나무는 인간에게 직접 세계를 보라고 권유한다.(50)

 

나무는 인터페이스다. 인터페이스 존재방식을 요약하면, “나무의 모든 것들은 세계에 제공된다.”(50). 그래야만 생명을 서로 연결하고 대립을 해소하며 경계선을 무너뜨려 상호주관성을 배가한다.분리(고립), 대립, 경계선이 우상이다. 우상을 파괴하면 온전한 상호주관성으로 세계를 직접 본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분리, 인간과 비인간의 대립, 동물과 식물 간 경계선이라는 우상을 통해 보는 세계는 현재” “현실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문화인이 떠도는 현실 주변이다. “불안을 끊임없이 게워내는 무저갱이다. 무저갱까지 동행해서 인간과 더불어 살아 올라올 주체가 근본적이고 의미심장하며 환원할 수 없는 아름다움”(49)을 지닌 나무 말고는 없다.

 

근본적 아름다움, 의미심장한 아름다움, 환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 말을 아리스토텔레스 문화인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현재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사유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가장 대표적인 부류의 문화인이 바로 유일신교도다. 저들은 야훼(여호와)라 부르든 알라라 부르든 절대적 창조신을 거치고야 사유할 수 있다. 가령 나무를 볼 때, 신께서 창조하셨고, 그 신이 인격신이시므로, 당연히 그 프레임을 통과시키게 된다. 그러면 근본성과 의미심장함과 환원 불가능성은 죄다 인격적 창조신이 전유하고 만다. 여지없는 일이다. 저들의 세계인식은 도저한 간접성과 주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간극을 신앙이라 예찬한다. 그 신앙은 불안 용 약물이다.

 

약물중독 상태에서는 자신이 우상숭배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도리어, 나무가 지닌 근본적이고 의미심장하며 환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 나무의 권유를 따라 직접 세계를 보려는 사람을 우상숭배자로 몰아버린다. 이 도착증상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를 현재와 이어주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중첩적인 행동이다. 자신과 세계 사이 거리를 없애는 것이자 지각적 인식이 변질되지 않은 채로 세계에 투여되는 방식이다.라는 사실에 무지할 때 일어난다. “내가 속한 세계와 분리되지 않고서도 직접 지각적으로 그 세계를 인식하는 역설적 참여가 존재 행위다.”라는 비대칭의 대칭 진리를 버릴 때 종교는 과학과 사통해 우상숭배를 퍼뜨리는 좀비다.

 

좀비 잡을 길은, 나무가 우상파괴자라는 진실, 나무가 근본적이고 의미심장하며 환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 바로 그가 자신을 좀비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열정적 종교인과 냉정한 과학도는 전혀 다른 유의 사람이지만 이 부분에서 만큼은 온전히 같다. 둘 다 일극구조에 터한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극단의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만나 비대칭의 대칭 진리를 협공한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이 좀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옆 사람을 문다.

  비대칭의 대칭 진리는 경계에 선interfacial 사람이 복원할 수 있다. 경계에 서야 진리의 전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전경을 봐야 분리의 경계선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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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나무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43)

 

생애 시작은 말구유로, 일상은 목공으로, 마지막은 십자가로 예수는 그야말로 나무와 더불어 존재했다. 말구유와 십자가를 만든 나무가 한 나무의 다른 부분이었다는 신학적 주장을 무리하게 끌어들이지 않아도 예수와 나무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기독교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 생각해본 적이 있기는 할까? 예수나무 또는 나무예수를 생각하면서 신학, 교회, 문명을 이 지경으로 구성했을 리 없다고 전제할 때, 기독교 지성 판은 그다지 톺아볼 만하지 않을 게 뻔하다. 실망할 필요까지야 있으랴.

 

말구유 아래서 태어나 말구유 위에 뉘어진 아기 예수의 실재와 은유는 무엇인가? 십자가 아래서 골고다를 올라 십자가 위에 달린 청년 예수의 실재와 은유는 무엇인가? 허다한 신앙과 신학이 이 문제의 변죽만 울리고 지나쳐온 세월이 이천 년이다. 하물며 성서에 언급되지도 않은 목공 노동자 예수의 삶이야 말해 무엇 하랴.

 

예수 가르침의 종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으로 떨어진 것이 아닌 한, 나무와 무관할 수 없다. 예수가 한 문장으로 압축하기 이전 힐렐의 세 문장으로 풀어 놓으면 나무와 연관된 진실이 드러난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는가? 내가 나만을 사랑한다면 나는 네게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 나무 본성에 나무 생애다. 그대로 예수 본성에 예수 생애다. 기독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조차 다시 정색하고 음미할 만한 진실 아니랴.

 

예수와 나무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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