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식물은 최초의 생태복원학자다. 그들은 자신의 선물을 이용해 땅을 치유하고 우리에게 길을 보여준다.(485)

 

인간이 생태계를 훼손하자 새로운 생태계가 생겨났으며 식물은 천천히 적응하면서 우리에게 상처 치유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식물이 지닌 솜씨와 슬기를 보여주는 증거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미치지 못할 만큼. 식물이 자기 일을 계속하도록 내버려두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다. 복원은 우리가 협력할, 그러니까 도울 기회다. 우리가 맡은 부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487)


 

여행감독 고재열은 <꼰대 감별법>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판에서 누가 주연인지 모르겠으면 당신이 바로 꼰대다. 주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이 주연 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것이다.”

 

린 마굴리스는 인간이 스스로 내린 주제넘은 도덕적 명령, ‘병든 지구를 치유하라는 자기기만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복원 또는 치유 주연은 식물이다. 인간은 식물이 자기 일을 계속하도록 내버려두는 지혜를 냄으로써 도울뿐이다. 식물이 자기 일을 계속하도록 하려면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범죄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설거지를 시작”(480)해야 한다. 4대강 보를 치우는 일이 대표적인 예다. 딱 그 정도다. 그 이상으로 설쳐대면 꼰대 짓이다.

 

꼰대 짓할 때는 자기 성찰 관장하는 안와전두엽이 이미 고장 난 상태다. 안와전두엽은 자신이 위너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망가지기 시작한다. 돈이든 권력이든 인기든 명망이든 성취감 또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면 귀신들림demon possession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귀신은 전지전능하다고 느끼므로 제 영역 너머에 손을 댄다. 기생충 학자가 정치적 선동을 하는 일이 대표적인 예다. 분수를 알고 제 자리에 머무를 줄 안다면 꼰대가 될 수 없다. 생태계를 훼손한 장본인인 인간이 분수를 아는 한, 함부로 복원 또는 치유 주연으로 자처하지 못한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미치지 못할 만큼식물이 보여주는 솜씨와 슬기를 따라 인간은 자연의 제자”(487)라는 진리 앞에 겸허히 엎드려야 한다.

 

겸허는 종속영양생물인 인간에게 자연Sein 본성임이 틀림없다. 당위Sollen로 넘어간 역사적 계기를 문명이라 한다. 문명의 이름으로 인류는 본성 축을 전복했다. 전복된 축에 터해 인간은 식물과 자신을 모두 소외시켰다. 인식체계에서 식물 정신성, 인간 육체성을 각각 봉인했다. 식물 정신성 복원이 문제의 근원이지만 이는 인간이 현재 지니는 인식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 육체성 복원은 이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감정 또는 정서를 복권하는 일에서부터 최근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내수용감각interoception 깨우는 일이 대표적인 예다. 한껏 몸 사람이 됨으로써 식물 본성에 핍진히 다가갈 수 있다. 겸허 가는 숲길이다.

 

내가 생애 마지막 공부라 여기며 식물로 향하는 이 여정은 내가 기획한 인생 프로젝트가 아니다. 일이 흘러가는 모습과 일에 담긴 알맹이가 제의 본질을 지니고 있으니 깨달음은 한 박자씩 더디 오고 상상은 한 발짝씩 멀리 번진다. 묵은 아이를 되찾는 대칭성이 그려지기도 하고 몸 사람과 마음 사람 사이 균형을 잡는 비대칭성이 잡히기도 한다. 내 생명과 생애, 그리고 공동체가 지닌 식물본성을 복원해가는 풍경이 중첩되어 펼쳐지고 있다. 모든 장면에서 인간으로서 단일 의식을 가진 나는 겸허하게 돕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다만 지구생태계 복원에서뿐 아니라 본디 발생 그 자체에서 돕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가 맡은 부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에 담긴 깊은 뜻이 거기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독립전쟁 당시에 조지 워싱턴이 오논다가족을 절멸시키라고 연방군대에게 명령하자, 수만 명에 이르던 오논다가 네이션 인구는 1년 만에 몇 백 명으로 줄었다. 그 뒤로 미국정부와 오논다가 네이션이 맺었던 조약은 남김없이 깨졌다. 뉴욕주에서 땅을 불법적으로 빼앗으면서 오논다가 영토는 1700헥타르 보호구역으로 쪼그라들었다. 오늘날 오논다가 네이션 영토는 솔베이 폐기물층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오논다가 문화에 대한 공격도 끊이지 않았다. 부모들은 자녀를 인디언 모집책에게서 숨기려고 애썼지만 아이들은 붙들려 칼라일 인디언 학교 같은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고유 언어는 금지되었다. 인디언 공동체는 모계사회로, 남녀가 평등했는데 이곳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이들의 삶을 잘못으로 규정했다. 세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롱하우스 추수감사 예식은 법으로 금지되었다.(465)

 

초등그때는 국민학교 3학년 때 서울 와서 TV를 처음 접했다. 만화방에 있는 커다란 흑백 TV를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 보듯 아이들이 줄지어 앉아서 보았다. 만화를 10원어치 보면 TV를 시청할 수 있는 딱지 수를 채울 수 있었다. TV 보려고 돈만 생기면 만화를 읽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프로는 서부극 <용감한 린티(1954)>. 이야기야 새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좋은 나라백인 기병대가 나쁜 나라인디언을 모조리 죽이면 환호했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인디언은 나쁜 나라라는 오류를 교정하지 못했다.

 

근대 민주주의 태동 사건인 미국 독립전쟁이 영국에게만 총을 겨누지 않고 원주민에게도 그리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근대 민주주의 마그나 카르타인 미국헌법이 하우데노사우니(이로쿼이) 연방 법리를 벤치마킹했고, 핵심을 누락시켰고, 그 민주주의를 가르쳐준 원주민을 제노사이드로 몰아넣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조지 워싱턴이 오논다가족을 절멸시키라고 연방군대에게 명령하자, 수만 명에 이르던 오논다가 네이션 인구는 1년 만에 몇 백 명으로 줄었다.는 사실은 유럽인이 발들이기 전 줄잡아 6000만이었던 원주민이 1930년경 100만 이하로 줄었다는 사실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무지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섣불리 결론짓게 한다.(518)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미국이 흉측한 오해이듯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거북 섬원주민은 파렴치한 오해다.

 

수 세대의 슬픔, 수 세대의 상실. 그러나 존엄은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영들은 그들 편이었다. 그들에게는 대대손손 전해오는 가르침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법도 있었다. 오논다가 네이션은 자기 원주민 정부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코 정체성을 버리거나 주권국가로서 지위를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희귀한 사례다. 연방법은 그 법을 정초한 자들에게 무시당했으나 오논다가족은 여전히 위대한 법의 수칙을 따르며 살아간다.(466)

 

고작 35년 식민통치에 지배층 거의 전부가 매판이 된 대한민국 관지에서 차마 거북 섬 원주민을 바라볼 수조차 없다. 임시정부 정통성을 부인하고 이승만을 국부로 앙모하는, 만주군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다카키 마사오를 반인반신으로 숭배하는 자들 눈에 오논다가 네이션은 자기 원주민 정부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코 정체성을 버리거나 주권국가로서 지위를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낱 반미 종족주의로 비칠 뿐이리라.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살아 있는 민주주의”(456)인 하우데노사우니(이로쿼이) 연방이 버드나무의 생명 연방에서 발원했다고 믿는 나는 반일 종족주의자라는 오명을 흔쾌히 뒤집어쓴 채 간절히 기도한다. /풀 백성들일랑 부디 존엄을 잃지 않기를, “굴복하지 않기를. _()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내 걱정거리는 세상이 뒤집혀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둔갑해버리는 악이다. 방종한 이기심은 한때 끔찍한 무엇으로 지탄받았으나 이제는 성공 비결로 찬양받는다.(451)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병탄하는 과정에서 능동·적극적으로 부역했던 매판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다양한 방식으로 둔갑해 여전한, 아니 더욱 강력한 주류를 형성해 오늘에 이르렀다대표적 집단은 분단과 전쟁 상황에서 반공주의에 편승함으로써 민주주의 수호자로 둔갑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집단은 가장 거침없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에 무관심한 대중도 웬만큼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 중 하나가 바로 축적한 재산으로 사학을 설립해 교육자로 둔갑한 집단이다. 이른바 사학재벌은 거의 예외 없고, 명문 사립 대학교, 경향의 유력한 사립 중·고등학교를 쥐고 있는 집단 대부분이 그렇다.

 

스스로 둔갑할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둔갑이 자동적으로 된 집단이 있다. 총독부를 위시한 산하 기관에 근무하던 관료들은 대부분 그대로, 아니 영전해 명예를 누렸다. 언론인, 학자, 예술인, 양의사 집단 역시 직업적 특수성 덕분에 부역 혐의조차 받지 않은 채 해방 조국의 역군으로 고스란히 자동 둔갑되었다. 저 집단과 후손들의 심장은 여전히 일본을 부모나라로 품고[儭日] 있다. 이 모든 악은 미군정에서 비롯했다. 물론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걸출한 마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즘 대통령 병 걸린 한 인사가 되도 않는 둔갑을 시전하고 있는데 이제 이런 소란은 일상사로 되어버렸다.

 

일상사로 되어버리는 과정에서 눈에 띄게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둔갑 지점 이동이다. 매판세력 자신이나 매판 두호권력이 둔갑하지 않고 저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인식이 둔갑한다는 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중은 일제히 매판세력을 지탄대상으로 삼았다. 목하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찬양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매판세력은 성공집단이고 성공 비결이 바로 매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대중적 변화는 매판프레임이 주도하는 바다. 패거리 연합의 가공할 힘을 확인하고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반일 종족주의라는 말을 대놓고 꺼내든 선동가를 키워내며 힘을 과시하고 있다.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걱정거리로 치면 이는 거대하다. 변방 소시민이 걸머질 일 아니다 싶지만, 증조부께서 항일무장투쟁 선봉에 섰다가 일본군 총탄에 스러진 뒤 멸문의 길을 걸어온 후손 가운데 하나인 나로서는 숙명처럼 이런 걱정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다. 성공을 위해 둔갑시킨 내 인식 한 줌도 방종한 이기심을 번지게 할 연료가 될 테니 기꺼이 걱정한다. 걱정한다고 무슨 변화가 오겠냐만 나는 이 걱정에 마음이 요동칠 때 나무에게로 간다. 견디는 힘을 주고 희망을 놓지 않게 보듬어준다는 참나무를 부둥켜안는다. 공존과 생명연방 본성을 지닌 버드나무 앞에서 깊이 합장한다. 내가 내 삶의 길을 묻기 시작한 지 반 세기만에 발견한 나만의 숭고한 제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사유재산 강박 때문에 외로운 곳으로 추방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삶을 돈 버는 데, 일시적인 위안은 되지만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물건을 더 많이 사들이는 데 쓰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한테조차 추방당하는 일까지 달게 받아들이지 않았는가.......우리를 속여 소유가 우리 허기를 채워준다고 믿도록. 우리가 정작 갈망하는 바는 소속인데.(450)


 

이명박·박근혜, 특히 박근혜 파면 이후 우리사회 전경에 대놓고 함부로 등장한 매판세력의 진면목을 연일 목도하는 중, 진부하나 다시 새삼스럽게 깨닫고 또 분노하는 바, 사법연수원 패거리와 신문방송사 패거리, 그리고 자유당( 이후 이름 바꾼 모든 수구정당은 물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듯 보이는 정당에 몸담기는 하나 하는 짓이 다르지 않은) 패거리가 사람 잡도리하는 광경은 참 참람해서 참담하다. 이 패거리는 소유본성을 지니고 소속허울을 뒤집어쓴 윈디고먹을수록 허기가 증강되는 아니시나베 부족 전설 속 괴물집단이다. 이 윈디고 집단은 돈은 물론 자기 영혼까지 금고에 넣었다. 이를 일러 자신한테조차 추방당하는 일이라 한다.

 

영혼까지 금고에 넣은 패거리에게 결박당한 채, 살아 있으나 사실상 죽은 삶을 영위하는 나는 그럼 뭔가. 나는 사유재산 강박에서 자유로운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삶을 돈 버는 데, 일시적인 위안은 되지만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물건을 더 많이 사들이는 데 쓰면서되도 않게 아등바등하고 있지 않은가. 내 영혼은 안녕한가.

 

현실에서는 소유가 우리 허기를 채워준다고 믿지 않아도 영혼은 안녕하지 못하다. 나는 한평생 내 이름으로 등기된 집을 소유해본 적이 없다. 임대료 내기 위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삶을 돈 버는 데써왔다. 임대료 내고 사는 동안은 내 집이라 여겨봐도 위안은 되지만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는진실이야 어쩌겠나. 66년 동안 33번 이사 다녔으면서 정작 갈망하는 바는 소속이라고 말할 주제가 되겠나.

 

주제넘게라도 소속을 갈망한다 치자. 내가 소속할 곳은 어디인가, 아니, 무엇인가? 답은 분명하다. 공동체, 참다운 공동체, 생명공동체다. 대한민국은 공동체인가? 무슨 그런....... 코로나 때문에 임대료 못 내, 거의 바닥나도록 보증금에서 제해나가는 동안, 임대료 일부나마 내려주겠다 말 한마디 않는 건물주, 그와 같은 임대업자들이 주류로 득세하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공동체라 하겠는가. 국가사회로서 대한민국은 약자들한테 실다운 공동체이기에는 매판 지배력이 언제나위축된 적이 잠깐씩 있었지만 무시할 정도였으니너무나 광범위하고 강고하다. 새삼스럽게 몸서리쳐지는 오늘 여기서 나는 뭐여야 하는가. 대체 뭐일 수는 있는가.

 

자타공인 나는 소심한 소시민이다. 국가 큰 담론을 꿰뚫고 있다고 해서 그 지식만큼 몸으로 할 일이 있지는 않다. 공동체 너른 지향을 한 아름 안고 있다고 해서 그 지혜만큼 몸으로 할 일이 있지는 않다. 몸이 사회적으로 매겨지는 가격대로 할 일이 있을 뿐이다. 내 가격이 하도 헐해서 내 언어의 중력이지 못할 때, 나는 침묵하고 나무에게로 간다.

 

침묵하는 일도 나무에게로 가는 일도 은둔 치고는 급진적·근원적이다. 더는 은둔할 데가 없는 막다른 곳, 그러니까 본진 깊숙이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탈-정치와 몰-역사를 상징하는 토템폴이 아니라 사회혁명의 원형이며 원천인 민주공동체다. 민주공동체인 나무는 평등한 분산 주체 모두를 창발 네트워킹에 소속시키므로 사적 소유는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소유의 거점을 지우는 나무혁명을 향해 나는 조금 일찍 길을 나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8-25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26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내가 숲에서 배운 바 또 하나, 무작위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삼라만상이 온갖 의미로 충만하며, 온갖 관계로 다채롭다.(436~437)



무작위의 사전적인 뜻은 조작하거나 통제하지 않음을 뜻한다. 여기 문맥에서 그냥 이렇게 새기면 뒤 문장과 관련해 볼 때 여간 어색하지가 않다. 작위, 그러니까 조작과 통제가 의미와 관계를 낳는다는 식으로 읽히기 십상이다.

 

본디 무작위는 사건을 동등한 확률로 발생시키기 위한 객관적, 과학적 행위다. 객관적, 과학적 행위에서는 충만한 의미와 다채로운 관계가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같은 말이지만 어감이 반대인 닥치는 대로로 새기면 어떤가? 아연 흐름이 달라진다. 이 경우 무작위는 함부로”, “아무런 지향 없이”, 심지어 익명으로라는 의미까지 결을 구성할 수 있다. 이 의미군은 뒤 문장과 무리 없는 상응을 이끈다.

 

사실 이런 언어사회적 논의는 다분한 인간중심주의다. 가령 이런 문장을 보자.

 

어린나무의 빛 부족 현상은 우연히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빛이 부족해야 어린나무가 똑바로 자랄 수 있다.”(페터 볼레벤, 나무 다시 보기를 권함(더숲, 2019))

 

여기 우연이라는 말을 우리 본문 무작위 자리에 넣으면 어찌될까? 인간 관지가 빠지면서 의미로 가득차고 관계로 다채롭다는 말과 도리어 잘 어울린다. 빛이 부족해야 어린나무가 똑바로 자라는 일, 이 얼마나 충만한 의미인가. 어미나무와 함께 살아감으로써 일어나는 빛 부족 현상, 이 얼마나 다채로운 관계인가. 이 어찌 우연히 벌어지는 일이겠는가. 우연히 벌어지는 일이 아닐 때 온갖 접속은 관계다. 우연히 벌어지는 일이 아닐 때 온갖 변화는 의미다.

 

인간사회는 어떤가? 무의미한 변화, 무관계인 접속이 난무한다. 우연 때문인가? “닥치는 대로” “함부로” “아무런 지향 없이”, 심지어 익명으로접속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우연, 아니 무작위는 병리적이다. 그 병리가 언어사회학을 구성한다. 병든 언어를 쓰는 인간사회가 치유 받을 곳은 숲이다.

 

숲에서 병적 무작위가 지닌 독을 빼내면 우연에 이른다. 우연에 이르면 숲에는 우연 따위가 없다는 진실로 건너간다. 우연히 벌어지는 일이 없다면 죄다 필연인가? 이 또한 인간중심주의다. 우연 아닌 세계는 필연 세계가 아니라 우연과 필연 이분법이 사라진 세계다.

 

우연과 필연 이분법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온갖 접속이 관계고 관계는 자체로 의미다. 우연과 필연 이분법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온갖 변화가 의미고 의미는 자체로 관계다. 우연과 필연 이분법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의미와 관계 이분법도 사라진다. 우연과 필연 이분법이 사라진 세계에서라면 우연도 무작위도 숲 본성에 포용된다. 숲에서 배우면 언제 어디서나 이렇게 충만하고 다채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