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내 걱정거리는 세상이 뒤집혀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둔갑해버리는 악이다. 방종한 이기심은 한때 끔찍한 무엇으로 지탄받았으나 이제는 성공 비결로 찬양받는다.(451)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병탄하는 과정에서 능동·적극적으로 부역했던 매판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다양한 방식으로 둔갑해 여전한, 아니 더욱 강력한 주류를 형성해 오늘에 이르렀다대표적 집단은 분단과 전쟁 상황에서 반공주의에 편승함으로써 민주주의 수호자로 둔갑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집단은 가장 거침없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에 무관심한 대중도 웬만큼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 중 하나가 바로 축적한 재산으로 사학을 설립해 교육자로 둔갑한 집단이다. 이른바 사학재벌은 거의 예외 없고, 명문 사립 대학교, 경향의 유력한 사립 중·고등학교를 쥐고 있는 집단 대부분이 그렇다.

 

스스로 둔갑할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둔갑이 자동적으로 된 집단이 있다. 총독부를 위시한 산하 기관에 근무하던 관료들은 대부분 그대로, 아니 영전해 명예를 누렸다. 언론인, 학자, 예술인, 양의사 집단 역시 직업적 특수성 덕분에 부역 혐의조차 받지 않은 채 해방 조국의 역군으로 고스란히 자동 둔갑되었다. 저 집단과 후손들의 심장은 여전히 일본을 부모나라로 품고[儭日] 있다. 이 모든 악은 미군정에서 비롯했다. 물론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걸출한 마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즘 대통령 병 걸린 한 인사가 되도 않는 둔갑을 시전하고 있는데 이제 이런 소란은 일상사로 되어버렸다.

 

일상사로 되어버리는 과정에서 눈에 띄게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둔갑 지점 이동이다. 매판세력 자신이나 매판 두호권력이 둔갑하지 않고 저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인식이 둔갑한다는 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중은 일제히 매판세력을 지탄대상으로 삼았다. 목하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찬양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매판세력은 성공집단이고 성공 비결이 바로 매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대중적 변화는 매판프레임이 주도하는 바다. 패거리 연합의 가공할 힘을 확인하고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반일 종족주의라는 말을 대놓고 꺼내든 선동가를 키워내며 힘을 과시하고 있다.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걱정거리로 치면 이는 거대하다. 변방 소시민이 걸머질 일 아니다 싶지만, 증조부께서 항일무장투쟁 선봉에 섰다가 일본군 총탄에 스러진 뒤 멸문의 길을 걸어온 후손 가운데 하나인 나로서는 숙명처럼 이런 걱정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다. 성공을 위해 둔갑시킨 내 인식 한 줌도 방종한 이기심을 번지게 할 연료가 될 테니 기꺼이 걱정한다. 걱정한다고 무슨 변화가 오겠냐만 나는 이 걱정에 마음이 요동칠 때 나무에게로 간다. 견디는 힘을 주고 희망을 놓지 않게 보듬어준다는 참나무를 부둥켜안는다. 공존과 생명연방 본성을 지닌 버드나무 앞에서 깊이 합장한다. 내가 내 삶의 길을 묻기 시작한 지 반 세기만에 발견한 나만의 숭고한 제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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