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 제의는 어디서 왔어요? 할아버지에게 배우셨나요?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에게 배우셨고요?.......” 아버지는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렇진 않은 것 같구나. 그냥 그렇게 했어.......시작은 그런 식이었지만 뭔가 다른 게 됐어.......” 이야말로 제의가 지닌 힘이라고 생각한다. 속됨을 성스러움과 맺어주기.(064~065)

 

크든 작든 제의는 세상에서 깨어 살아가는 방법에 집중하도록 하는 힘을 지닌다.(062)

 

 

제의는 언제나 시작은 그런 식이었지만 뭔가 다른 게 됐어식으로 다가온다. 속되게 시작해서 가다가 성스러움으로 전화되는 어떤 순간을 나중에야 기억하고 그 기억하기를 기억하는 방법”(018)으로 자리 잡는다. 처음부터 의식하고 기획한 제의는 가짜다; 쇼다. 쇼임에도 성황리에 치러진다. 구원과 영을 맞바꾸기 때문이다. 통속종교 제의는 죄다 쇼다.

 

크든 작든 제의는 세상에서 깨어 살아가는 방법에 집중하도록 하는 힘을 지닌다.

 

그러니 쇼인 가짜 제의는 죽어 살아가는 방법에 집중하도록 하는 힘을 지녀서, 인간을 즐거워하며 죽어가게 만들고 있다. 불교든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차이가 전혀 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저들에게는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은 없고 기념만 주입돼 있다. 주입된 기념은 제의를 죽이는 독이다. 독을 저들은 신앙이라고 부른다. 신앙은 심판받는다.

 

신앙을 갖지마라. 그 소유가 심판을 부른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참 제의에 깃들라.

 

정색하고 다시 물어본다. “제의는 어찌 오나?” 일상에서 무심코 행하다가 느닷없이 딸깍하는 찰나, 소름 돋거나, 가슴 철렁할 때, 섬광으로 들이닥치는 깨침 있으면, 때늦은 알아차림으로 시작된다. 그 알아차림은 뉘우침이니 겸손이며, 깨침이니 자랑이다. 서구 역설, 우리 화쟁을 살아갈 때, 비로소 제의는 약동하는 실재로 다가온다. 별일 아니어서 별 일인

 

제의는 찰나마다 허허공공으로 흩어지면서 단단한 크리스털로 맺혀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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