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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평점 :
인간 정신은 유체보다는 형태 짓기 더 쉬운 고체에 익숙하다. 과학도 이 관지에서 발전해왔다. 16C 천문학이 미래 과학 방향을 결정한 이래, 역학은 강고한 과학 중심이다. 이 모두가 동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합할지 몰라도 식물, 특히 나무에게는 그렇지 못하다.(115쪽)
실제로 나무는 성장하면서 유체역학과 공기역학에 적합한 형상을 갖추게 된다.......나무는 생생하고 유동적인 침투력이 세계에 유입된 결과다.(116쪽)
일요일마다 광화문 교보에 간다. 습관적으로 가장 먼저 I 9 식물 코너 앞에 선다. 우연히 책 하나를 보았다. 분류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책을 집어 들었다. 하나는, 지은이 이름. 펠릭스 가타리. 다른 하나는 그 저자와 관련한 책 이름. 『세 가지 생태학』. 말인즉, 저 뜨르르한 펠릭스 가타리가 생태학 거론했다면 혹시 나무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부여잡았다는 뜻이다. 실낱은 이내 끊어졌다. 다만, 자연 생태학을 인간 주체성과 사회관계에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생태철학écosophie 구상은, 가타리 수준에서 의당 해야 하는 주장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작 마음을 끄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페터 팔 펠바르트Peter Pal Pelbart가 쓴 <‘볼 수 없는 것’의 생태학>이 실려 있는 [부록2]다. 필자는 끝내 ‘볼 수 없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말 돌림”(77~78쪽)으로 일관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학자 생명이 거두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한껏 “내재적으로도 초월적으로도 아니고, 또한 주체적이지도 아닌 ‘볼 수 없는 것’은 무언가 기묘한 형태를 지닌 새로운 체제로 들어서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볼 수 없는 것’의 정체를 가장 ‘기묘’하지 않은 방증으로 감지할 수 있는 단서는, 브라질 원주민을 찍은 동영상이 죽은 사람 모습을 담고 있었다는 신문 보도를 인용함으로써 이야기를 전개했다는 사실에 있다.
단도직입으로 말한다. 이 ‘볼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영靈”이다. 영 만큼 관건적이고 결정적인 말이 없음에도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허투루 대해왔다. 아니. 잘못, 심지어 거꾸로 대해왔다. 영은 죽은 사람, 영매, 신비주의, 인격신을 믿는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들에게서 발원지도 않았다. 영은 근원적으로 식물본성, 그러니까 나무본성이다. 나무본성이 스스로 생명을 영위하고, 타자와 그 생명을 공유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반야지혜가 영이다. module 존재 원리며, networking 발현 양태며, collective intelligence 눈부신 풍경이다. 페터 팔 펠바르트는 “모든 것의 교차점”(71쪽)에서 발현하는 “거대한 틈”(84쪽)이라고 묘사한다. 이 모자란 묘사를 채워주면 이렇다. 모든 module이 만나는 마주 가장자리를 흐르며 가득 채우는 “유체”이자 유체 너머, “공기”이자 공기 너머다. 과학이자 과학 너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