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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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닫힌 공간에서 배아가 성장하지 않는 식물, 특히 나무에게 형태 확장은 매우 자유롭다.......나무는 성장하는 동안, 스스로 그 과정을 조절한다. 가지가 나뉠(분기) 때 최대로 팽창하므로 매번 주변 분기 활동과 양립할 경우에만 성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나무 조화는 늘리는 힘에서 나와 지속적인 자기조절을 통해 이루어지는 반면, 동물 조화는 억압적인 외력 논리에서 탄생한다.......나무가 만든 공존하는 자유로운 조화는 인간이 생각한 조화를 넘어선다.(117~118)

 

모 일간지에 동물보호단체가 제시한 종차별 언어 변경 주장이 실렸다. 무슨 의도인지 이해하지만, 가소로운 내용이 하 많아 실소를 금치 못했다. 예컨대, ‘팁을 팁으로, ‘웃기다를 웃기다로 바꾸자는 주장. 한심한 설명 수준도 수준이려니와, 식물을 함부로 대하는 저들이야말로 종차별주의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으니 적잖이 안타깝다.

 

배아 성장 메커니즘 차이가 천지를 가른다. 나무는 자유로운 자기조절이 본성이고, 인간 포함 동물은 억압적인 외부조절이 본성이다. 당연하게도 나무가 만든 공존하는 자유로운 조화는 인간이 생각한 조화를 넘어선다.(을 먹는 동물)과 개를 위한 저급한 word play에 귤과 깨를 부박하게 동원하는 인간 조화가 무슨 수로 귤과 깨 조화에 필적하겠나.

 

로빈 월 키머러 말마따나 인간은 겉만 훑어보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이끼와 함께23) 태어난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인간처럼 말하고 듣지 못하며, 저항 없이 죽어주니까 나무를 대놓고 하등생명체 취급한다. 참람하고 맹랑한 거들먹거림에 인간이 취해 있는 동안도 나무는 자기조절을 통해 세계 조화를 창조해간다. 나무妙法調和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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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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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신은 유체보다는 형태 짓기 더 쉬운 고체에 익숙하다. 과학도 이 관지에서 발전해왔다. 16C 천문학이 미래 과학 방향을 결정한 이래, 역학은 강고한 과학 중심이다. 이 모두가 동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합할지 몰라도 식물, 특히 나무에게는 그렇지 못하다.(115)

 

실제로 나무는 성장하면서 유체역학과 공기역학에 적합한 형상을 갖추게 된다.......나무는 생생하고 유동적인 침투력이 세계에 유입된 결과다.(116)

 

일요일마다 광화문 교보에 간다. 습관적으로 가장 먼저 I 9 식물 코너 앞에 선다. 우연히 책 하나를 보았다. 분류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책을 집어 들었다. 하나는, 지은이 이름. 펠릭스 가타리. 다른 하나는 그 저자와 관련한 책 이름. 세 가지 생태학. 말인즉, 저 뜨르르한 펠릭스 가타리가 생태학 거론했다면 혹시 나무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부여잡았다는 뜻이다. 실낱은 이내 끊어졌다. 다만, 자연 생태학을 인간 주체성과 사회관계에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생태철학écosophie 구상은, 가타리 수준에서 의당 해야 하는 주장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작 마음을 끄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페터 팔 펠바르트Peter Pal Pelbart가 쓴 <‘볼 수 없는 것의 생태학>이 실려 있는 [부록2]. 필자는 끝내 볼 수 없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말 돌림”(77~78)으로 일관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학자 생명이 거두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한껏 내재적으로도 초월적으로도 아니고, 또한 주체적이지도 아닌 볼 수 없는 것은 무언가 기묘한 형태를 지닌 새로운 체제로 들어서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볼 수 없는 것의 정체를 가장 기묘하지 않은 방증으로 감지할 수 있는 단서는, 브라질 원주민을 찍은 동영상이 죽은 사람 모습을 담고 있었다는 신문 보도를 인용함으로써 이야기를 전개했다는 사실에 있다.

 

단도직입으로 말한다. 볼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이다. 영 만큼 관건적이고 결정적인 말이 없음에도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허투루 대해왔다. 아니. 잘못, 심지어 거꾸로 대해왔다. 영은 죽은 사람, 영매, 신비주의, 인격신을 믿는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들에게서 발원지도 않았다. 영은 근원적으로 식물본성, 그러니까 나무본성이다. 나무본성이 스스로 생명을 영위하고, 타자와 그 생명을 공유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반야지혜가 영이다. module 존재 원리며, networking 발현 양태며, collective intelligence 눈부신 풍경이다. 페터 팔 펠바르트는 모든 것의 교차점”(71)에서 발현하는 거대한 틈”(84)이라고 묘사한다. 이 모자란 묘사를 채워주면 이렇다. 모든 module이 만나는 마주 가장자리를 흐르며 가득 채우는 유체이자 유체 너머, “공기이자 공기 너머다. 과학이자 과학 너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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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역경과 화합한다.(109)

 

번역서를 읽다보면 중요한, 심지어 결정적인 단어 뜻이 명석하게 포착되지 않는 경우가 적잖다. 원어 자체 문제도 있고, 번역자의 모국어 감수성 문제도 있다. 번역자가 이 문제를 알아차리고 원어를 병기해주면 좋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화합은 프랑스어 무엇을 번역했을까?

 

화합하다는 말은 서로 뜻이 맞아 정답게 어울리다는 뜻을 지닌다. 나무와 역경 사이에 이 말을 쓸 수 있을까? 나무라서가 아니라, 그 무엇이든 한 생명체가 역경과 서로 뜻이 맞아 정답게 어울리는 일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나무 관지에서 쓴 말이 아니라는 혐의를 둔다. 인간의 관지에서 인간의 뉘앙스를 투사할 때, 이런 내 느낌은 어떤가? 화합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내게는 과거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독재를 일삼던 자가 내놓은 국민화합이 들이닥친다. 곧 이어 국론통일까지.

 

나는 내 화용론에 입각해 화합을 화쟁으로 번역한다. 화쟁은 원효에게 귀속되는 용어로서 우리사회 일반에게는 아주 낯선 용어다. 화쟁도 원효도 한글2010에 치면 빨간 줄이 그어진다. 내게는 물론 언어 목록inventory 맨 앞줄에 있다.

 

원효 화쟁은, 온전한 솔루션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한 당사자가 주고받는 극상 상호작용이다. 역경이 누구든/무엇이든 나무는 그와 마주해 온전한 솔루션을 찾아야 한다. 솔루션이 온전하려면 문제를 정확히 해야[] 한다. 없이 전제된 솔루션[]은 나무 본성과 맞지 않는다.

 

나무에게는 인간 군중처럼 국민화합, 국론통일에 부역하는 본성이 없다. 오직 화쟁으로 부단히 무애無㝵를 향할 뿐이다. 무애는 이데아가 아니다. 자재自在. 무애는 순복이 아니다. 적응이다. 나무뿌리는 바위를 깨뜨리기도 한다.

 

나무는 역경과 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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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지나다 기이한 광경 앞에 우뚝 멈춰 선다. 크게 휘어진 채 그대로 방치된 벚나무 고목. 의아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보니 죽지 않았다. 줄기 대부분이 산 것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훼손되었으나 엄연히 제 잎을 키워내고 있다. 뒷나무에게 기댄 듯 보이지만 그도 아니다. 아내에게 보여주니 "당신이구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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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버린 지 불과(22)-인용자 끌어옴30만 년.......(103)

 

인간이 백일몽을 꾸는 사이, 숲은 다시 전체가 되었다.(105)

 

인간이 숲을 버리고 살아온 기간은 전체 진화사 중 1/5,000도 안 된다. 인간이 숲을 버린 사건은 극단적인 양면성을 지닌다. 한 극단은 버릴 수 없음에도 버렸다고 표현하는 허구적 관념성. 다른 한 극단은 버렸다는 표현이 함량 미달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혹하게 착취하고 살해한 물질성. 이 양극성으로 말미암아 불과 30만 년 백일몽에서 깨어나 인간은 숲을 다시 전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렸다. 애당초 백일몽이 불가피했던 까닭은 개체가 전체를 버릴 수 없다는 이치 때문이다. 숲을 변방 개체로 내몬 허구적 관념과 물질적 범죄에서 어두운 창발dark emergence이 일어나 인간은 급격하게 자신이야말로 개체며 변방 존재라는 진실 앞에 서고 말았다. 어둠이 푸른색을 띨 만큼 깊어지면 새벽이다. 다시 전체가 된 숲은 인간에게 다시없는 축복이다. 전체인 숲에 인간이 바칠 극진한 헌정은 하나다.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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