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대장간1-본디 실체로서 인격은 없다. 인격이라 말하는 것은 천변만화하는 경계사건의 연속일 뿐이다. 경계사건은 관통과 흡수다. 관통과 흡수는 무궁한 변화의 결을 따라 온 마음으로, 텅 빈 마음으로 오가는 거다. 오감(去來)이 道다. 도가 인격이다.


마음 대장간2-道(1) 더는 못가겠다, 혹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한 걸음 더 내디디는 것. 道(2) 엔트로피 숙명에 걸린 마음과 맞서는 것. 道(3) 망상의 역사가 낳은 망상의 신화를 걷어내는 것. 


마음 대장간3-희망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잘난’ 자의 꿈은 높은 성공률을 보장 받고 ‘못난’ 자의 꿈은 높은 실패율을 배정 받은 것뿐이다. ‘못난’ 자가 희망에 대해 할 말은 이미 규정된 높은 실패 확률에 맞선 외마디다. 악!


마음 대장간4-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참 어렵다. 그에 앞서 자기 한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더 어렵다.


마음 대장간5-별을 닦는 마음(1)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는 현실이 있는 한 이상은 불멸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이므로 출발은 마땅히 현실에서 해야 한다. 이상에서 출발한다면 그 귀착점은 필경 현실의 잔혹함일 터이다.


마음 대장간6-별을 닦는 마음(2) 역사는 숱한 혁명이 그 자식을 살해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루지 못한 자에게 이상이 주는 설렘보다 이룬 자에게 현실이 주는 쾌감이 더 큰 법이다.


마음 대장간7-사랑이란(1) 그대의 필요를 채우려 하기보다 그대의 슬픔에 내 영혼을 적시는, 그런 것이다. 사랑이란(2) 안다고 하는 자에게 귀싸대기를, 모른다고 하는 자에게 뒤통수를 후려치는, 그런 것이다.


마음 대장간8-언어가 걷어내는 그늘은 검다. 침묵이 걷어내는 그늘은 희다.


마음 대장간9- 마흔, 거울 앞에 설 때 아버지께서 거기 계신다. 쉰, 거울 앞에 서면 흰 편지 한 통 남아 있다.


마음 대장간10-[깨침]참 이치를 보았느냐? 당나귀가 우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모자란다, 우물이 당나귀를 보는 것과 같다. [깨침 너머]참 길을 가느냐? 당나귀가 우물을 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자란다, 우물이 당나귀를 지고 가는 것과 같다. 


마음 대장간11-중용(1) 중용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격조 높은 인간성과 사회행위를 기리는 깃발이다. 모순의 공존을 보편적 존재양식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삶의 평범함이 중용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오해가 있음에도 여전히 중용의 기품은 청청하다.


마음 대장간12-중용(2) 중용을 실천하는 사람이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가 건강하다. 그러나 이미 우리사회는 중용을 어정쩡함으로 폄하하는 흐름을 타고 있다. 극단적 프로세스를 선택한 사람만이 대접 받는 판타지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마음 대장간13-중용(3) 물론 극단을 좇는 판타지 시대 또한 지나간다. 다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판타지가 현실로 도래할 것이라 믿고 환호하다 끝내는 배신당하고야 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우울증이다.

  

마음 대장간14-중용(4) 일극집중구조 사회가 빚어낸 우울증의 그림자가 우리를 뒤덮고 있다. 중용은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요체이기 때문에 매순간 그 길을 환우들과 공유하려 애쓰지만 물색없는 짓 아닌가 싶어 돌연 써늘해진다.


마음 대장간15-중용(5) 다시 한 번 중용의 말뜻 자체에 집중해 본다.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시대를 휘감는 이 극단의 기운은 중독이 아닐 수 없다. 아, 참된 중용의 온기를 신뢰하며 평범한 삶을 나눌 수 있는 벗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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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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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 해 가을 뼈아픈 사정으로 한의원 문을 닫고 낭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글을 썼습니다. 그 결과물 하나가 <안녕, 우울증>으로 나왔지요. 청소년 우울증에 관한 책 <파란 마음 멍든 마음> 원고는 어느 기자 손에 맡겨져 출판가를 떠돌고 있습니다.  전국을 흐르며 강연했습니다. 전공노, 인권활동가대회, 국가인권위원회, 여성센터, 복지관....... 그 와중에 제자 하나가 제게 아이팟을 건네면서 트위터를 권했습니다. 더듬더듬 시작한 트위터가 제게 새로운 행로를 열어주었습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글은 배우 김여진의 것이었지요. 강정마을에서 자원봉사자를 찾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거기 활동가와 연락이 닿아 침을 싸들고 강정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방랑하는 길거리 한의사 질은 평택 쌍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 심리치유 현장, 쌍차 노동자들의 영도 한중 행 소금꽃 천리길, 명동 마리, 경향신문사 13층의 송경동 시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트위터 140자 글쓰기에 흠뻑 취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자연스럽게 긴 글을 읽고 쓰는 일은 제2선으로 물러섰지요. 처음에는 어떤 상실로 다가와 트위터를 꺼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타임라인 행간을 살피면 유장한 글이 읽히고, 내가 쓴 140자 글의 결을 따라가면 긴 호흡의 글이 쓰여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적절한 속도와  열심으로 트위터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11월 초, 희망 버스 대변인 이창근 씨가 기획한 인터넷 라디오 프로그램 <희망 부스>의 `라디오 한의사`란 꼭지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제 시간 바로 앞에 김선우 시인이 출연했고, 거기서 만나 저자 친필 사인을 담은 <캔들 플라워>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아, 저는 이미 김선우의 팬이었습니다. 물론 시인 김선우지요. 그러다가 그의 <바리공주>를 읽고 소설가 김선우의 팬도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두 번째 소설인 <캔들 플라워>를 읽으면서 詩氣 물씬 풍기는 산문을 음미합니다. 함께 읽어보시렵니까?^^

 

`캔들 플라워`란 제목이 지시하듯 이 소설은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해서 일어난 촛불집회 또는 촛불문화제를 주된 서사 광장으로 택한 것입니다. 물론 촛불의 정치학은 꽃의 미학과 결합함으로써 투쟁과 놀이, 역사성과 영성의 대칭을 가로질러 갑니다. 이런 의미 교차는 작가의 인생관, 세계관, 아니 자신을 일정 정도 반영한 것일 테지요.

 

이 땅의 사회 역사에 대하여 연속과 불연속의 경계를 이루는 identity를 지닌 존재, 지오(GEO)라는 아이 또한 이런 가로지르기를 상징합니다. 밖에서 온 제3자이면서도 이 땅의 사람 그 누구보다 정확하고 깊은 감수성으로 진실의 고갱이를 향해 육박해 들어갑니다. 그 아이는, 그러나, 여기에 매몰되지 않는 `레인보우의 아이`고, 인간에 침륜되지 않는 `자연의 아이`입니다. 

 

"...튄다, 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엔 튀면서도 오랫동안 몸에 밴 숨결처럼 자연스러운 게 있었다. 은빛 솜털날개처럼를 단 꽃씨가 드넓은 수평 속에 스미듯이. 목적을 미리 정하지 않은, 속도감은 버린 꽃씨의 유영처럼." (14쪽)

 

지오의 "...출현에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일렁였다..." (14쪽) 그렇다면 소설 전체가 이 소녀 때문에 일어난 일렁임의 기록일 것입니다. 그 일렁임은 "발칙한 것" (14쪽)이고, 발칙한 것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14쪽)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발칙하게` 말하건대 소설은 이 14쪽에서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우리의 지오가 한국에 처음 닿은 인연은 희영. IMF로 거덜난 중산층, 그 소심함의 전형인 여자사람입니다. 매우 `적절한 확률`의 만남 아닌가요?^^ 이 만남에서 시작하여 연우, 수아, 민기, 숙자씨, 보리(사과), 홍노인, 그리고 이지훈...의 만남으로 번져갑니다. 각각 다른 트라우마를 지닌 이들이 촛불광장으로 나아와 `일렁임`으로 서로 부비고 엮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소소한 개인 에피소드와 거대한 정치 담론을 넘나들며 뒤엉킵니다. 무거운 판이지만 경쾌하게, 진지한 화두지만 즐겁게, 내재적 역사지만 초월의 표표함으로 너울너울 흘러갑니다. 이제 마흔 갓넘은 이 작가가 영특하게도 세계의 진실, 즉 비대칭적 대칭을 간파하고 있는 듯합니다. 초일극집중구조로 파멸을 향해 치딛고 있는 이 문명과 이 문명의 삼류 상속자들의 무지막지한 질주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길은 `발칙한 것`이어서 믿을 만합니다. 비대칭적 대칭의 논리와 속살을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느냐, 와는 상관 없이 온 몸으로, 온 영혼으로 그것을 감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눈앞에 드러난 현상을 뒤집어, 일상의 관념 맞은편에 있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아이, 지오가 작가의 분신이라 하면 매우 유치한 수준의 독서로 평가될 것임에 틀림없지만,  한꺼번에든 찰나의 시차를 두고든 작가의 눈은 대칭성 확보의 길을 좇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슬픔은 기쁨이 되고 싶은 인생의 선물이래..." (119쪽)    

 

얼핏 들으면 기쁨에 방점이 찍힌 것처럼 보이는 말이지만 기쁨이 되고 싶은 인생에 슬픔이 선물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기쁨이 되고 싶은 소망도 헛 것이고, 인생 자체에 기쁨이란 도대체 성립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이해함이 더 진의에 부합하지 않을까요? 나아가 슬픔을 선물이라 함으로써 슬픔자체의 대칭성까지 끌어안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지오가 본 청계천은 번듯하게 치장된 인공의 슬픔이 가득할 뿐 자연의 생기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본 이후 무의식적으로 계속 청계천을 바라보는 걸 외면해 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물의 높이로 누워 있어보니까 청계천의 마음이 느껴졌다. 물이 살려고 하는 기척, 깊이 깊이 호흡하며 살아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기척이 아프게 느껴지면서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길 없이 답답하게 가둬놓았지만 길 없는 그 길에서  뭔가 살 길을 모색하며 수로변의 풀들을 살리고  아주 작은 생명들을 살리기 시작하고 있는 청계천 물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서 한없이 미안했다. 생명의 의지를 가진 물에게 함부로 "뭐야, 죽은 물이잖아?"라고 말해버린 게 너무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270-271쪽)   

 

슬픔에, 길 없는 가둠에 일방적으로 제압 당해서 놓친 생명의 기척에 대한 감각을 가차없이 되찾는, 저 부끄러운 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으라고 자신을 가둔 지옥에서 다른 생명을 살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일깨우는 천국을 빚어가는 역설이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지요.

 

누군가 말했듯 인간의 인간다운 면모는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데 있습니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초일극집중구조에 틈을 내는 진실의 감각이니까요. 이 말랑말랑하고  향 맑은 감각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볼 수 있기에 캐나다와 한국, 레인보우와 아현동, 자연과 문명, 개인과 사회, 축제와 시위, 섹스와 촛불, 가족과 연인, 욕망과 대의, 놀이와 정치.......그 사이에 가로놓인 통속한 장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유자재의 가로지르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지오라는 '순수물질'이 주위와 소통하는 신비한(!) 힘은 그 순수물질이 상식과는 달리 '역설물질', 즉 모순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본디 역설순수의 존재는 더욱 빛나고 아직 그 이치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는 각자의 속도 인연을 따라 변해갑니다. 현실에서, 희망에서....... 지오의 생부, 이지훈, 이 시대 가장 절망적인 존재도 어깨를 떨어뜨리고 주춤주춤 지오의 결을 따라갑니다.   

 

소설이 가리키는 여기, 우리의 현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지오 아이들이 촛불을 들게 만든 정권은 더욱 완악해지고 있습니다.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촛불은 그 때나 지금이나 어설픈, 오히려 부작용을 낳은 껄끄러운 무엇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역사감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들의 걸음걸이. 그 느낌이 지금도 아주 생생해. 발꿈치를 살짝 들고 땅과 공기의 중간 쯤을 걷는 듯한. 현실에 있되 현실 조금 위쪽을 꿈꾸는 듯한 걸음걸이..." (368쪽) 

 

지오의 걸음걸이는 이미 거대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변화도 엄연히 시작되었습니다. 현실과 현실 '조금 위쪽' 사이, 그 역동무쌍의 경계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꽃 향기를 따라 지오 아이들은 행진을 계속할 것입니다.

 

"알몸이면 더 좋겠지. 한국의 우리 모두! 그렇게 놀아주길 바라." (368쪽)

 

그대도 그렇게 노세요. 그렇게 바라세요.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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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붓다 처방(1) 사는 동안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은 완벽하지도 영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라. 해석하려 들지 마라. 평가하려 들지 마라. 쓰라림의 진실을 받아 안아라(苦方).


우울증 붓다 처방(2) 행복이 일어났다 스러지듯 불행도 일어났다 스러진다. 세계에 영원히 변치 않는 무엇은, 브라만이든 아트만이든, 존재하지 않는다. 삼라만상은 흐르고 또 흐를 따름이다. 부디 잡지 마라. 우울증도 흐르게 놔두어라(無常方). 


우울증 붓다 처방(3) 본디 나(我)란 무수한 남에 기대어 그려지는 메아리다. 메아리인 내가 우울증을 앓는다. 거울 앞에 서서 말끄러미 눈을 보면서 물어라. 과연 우울증이 어디 있는가? 어허, 내가 메아리이니 우울증도 그렇지 않겠나(無我方)?


우울증 예수 처방(1) 내가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은 말을 기억하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느님한테서 버림받은 하느님의 아들이 증언하는 이 절대 상실, 절대 우울. 그대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하자브타니方).


우울증 예수 처방(2) 채찍을 휘두르며 성전 앞에서 독설을 퍼부은 게 나다. 채찍에 맞아가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간 것도 나다. 사자후를 토할 때가 있고 피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우울도 삶의 한 풍경이다(두 채찍方).


우울증 예수 처방(3) 나는 내 죽음을 생생하게 느꼈고, 칼 날 같이 알아차렸으며,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내 죽음은 절대 우울을 가로질러가는 자유다. 그 자유가 부활이다. 그게 진리다. 그 진리만이 우울에게 자유를 준다(진리자유方).


우울증 원효 처방(1) 부분은 오류다. 부분에 집착하는 게 병이다. 삶의 한 부분인 어둠, 자기부정에 사로잡힌 게 우울증이다. 자기 긍정도 안아라. 삶 전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 전체를 한꺼번에 마음 두라(一心方).


우울증 원효 처방(2) 극단은 오류다. 일극에 집중하는 게 병이다. 자기부정의 극단으로 달려가는 게 우울증이다. 생명은 일극 독단을 한사코 뿌리치는 대칭 운동이다. 우울의 극단적 고립을 깨뜨리고 기꺼이 환희와 몸을 섞으라(和諍方).


우울증 원효 처방(3) 실체는 오류다. 정해진 자리에 영원히 있으려는 게 병이다. 자기부정을 불변하는 실체로 여기는 게 우울증이다. 슬픔과 기쁨을 가로질러 오가라. 부디 한 곳에 갇히지 마라. 미련 없이 흐르고 매임 없이 놀아라(無碍方).


우울증 사회 처방(1) 우울증은 사회적 약자가 생물학적 약자임을 보여주는 단적 예다. 쌍차 한진 해고노동자, 강정 주민 다수가 이미 죽임 당했고 지금 죽어가고 있다. 이 사실을 제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치유가 시작된다(각성方).


우울증 사회 처방(2) 우울증은 다만 개인 질병 아니다. 사회 질병이기도 하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대량학살이다. 정치적 치유가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이 사실에 눈떠 치유 연대를 향해 나아가야 본격적으로 치유된다(연대方).


우울증 사회 처방(3)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내가 살아 함께 사는 길, 함께 살아 내가 사는 길을 즐겁게 진지하게 넘나들라. 그게 사회적 영성이다. 정치적 영성이다. 이 영성으로 우울증을 끌어안을 때 치유는 완성된다(영성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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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치유전선(0) 못된 정권 재벌 언론 종교, 거기 중독된 하수인이 사회 전반에 우울증이란 독극물을 살포하고 있다. 얼굴 가린 제노사이드! 이제 치유전선을 구축할 때다. 살아남아야 내일을 꿈꿀 수 있으니까. 각자 치유 위치로!


우울증 치유전선(1) 근본으로 삼아 우선해야 할 일이 우울증에 빠진 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공감하고 맞장구쳐주는 거다. 무조건, 그래 맞아, 말해주라. 다독다독 해주라. 자신과 심정적 정서적 연대부터 이루어야 한다. 콧날 시큰하게!


우울증 치유전선(2) 물론 힘차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내면의 힘을 다 빼앗겨 우울한 거다. 그러니 힘내야 한다고 다그치지 마라. 온정에 기대지도 마라. 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맑은 이성으로 곡절을 생각하라. 현실에 발 디뎌라. 담담히!


우울증 치유전선(3) 내 삶에 왜 우울증이 들어왔나 묻지 마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렸으면, 이제 넉넉하게 받아들여라. 이 슬픔 고통을 내 삶의 소중한 일부로 감싸 안아라. 고마워하라. 감성과 이성을 선한 의지로 품어 들여라. 듬직하게!


우울증 치유전선(4) 우울증 물살 타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마음은 솟구치려하는데 몸이 가라앉는다. 거듭되면 미리 체념하는 습관이 생긴다.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 여기가 고비다. 으라차차!


우울증 치유전선(5) 나의 오늘은 어제가 빚은 거다. 어제 나를 슬프게 했던 일과 직면하라. 하나하나 마주세우라. 세밀하게 기억하라. 거기 들러붙은 감정을 생생하게 다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 여기부터 옹골찬 시작이다. 뚜벅뚜벅!


우울증 치유전선(6) 오늘 나는 우울의 늪에 푹 빠져 있다. 허나 그게 다라면 나는 이미 죽었다. 나를 이 순간 살아 있게 하는 정반대 진실이 있다. 내 생명의 굳건한 가치, 존재의 환희 말이다. 그걸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 사무치게!


우울증 치유전선(7) 이렇듯 내 생명은 대칭성 안에 있다. 우울과 환희, 불행과 행복, 절망과 희망. 서로 모순된, 마주선 진실을 한꺼번에 보라. 하나만, 부분만 보아서 아픈 거니까. 전체를 끌어안고, 크게, 깊게, 천천히 숨 쉬라. 고래처럼!


우울증 치유전선(8) 그러나 대칭성은 찰나마다 깨진다. 모순끼리 경계에서 만나 관통하고 흡수한다. 우울한 사람은 자학을 주고 자긍을 받는다. 자만에 찬 사람은 자기애를 주고 겸허를 받는다. 미련 없이 주고 흔쾌히 받는다. 화쟁이다. 속이 다 후련한!


우울증 치유전선(9) 서로 자발적으로 깨져서 화쟁하는 대칭은 자유자재를 꽃피운다. 모순을 가로지른다. 역설의 판을 경이롭게 빚어낸다. 걸릴 게 없다. 원효가 무애 춤을 추듯 논다. 우울한들 어떠며 기쁜들 어떠랴. 다 지나간다. 신난다. 울라울라!


우울증 치유전선(10) 삶의 모든 술렁임은 고요의 품에 있다. 모든 고요는 술렁임에 업혀 잠든다. 이 고요술렁(靜中動)의 절묘한 평화. 내가 깃들 집이 여기다. 내가 흐를 강이 여기다. 우울과 환희가 뭐 다르랴. 그저 그렇게 그러하다. 그냥! 


우울증 치유전선(00) 고요술렁이 고르게 번져가는 세상. 거기, 어제 그 해가 여전히 뜬다.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밥 먹고, 일하고, 놀고, 잔다. 권력은 다소곳하고, 시민은 느긋하다. 살포된 우울은 더 이상 없다. 그뿐이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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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글쓰기에서 멀어졌던 시간 동안 트위터 글쓰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쓴 140자 글 모음 일부를 올립니다. 

 

마음병 로드맵(1) 모든 마음병의 진원, 그 둥근 경계에는 공포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공포와 불안은 인간 존재의 숙명적 표지다. 無에서 有로 빚어지는 찰나 엄습하는 최초의 감정이자 에너지다. 공포는 有의 느낌을, 불안은 無의 느낌을 반영한다.


마음병 로드맵(2) 공포는 특정 경험을 해석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불안은 그 기억을 일반화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일부/개체의 공포는 전부/전체의 불안으로 확산된다. 이 공포와 불안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마음병은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마음병 로드맵(3) 공포와 불안을 피하는 병적 반응은 시간의 맥락과 공간의 지평, 두 축으로 전개된다. 시간의 맥락은 항상성(常)의 문제다. 즉, 변할 거냐 말 거냐 하는 문제다. 공간의 지평은 경계성(我)의 문제다. 즉, 나냐 남이냐 하는 문제다. 


마음병 로드맵(4) 공포와 불안을 피하려고 시간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면 [강박]의 길로 간다. 규칙과 반복 뒤에 숨는 것이다. 변화를 극단적으로 긍정하면 [전환]의 길로 간다. 일탈과 즉흥 뒤에 숨는 것이다.


마음병 로드맵(5) 공포와 불안을 피하려고 공간의 지평에 세운 자아경계를 극단적으로 긍정하면 [분열]의 길로 간다. 자아의 성에 고립되는 것이다. 자아경계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면 [우울]의 길로 간다. 자아를 송두리째 해체하는 것이다.


마음병 로드맵(6) 마음병을 이렇게 한눈에 보는 발상은 苦, 無常, 無我를 설파한 세존의 가르침과 포개진다. 물론 원효의 一心, 和諍, 無碍 길이 그 사유를 넘어서고 치유까지 완성했다. 잡다한 미국식 정신의학으로는 당최 접근 불가능하다.


마음병 로드맵(7) 마음병도 결국은 생명 안에서 일어난다. 다만 생명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일부를 부득불 도입하기에 병이라 이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울증은 가장 깊고 독한 마음병이다. 죽음을 단도직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마음병 로드맵(8) 깊고 독해서 죽음과 도저한 상면을 하는 바로 그만큼 우울증은 세상 이치를 꿰뚫는 비수가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관문이 될 수 있다. 無에서 有로, 다시 無로 가는 차원변이의 칼날 위에 선 역설미학이다.


마음병 로드맵(9) 대한민국은 우울공화국이다. 깊고 푸른 절망이 드리워져 있다. 바.로. 그.래.서. 희망이 엄존한다. 매판의 야차들이 죽음을 들이밀 때 그 죽음을 품어 안고 절망을 꿰뚫어 간다. 피눈물로 역설의 자유를 연다.


마음병 로드맵(10) 죽음은 다만 병의 귀착점이 아니다. 죽음은 병의 소실점이기도 하다. 마음병이 번져갈 때 죽음을 피하려 함으로써 죽음을 문제 중심에 놓지 마라. 마음병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치를 깨닫게 하는 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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