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깨나 하는 샌님 같은 꼬맹이가 교복 첫 두 단추 풀고 라면집 뒷방에 앉아 고량주를 홀짝거리던 풍경에 대한 기억이 어제 같습니다. 십대 끄트머리에 치기어린 일탈의 한 가락으로 그렇게 시작한 술을 사십년 째 마시고 있네요. 아마 그 동안 마신 술을 다 모으면 풀장 하나는 족히 되지 싶습니다.
술 때문에 벌어졌던 이런저런 이야기는 다 젖혀두고 아내와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리면 이 사십 년 세월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워낙 술을 좋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변함이 없자, 하루는 소담한 술상을 봐놓고 몇 잔 따라주더니 정색을 하고 묻습니다.
“당신한테 술이란 뭐야?”
저는 서슴없이 대답합니다.
“엄마지.”
단순명쾌무인지경! 단도직입감동무비! 아내가 말했습니다.
“모자지간 떼어놓으면 벌 받겠네.......”
그 날 이후 아내는 건강 걱정하는 언급 이외에 더는 강력히 만류하지 못했습니다. 입때껏 술이 제 몸에 끼친 해독보다 영혼에 끼친 이득이 더 많다고 생각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술은 모유(에 대한 그리움을 다독)입니다. 모유는 유아에게 곧 엄마입니다.
술은 액체자아를 빚어냅니다. 홀로 서지 못하는 아기를 보듬어 세워주는 엄마의 부재를, 술에 취해 휘청거림으로써 애도합니다. 또한 엄마 없이 때 이르게 억지로 홀로 서다가 뻣뻣해진 근육자아를 해방합니다.
물론 술에 대한 이런 해석을 일찍이 들어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억지라고 여기실 분들이 아마 대부분일 테죠. 그러나 아주 오랜 옛날부터 술에는 제의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제의적 의미에는 의학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신을 치유하는 방편이었다는 말입니다. 온갖 몹쓸 병의 원인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지니는 상식은 현대의학의 모함일 따름입니다.
술의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술의 애도하는 힘, 해방하는 힘은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음을 알지 못하고 술에 마냥 기대면 언젠가는 술도 독이 되고 맙니다. 중독 상태가 아니더라도 임계점을 넘어선 음주는 슬픔을 통과하려는 사람의 발목을 잡습니다. 술이 제공하는 애도와 해방이 상처 입은 아이를 건강한 어른으로 되게 하려면 명정(酩酊)의 바다를 건너서 명징(明澄)의 땅에 이르러야만 합니다. 취함의 위안이 맑음의 격려로 바뀌려면, 따스함에 깃든 아이에서 서늘함을 타는 어른으로 자라려면, 타고 온 배를 두고 제 발로 걸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작별은 숙명입니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자신만의 붓다, 자신만의 그리스도가 될 때를 맞습니다. 작은 자아(小我)를 넘어 큰 자아(大我)로 살아야 할, 오직 그렇게 살아야 할 순간과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점부터 참된 대박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혼자만을 풍요롭게 할 권력, 돈, 명성을 왕창 쥐는 게 대박이 아닙니다. 바르고 착하고 아름답고 튼튼하고 씩씩한 사람 삶이 공동체 전체로 번져가게 하는 것이 대박입니다. 참된 대박, 그 마지막 대운(大運)을 열기 위해 이제 저는 곡진히 몌별(袂別)을 준비하려 합니다.
앞으로도 한 잔 술이 절실한 아픈 이와 마주할 자리가 없지 않겠지요. 무애(無碍)의 땅에 계(戒)를 짓는 것은 부질없을 테니 그런 술이라면 굳이 마달 일은 아닙니다. 그저 표표히 명정의 바다를 건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따름입니다. 액체 자아, 근육자아를 술로 달래며 살아 온 세월이여, 안녕!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