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색을 조합할 때 보색을 쓰면 각각의 색깔이 더 선명해지는데, 한 색을 살짝만 넣어도 다른 색이 두드러진다.......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색들은 눈 속에서 번갈아 가며 서로를 유도하는 색들이다.......보라색과 노란색은 이런 짝이다.

  .......노란색 덩어리를 오랫동안 쳐다본 뒤에 흰색 종이로 시선을 돌리면 잠깐 동안 종이가 보라색으로 보인다. 이런 '색 잔상'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보라색 색소와 노란색 색소 사이에 활기찬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76)

 

보라색과 노란색의 짝.......지혜는 한 아름다움이 나머지 한 빛을 받아 더욱 빛난다는 것이다.......그 아름다움은 내게 호혜를 요구한다. 보색이 되라 한다. 자신이 베푼 아름다움의 답례로 나도 뭔가 아름다움을 유도하라 한다.(78)

 

아주 부주의한 사람이지만 않다면 색 잔상 현상을 경험한 기억이 있다. 아주 주의 깊은 사람이 아닌 한 왜 그런지 골똘히 생각한 기억은 없다. 고맙게도 놀랍게도 식물생태학자인 저자가 묻지도 않은 그 답을 준다. 보색 사이에 활기찬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란다. 상호작용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 또한 골똘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고맙게도 놀랍게도 다시 답을 준다. “서로를 유도하는일이란다. 유도란 무엇인가? 사실 이 질문은 필요 없다. 답이 나와 있다. 다만 달리 표현된 두 답 사이를 이어주는 말이 없기에 일부러 질문한다.

 

각각의 색깔이 더 선명해지는현상, 그러니까 한 아름다움이 나머지 한 빛을 받아 더욱 빛난다는 것과 잔상 현상은 다른가, 같은가? 있을 때 더 선명해지는 현상과 없을 때 잠깐 동안 잔상이 나타는 현상은 본질에서 같고 양상에서 다르다. 없을 때 잔상이 나타나는 현상은 이치 측면을 드러내준다. “이게 상호유도다.” 있을 때 더 선명해지는 현상은 이치가 발현된 전경을 펼쳐 보인다. “상호유도하면 이렇다.” 이 같고도 다른 관계를 통해 보색 지혜가 인간에게 호혜를 요구한다. /풀 유도처럼 인간도 다른 존재 속 아름다움을 유도해야만 한다.

 

인간이 다른 종 생명과 함께 있으면 각각 아름다움이 동반상승해야 한다. 현실은 그 반대다. 인간을 이슥히 들여다보다가 허공으로 눈 돌리면 다른 종 생명이 잔상으로 나타나야 한다. 현실은 그 반대다. 함께로도 홀로로도 인간은 내남 아름다움 모두를 갉아먹는다.

 

나는 내 본성의 본원인 버드나무 순례를 계속하고 있다. 순례는 나를 이슥히 들여다보다가 허공으로 눈 돌리면 버드나무 잔상이 나타날 때까지다; 나와 버드나무가 함께 있으면 내 빛으로 버드나무가, 버드나무 빛으로 내가 더 아름다워질 때 까지다. 아브라카다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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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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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이 묻는 질문은 당신은 누군가요?”가 아니라, “이건 뭐지?”. 아무도 식물에게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나요?”라고 묻지 않았다. 주로 하는 질문은 이건 원리가 뭘까?”였다.(070)

 

돌고 돌아 내가 도착한 곳은 처음 출발한 곳, 아름다움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것은 과학이 묻지 않은 물음이었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앎의 방식으로서 과학은 너무 편협해 그런 물음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074~075)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은 인간 존재의 한 측면이 아니라 존재 전체다.(078)

 

중국 하남 숲에 신령한 오동나무가 살았다. 신선이 그 본성 소리에 이끌려 숲으로 와 그 나무로 칠현금을 만들었다. 칠현금을 손에 넣은 황제가 당대 악공을 불러 연주케 했으나, 모두 소음만 울릴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악공은 연주하기 전에 칠현금을 어루만지며 귀엣말을 했다. 잠시 뒤 다시없는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황제가 무슨 얘기를 했느냐 물으니 악공이 대답했다. “스스로 지니고 있는 음으로 연주해주기를 부탁했습니다.”

 

중국 옛 설화다. 통속한 악공들에게 결여된 바는 바로 겸허였다. “이름은 배웠습니다만, 그들 노래는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072) 마찬가지다. 오늘날 통속한 과학자들은 오만한 어리석음으로 낭/풀을 사물로 환원하고, 사물이니 분석하면 안다고 환원하고, 분석만이 참 지식이라고 환원하는 삼중환원주의에 빠져 있다. 삼중환원 편협함은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은 예술뿐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다.

 

통속한 과학자와 통속한 과학을 신봉하는 일반인들이 꼭 똑 알아야 할 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과학적 법칙조차 수많은 인식 방법과 지식 체계가 참여해 재구성해온 결과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터한 과학도 인식 방법 중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놓치면 오류에서 끝나지 않고 범죄가 될 수 있음을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 이미 인류는 과학이란 미명으로 천인공노할 범죄를 수없이 저질러왔다. 그 때 과학과 지금 과학은 다른가? 만일 그렇다면 100년 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뒤에도 영원히. /풀이 가리키는 달만 휘영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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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물었다. “그 제의는 어디서 왔어요? 할아버지에게 배우셨나요?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에게 배우셨고요?.......” 아버지는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렇진 않은 것 같구나. 그냥 그렇게 했어.......시작은 그런 식이었지만 뭔가 다른 게 됐어.......” 이야말로 제의가 지닌 힘이라고 생각한다. 속됨을 성스러움과 맺어주기.(064~065)

 

크든 작든 제의는 세상에서 깨어 살아가는 방법에 집중하도록 하는 힘을 지닌다.(062)

 

 

제의는 언제나 시작은 그런 식이었지만 뭔가 다른 게 됐어식으로 다가온다. 속되게 시작해서 가다가 성스러움으로 전화되는 어떤 순간을 나중에야 기억하고 그 기억하기를 기억하는 방법”(018)으로 자리 잡는다. 처음부터 의식하고 기획한 제의는 가짜다; 쇼다. 쇼임에도 성황리에 치러진다. 구원과 영을 맞바꾸기 때문이다. 통속종교 제의는 죄다 쇼다.

 

크든 작든 제의는 세상에서 깨어 살아가는 방법에 집중하도록 하는 힘을 지닌다.

 

그러니 쇼인 가짜 제의는 죽어 살아가는 방법에 집중하도록 하는 힘을 지녀서, 인간을 즐거워하며 죽어가게 만들고 있다. 불교든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차이가 전혀 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저들에게는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은 없고 기념만 주입돼 있다. 주입된 기념은 제의를 죽이는 독이다. 독을 저들은 신앙이라고 부른다. 신앙은 심판받는다.

 

신앙을 갖지마라. 그 소유가 심판을 부른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참 제의에 깃들라.

 

정색하고 다시 물어본다. “제의는 어찌 오나?” 일상에서 무심코 행하다가 느닷없이 딸깍하는 찰나, 소름 돋거나, 가슴 철렁할 때, 섬광으로 들이닥치는 깨침 있으면, 때늦은 알아차림으로 시작된다. 그 알아차림은 뉘우침이니 겸손이며, 깨침이니 자랑이다. 서구 역설, 우리 화쟁을 살아갈 때, 비로소 제의는 약동하는 실재로 다가온다. 별일 아니어서 별 일인

 

제의는 찰나마다 허허공공으로 흩어지면서 단단한 크리스털로 맺혀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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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상품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가난해지겠는가. 온 세상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선물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부유해지겠는가.(057)

 

다음 단계의 경제는 우리 모두의 선물을 이끌어내는 경제가 될 것이다. 경쟁보다 협력을 강조하고, 쌓아두기보다 나누기를 장려하고, 선형적이 아니라 순환적인 경제가 될 것이다. 돈이 곧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좀 더 선물에 가까운 속성을 띤 채 지금보다 축소된 역할을 할 것이다. 경제는 축소되지만 우리 삶은 더 확대될 것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에서 한 말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궁금하지 않거니와, 로빈 월 키머러와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지닌 생각이 놀랍도록, 아니 당연히, 본성에서 일치한다. 여기 선물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가 전에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주해리뷰 썼던 부분을 여러 번 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결국 같은 말이면서 조금 다른 뉘앙스를 서로 보충해주는 이 말들을 바짝 붙여 다시 음미해 본다. 온 세상이 상품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가난해지겠는가. 온 세상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건물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부유해지겠는가. 경제는 축소되지만 우리 삶은 더 확대될 것이다.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두 말은 서로 얼싸안고 있다.

 

그러고 보면 선물 얘기를 하는 두 사람 자체가 서로에게 선물이다. 그 선물들은 또 내게 선물이고 나는 다시 누군가에게 선물이어서 돌아 흘러간다. 돌아 흘러 이뤄내는 네트워킹, 그러니까 영적 공동체가 창발을 일으키면서 장엄선물을 온전하게 한다. 하느님나라라 하든 극락정토라 하든 대동세상이라 하든 우리 비원이자 축제다.

 

온 삶이 비원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슬퍼지겠는가. 온 삶이 끊임없이 넘실대는 축제라면 우리는 얼마나 흥겨워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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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진행형의 관계를 만들어낸다.......선물 경제에서는 누군가가 거저 준 선물이 다른 누군가에게 자본이 될 수 없다.......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며 그때마다 풍성해지는 선물이다.

  선물의 본성이 그렇다. 선물은 이동하며 그때마다 가치가 커진다........정착민은 원주민에게 선물을 받으면 이를 귀하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선물을 남에게 주면 선물 준 사람을 모욕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주민은 선물 가치를 호혜성에 두었으며, 선물이 돌고 돌아 자기에게 오지 않으면 모욕으로 느꼈다. 우리 옛 가르침 중 상당수는 무엇을 받든 반드시 다시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유재산경제 관지에서 선물이 공짜인 이유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료로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물경제에서 선물은 공짜가 아니다. 선물 본성은 관계 창조다. 선물경제 바탕에 놓인 화폐는 호혜성이다. 서구 사고에서 사유는 권리지만, 선물경제에서 재산은 책임과 결부된다.(049~052)

 

사유재산경제에서 대가를 치르고 상거래가 이루어질 때, 핵심은 대가를 표상하는 돈의 보편성이기 때문에 그 어떤 관계 창조도 일어나지 않는다. 돈이 관계 발생을 제거하는 조건이다. 거꾸로 말하면 돈이 개입되지 않는 선물 수수일 때, 보편성이 제거된 특수 사건을 당사자가 공유한다. 그러고 보면 관계란 마주한 당사자에게 어떤 고유 세계가 형성되는 운동이다. 선물은 세계 네트워킹에 참여하여 다양한 고유 결절을 맺으며 약동하는 모듈이다.

 

선물은 구체적 물질일지라도 그 바깥을 둘러싼 서사를 지닌다. 선물은 서사일지라도 그 행간에 내밀한 물질 실재를 지닌다. 이 비대칭인 대칭성에 힘입어 선물은 전해질 때마다 풍성해지고, 이동할 때마다 가치가 커진다. 이동하며 전해지지 않고 누군가 간직한 자본이 되는 순간 서사도 물질도 선물이기를 멈춘다. 선물이 멈추면 세계 네트워킹도 멈춘다. 네트워킹이기를 멈춘 세계는 자체가 착취다. 그 착취를 이름 하여 사유재산경제체제라고 한다.

 

우리나라 백만-우리 돈으로 113000만원-장자 수가 105만 명이라고 한다. 상위 2%가량이다. 나와는 아득히 멀리 떨어진 이야기다. 그 아득한 거리에서 선물이 우주 근본 범주라느니 영속적 순환이라느니 떠드는 짓은 참으로 물색없다. 물색없기로 치면 낭/풀 이야기만 할까. 하필 선물이 낭/풀 본성에서 나왔으니 곱으로 물색없다. 곱으로 물색없는 얘기를 66살에 떠들고 있는 내 삶이야말로 물색없기 그지없다. 그지없이 물색없게 살아가련다. 물색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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