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외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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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라는 용어는 정체성이 아니라 연대를 의미한다.(105)

 

이명박 이후 대통령이라는 최고 헌법기관은 사적 탐욕 대상으로 전락했다. 박근혜가 정점을 찍었나 했더니 웬걸 지금 대선판 돌아가는 추세를 보니 점입가경이다. 인간으로나 인생으로나 준비 태부족인 채 오로지 사적 탐욕만으로 대통령을 노리는 자들로 왁자하다.

 

그 가운데 무속인 지시를 받는 자가 있어 더욱 시끄럽다. 무속인을 심리학자나 조계종 승려나 천주교 신부보다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해 문제 삼는 통속성에는 나 역시 반대다. 내가 문제 삼는 이유는 무속인이 섬기는 신이 빙의를 통해 사적으로 묶이고 그 사적 관계를 다시 단골들에게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국가 최고 권력을 사적 기복과 흥정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악이다. 악이 대통령을 표적 삼았다면 이는 실로 치명적인 문제다.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은 공적 존재지만 그 위치에 서는 자가 사적 자연인임을 몰라서하는 말이 아니다. 현실에서 그 영향을 배제할 수 없음 또한 모르지 않는다. 국가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일반 시민에게도 이런 길항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공적 행위가 사적 편향에 일방적으로 제압당할 때 일어난다. 특히 최고 권력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수천 만 명 생사가 왔다 갔다 한다. 최고 권좌에 오르려는 자는 사적 자아를 최하 위치로 내려두어야만 한다. 자신이 통치하려는 국가가 진정한 공동체이기를 원한다면 가장 큰 자신을 가장 작은 구성원에 일치시켜야만 한다. 바로 이 낮고 작은 일치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야말로 연대.

 

연대하려면 자기 정체성거점을 지워야 한다. 힘이며 돈인 정체성은 연대를 부정한다. 연대 부정을 현대에서는 신자유주의라 하고 유구한 우리 전통에서는 매판이라 한다. 매판은 내 곳간만 채워진다면 나라라도 팔아먹는다는 간결한 좌우명으로 무장하고 이 공동체 심장에 빨대 꼽아 천오백 년 간 흡혈을 계속해온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에서 볼 때, 나머지 육두품이하는 그냥 개돼지다. 개돼지 가운데 나는 퀴어가 아니라 하고 돌아서는 일은 정체성 프레임에 걸려들어 매판 정체성을 중첩시키는 짓이다. 정체성 제국을 무너뜨리려면 퀴어와 퀴어 아님 사이를 가로질러야 한다. 가로지르려면 퀴어 의미에서 연대를 판독해내야만 한다.

 

연대 의미로 풀어내면 퀴어는 소수 성정체성 집합을 넘어 인간이 지닌 다양한 어둠 속 주름을 낱낱 드러내는 발고다. 힘과 돈 가진 정체성에게 무시되고 버림받다 죽임당한 작고 적고 아프고 슬픈 생명 모두를 생명 네트워킹이 불러내는 초혼가다. 퀴어가 지하 전세방 살다 고독사한 항일무장투쟁가 후손이고, 빨갱이로 몰려 몰살당한 제주 곤을동 주민이고, 416 아이들이고, 산 채로 묻힌 송아지고, 생명 취급조차 못 받고 살해된 풀, 나무, 버섯이다.

 

찢어진 채 산비탈 그늘에 옹그리고 있는 버섯 같은 남자사람 하나와 나는 7년 전에 숙의치료를 진행한 적이 있다. 4번째 약속한 날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 연락도 끊겼다. 그가 홀연히 다시 나타났다. 그때 지불하지 못했던 치료비 절반이 채 안 되는 돈을 들고.


나는 그를 위해 깊은 기도를 올린다. 연대는 끝나지 않는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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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외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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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의 반대는 안정이 아니다; 오히려 살 만한 삶을 위한 상호의존성이 가능해지는 평등한 사회·정치 질서를 향한 투쟁이다.(103)


 

수행성은 일상적 불안정을 야기한 일극권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이 권력을 잡아 일극안정을 누릴 때까지 밀어붙이는 혁명 공학工學이 아니다. 수행성은 혁명 도학道學이다. 도학은 일극에 머무르지 않는다. “평등한” “상호의존성을 부단히 상연한다. 부단한 상연을 일러 투쟁이라 한다. 투쟁은 낭자한 파동으로 번져가는 동사다. 완전한 완성은 없다. 완성이 없어서 참 도학이다. 참 도학의 오래된 기억을 소환한다.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니다; 하느님 통치βασιλεία τοθεο.”

 

흔히 The Kingdom of God으로 번역되지만 βασιλεία τοθεο는 동사다. 영속하는 도학혁명이다. 우리가 내세운 수행성 명제와 정확히 평행하는 기독교신학 명제다. 물론 기독교는 실패했다. 현존 기독교는 못다 벗은 용의 허물이거나 전설을 먹고 사는 유령이다. 허물이거나 유령이 지닌 DNA 주요부분을 물려받는 서구문명이 바로 오늘 불안정을 야기한 일극권력이다. 우리 수행성은 이 권력 목전에서 상연되고 또 상연된다.

 

살 만한 삶을 위한 상호의존성이 가능해지는 평등한 사회·정치 질서”, βασιλεία τοθεο는 살 만한 삶을 위한 상호의존성이 가능해지는 평등한 네트워킹, 곧 식물 이전 생명들이 벌이는 entangling의 은유다. 우리는 이 생명 감각을 낭자하게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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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외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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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안에서 사회적 관계성을 끌어오는 관점은, 연대 문제를 사유할 때 정체성 중심 존재론이 가진 부적절함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문제는 내가 여러 정체성들 집합이 아니라 이미 어떤 복합체assembly라는 사실이다.(102)


 

인간이 만든 언어로 말할 때 불가피하게 인간 이외 모두는 은유 대상이 된다. 실재는 그 반대다. 인간 생명과 생명활동 모두가 식물 이전 생명의 은유다. 인간 사회는 공생의 은유다. “내가 여러 정체성들 집합이 아니라 이미 어떤 복합체assembly라는 사실도 공생의 은유다. 단순한 세포내공생에서 얽히고설킨 네트워크까지 박테리아, 곰팡이, 지의류, 식물 공생 이치가 동물 몸은 물론 그 몸들 사이를 흐른다. 그럼에도 인간은 인간 내부 언어와 논리로 이 문제를 푼다. 내가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면서 느낀 답답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식물 이전 생명이 지닌 modularity, networking, emergence 소식을 안다면 이렇게 현학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언어를 동원하지 않고서 더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수행성 이상performativity ideal”에 핍진히 다가간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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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기온이 영하 10도를 가리키는 한겨울에 연두빛 새 잎을 내는 녹보수. 실내 조건이 봄하고 같아설 테지만 인간 눈에는 신통방통이다. 벌써 12년 째 일조량 태부족인 한의원을 지키고 있다. 나무는 사위어가는 순간에도 지상의 삶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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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18 1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2년째 나무를 기르는 마음이 부럽습니다. 가꾸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싱싱한 잎이 아름다워요.

bari_che 2022-01-18 15:14   좋아요 2 | URL
개원 선물로 받은 식물은 대개 한두 해도 제대로 넘기지 못한 채 사라지지요. 이 녹보수는 키도 갓도 현저히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온힘을 다해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그저 빠뜨리지 않고 물 주는 정도로만 관심 보이다가 최근 식물 공부 하면서부터는 각별히 대하고 있습니다. 지나칠 수 없는 어떤 숭고함이 저를 끌어당긴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