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5장 본문입니다.  

 

誠者 自誠也 而道 自道也.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 是故 君子 誠之爲貴.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성(誠)은 자기 자신을 이루는 것이고 도(道)는 자기를 인도하는 것이다. 誠은 물(物)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誠하지 아니 하면 物이 없다. 이 때문에 군자는 物을 귀하게 여긴다. 誠은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物을 완성하는 수단이 된다. 자기를 완성하는 것은 인(仁)이고 남을 완성하는 것은 지(知)이니 성(性)의 덕이며 안과 밖은 합하는 도이다. 그러므로 때에 맞게 조처하는 마땅함이다.  

 

2.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誠)은 내면의 힘에서 나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의 도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스스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즐겁고 행복해서 관통하고 흡수하는 것입니다. 남한테 내세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에게 겸손하게 청하여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일입니다.  

 

3.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은 사건(物)을 일으키고 마무리합니다. 그 실천이 없다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진정으로 상호 소통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실천은 그 사건들의 생명주기와 함께 합니다. 사건의 주체이자 사건 그 자체의 불가분 일체입니다.  

 

4. 그러므로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루어 가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소통의 사건을 이루어 가는 일입니다. 사회와 자연과 절연된 개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입니다.  

 

5. 자기 자신을 이루어 가는 일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仁)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 규정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에게 부름 받아 규정됩니다. 그의 사랑을 받아 이루어집니다. 

 

사건을 이루어 가는 일은 사건의 흐름과 방향을 알아차려야(知) 가능합니다. 이 알아차림은 실천에서 나오는 증득(證得)의 지혜입니다. 함께 흘러감으로 생겨난 슬기로움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과 알아차리는 일은 본질(性)에서 통합됩니다(合內外).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소통의 서정이며 알아차림은 소통의 지성입니다.   

 

6. 소통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시간입니다. 그 때 그 때 알 맞는 영양과 보살핌이 마땅히 있어야(時措之宜) 생명은 유지되고 확산됩니다. 생명은 다만 은총인 것이 아니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할 인연인 것입니다.    

 

7. 지금의 헤게모니 블록을 보면 仁도 없고 知도 없음이 확실합니다. 오직 탐욕과 그 것을 채워주는  공작적 정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무리하게 밀어 붙이고 나중엔 오리발 내미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時措之宜와는 정반대의 길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저들이야 결코 오래가지 못하겠지만 나라가 회복 불능 상태로 망가지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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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4장 본문입니다.  

 

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芪龜 動乎四體 禍復將至 善  必先知之 不善 必先知之. 故 至誠 如神.  

 

지극히 성실한 사람은 앞일을 먼저 알 수 있다. 국가가 장차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하면 반드시 흉한 징조가 있어서 시초(주역점)와 거북(거북점)에서 나타나고 몸에서 움직여진다. 화와 복이 장차 이를 경우 좋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알며 좋지 않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안다. 그러므로 지극한 성실함은 신과 같다.    

 

2. 온전히 적확한, 흐트러지지 않은 실천의 길을 가노라면 모름지기 예지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 예지력은 무슨 신비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그 흐름을 공감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백성과 더불어 호흡함으로써 그들의 일상을 꿰뚫고 있다면 오늘의 마음 씀, 몸놀림을 보고 내일을 아는 일 또한 일상적 수준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백성의 선한 말, 바른 행동, 즐거운 노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겠습니까? 백성의 악한 말, 슬픈 노래, 고통스런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징조란 것도 신비한 무엇이 결코 아닙니다. 하얀 구렁이가 나타났네, 돌부처가 눈물을 흘렸네...흥미롭기는 하나 그런 현상을 징조라 한다면 군자의 至誠으로 얻어지는  통찰력과는 실로 무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대인의 복서(卜筮) 행위는 자기 성찰이라는 정갈한 바탕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고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이는 행위를 다만 앞날을 예견하는 기술쯤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에서는 백성을 위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요,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인다는 의미에서는 사태를 통합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 마음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마음 비움과 마음 챙김의 역설적 일치에서 군자의 중용은 시대를 밝히는 빛이 됩니다.  

 

3. 이렇게 至誠은 신과 같습니다. 중용 명상을 통해 신통력을 얻게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치열한 실천에서 증득(證得)되는 통찰력, 예지력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권력, 재물, 명예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중용으로 이룬 大同 세상에서는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있을 뿐이거늘 무슨 억압과 차별과 소외가 있을 것입니까? 혁명의 기득권과 전리품을 내려놓고 밀림으로 돌아간 체 게바라가 바로 至誠의 화현이요 신입니다.   

 

4. 일전 주역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대산 선생과 인터뷰한 기사를 어느 일간지에서 읽었습니다. 그 어른께서 2012년에 어진 지도자가 난다고 하시더군요. 주역을 풀어 말씀하신 것을 중용적 실천에 따른 통찰력과 그대로 일치시키는 것이 가당한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예언을 믿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지금 세월이 너무나 신산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실 거꾸로 된 생각이 더 큽니다. 왜 저 어르신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역사의 한가운데서 백성의 각성을 이끄시지 않을까, 주역에 기대어 예언하는 게 주역을 배운 이들의 최상의 실천은 아닐 텐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과연 그 어진 지도자가 누굴 말하는지, 아니 어떤 이를 세워야 할지, 말해야 하지 않을까.......이런 생각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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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골목길 부처다 - 이언진 평전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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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보았을 땐 그냥 지나쳤습니다. <나는 골목길 부처다>라는 제목 때문이라기보다 이언진이라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 때문이었을 터. 아마도, 넌 또 누구냐, 뭐 이런  습관적 반응이었을 겁니다. 개나 소나 끌어다가 스타 만드는 풍조에 넌덜머리 난 무지렁이의 냉소적 반응이랄까, 아무튼. 

두세 번 지나다가 표지에 그려진 부처 인상이 운주사의 저 naïve한 그것과 흡사하단 느낌, 아, 물론 전혀 아니올시다지만, 그 때문에 책을 펴 들어 보았습니다. 책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한 진부한 '간 보기'에서 몇 가지 사항이 눈길을 끌더군요. 중인이다, 박지원이 傳을 썼는데 최악이다, 이단적 또는 혁명적이다, 성속을 가로지른다....... 내면에서 슬며시 팔꿈치 하나 나와 옆구리를 찌르더군요.  

2. 조선 영조 연간 태어나고 요절한 역관 이언진은 시대를 앞서간, 그래서 그 시대와 불화한 천재입니다. 저자는 두 가지로 나누어 그의 면모를 정리합니다. 

새로운 진리 구성 - 송시열이 구축한 사대적이고 매판적인 주자(朱子)주의가 초일극집중구조를 형성하고 있던 시대에 그는 인간 평등을 주장했으며, 유불도의 공존을 통한 진리의 복수성을 인정했으며, 옛것의 맹목적 추종을 거부하고 오늘의 가치를 창달하고자 했으며, 사서삼경 이외의 텍스트에도 진리성이 있음을 천명했고, 인간 욕망을 긍정했습니다.  

새로운 주체 형성 - 양반만이 주체였던 시대에 그는 중인임도 주체임을 선언했으며, 도시 서민과 중인의 삶터인 호동(衚衕)을 자기 공간으로 삼았으며, 자기존중을 기한 항장(骯髒)한 주체였으며, 저항적 주체였으며, 성속을 가로지르는 주체였습니다.   

물론 그가 지닌 한계도 있습니다. 저자가 지적한 것은 인간평등에서 남녀평등이 빠져 있다는 점(하지만 이 점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평가가 썩 적극적이지는 않습니다.), 그가 도시에서 태어나 살았기 때문에 조선사회 전체를 더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농촌과 농민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다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3. 한 사람의 사상과 그에 다른 실천이 전천후적일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붓다나, 예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사상과 실천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그래서 비판하고, 심지어 비난하고 말자는 의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사상과 실천을 오늘 우리의 자산으로 받고, 한계 너머의 것을 향도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언진을 읽을 때, 그의 삶과 사유, 그리고 실천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몇 가지 안타까움을 금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삶의 자리에서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상황과 요청의 빛을 따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그가 자신의 진리 인식, 또는 사상을 대부분 시로 표현한 사실부터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적극적으로 이언진을 옹호하면서 숱한 종교경전이 시로 되어 있으며, 높은 선지식(禪知識)이나 거유(巨儒)들도  종종 시로써 그 깨달음을 나타냈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이 예에서 간과하고 있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종교 경전은 고대적 문헌전승이 구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운문 형태를 띤 것이지 의도적으로 시 형식을 빌린 것은 아니라는 게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종교 경전, 선승이나 유자의 시가 깊은 사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언진의 사상처럼 저항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구약성서 시편에, 이황의 시조에 무슨 저항의식이 들어 있다는 것인가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시로써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언진의 차별적 사상을 표현하기에 시라는 형식이 과연 적합한가를 문제 삼아야 합니다. 그의 사상이 당대 주류 주자학에 터 잡은 수구, 또는 보수적인 것이라면 특별히 문제삼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효는 이언진과 흡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당나라 유학파 엘리트 승려들이 왕실을 끼고 사상계를 장악하여 초일극구조를 확립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주류 사상을 대표하는 사람이 진골 출신의 의상이었습니다. 그 의상과 대척점에 선 원효는 성골도 진골도 아닌 육두품(이하) 계열 사람이었습니다. 원효는 당을 통해 수입된 불교사상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자주불교의 날카롭고도 웅혼한 나래를 펼쳐 갔습니다. 의상의 사상은 화엄일승법계도 7언 30구 210자 시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효의 사상은 최소 80부 150여 권, 최대 102부 303 권으로 된 방대한 산문 저작입니다. 대부분 소(疏), 즉 자세한 풀이의 형식을 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의상의 시와 원효의 소(疏)는 어떤 결정적 차이를 지닐까요? 의상의 시는 고도한 직관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압축된 큰 덩어리입니다. 원효의 소(疏)는 낱낱이 풀어 놓아 이해할 수 있게 한 작은 이야기의 네트워크입니다. 전자는 엘리트의 기득권을 지키는 신화적 암호입니다. 후자는 다수 민중을 어루만지는 역사적 내러티브입니다. 그래서 의상은 의상에서 끝났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원효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을, 저자를 포함한 오늘날 우리 거의 모두가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언진도 몰랐을 것입니다. 알았다면 그는 시를 내려놓았을 겁니다. 

저자는 이언진의  시를 미학적 실천이라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 또한 실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를 통해 그 실천 양식을 드러낸 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 규정과 맞물린 문제인데, 그가 주로 주의를 기울인 것은 자신이 양반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사실이지 다른 중인, 상민, 노비들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양반과 다름없는, 아니 양반보다 뛰어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한 표지였던 셈입니다. 그 자체로도 물론 치열한 저항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중인, 상민, 노비들과  같은 존재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서도 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가 시로써 자신과 저 민중들을 동일시하는 생각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양반에 대한 태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문자적 공유가 결여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문시를 통해 양반과는 저항적 일치가, 중인 이하와는 일치적 분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저자는 주체의 공간화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드러내줍니다.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주체의 공간화라는 표현은 이언진의 주체적, 진보적 태도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그 사명을 끝내는 게 아닙니다. 이언진이 그 민중들과 연대하지 못했다는, 다시 말하면 저항의 사회동원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공간에 그들과 함께 있었으되 다만 그것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혁명하는 생명공동체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서삼경 대신 수호전을 경전으로 삼아도, 아무리 흑선풍 이규를 염원해도, 이언진의 열망은  한문시의 상징 공간에서 숨이 막혀버리고 맙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종교적 수행이었습니다. 특유의 자존감 어린 표현이긴 하지만 스스로 부처라고 여길 정도였다니 상당히 결곡한 영성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또한 저자는 성속을 가로지른다고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 때의 聖도 그 때의 俗도 매우 실존적이고 소승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 만큼 살았다면 아마도 영종조 연간에 걸쳐서 살았을 것이고, 그 때, 이른바 중흥기 조선에서 혁명을 꿈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언진은 각혈하는 저항 시인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시인은 시로써 혁명한다고 두둔하기에 그의 시는 날카로운 천재성에 비해  일렁이는 선동성이 덜한 게 사실입니다. 결국 그가 말하는 부처는 사회적 가치와 욕망을 내면화하는, 그래서 탈사회, 즉 출세간으로 귀결되는 수직 영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로지르기는 산 역사가 되지 못합니다.  

4. 이언진은 이언진인 이언진입니다. 그는 일단 그로서만 보아주어야 합니다. 여태 제가 말씀드린 바는 이 이치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를 오늘에 되살리려면 오늘의 관점과 요청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언진의 재발견은 오히려 이언진을 넘어서야  빛나는 것입니다. 저항의 방식은 일률적일 수 없고 우열도 없으며 심미적이기도 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 공감 백만 제곱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언진을 떠올릴 때 원효도 함께 떠오르는 것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이언진의 불꽃 같은 삶, 자신의 온몸을 던진 사유행위와 글쓰기 행위, 존재와 글쓰기의 구경(究竟)적 통일, 분잡과 고통 속에서도 고매함과 성스러움을 향한 갈구의 끊을 놓지 않은 것 등(도)-괄호 처리 필자-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아니 다시 강조한 이 말에서 서울대학교 교수인 저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을 우리는 봅니다.  누구든 이 이치를 떠날 수 없지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제 위상과 너무 먼, 저 아득한 누구에겐가 저를 투영하고, 오늘 밤, 절연의 괴리감과 더불어 이 글 쓴 것을 후회하며 자책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은,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기를 계속합니다. 역사와 그 속의 사람, 오늘은 이언진을 통해 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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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3장 본문입니다.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그 다음은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한 부분에 지극하면 誠이 있을 수 있다. 정성스러우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드러나며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변하고 변하면 화(化)한다. 오직 천하의 정성스러움만이 化할 수 있다.  

 

2. 여태까지 기초적 본문 읽기는 이기동 역(譯)을 따랐지만 구체적 내용에서는 명사적 독법을 대부분 따르지 않고 제 나름의 이해를 펼쳐 왔습니다. 이 장에서는 처음부터  아예 번역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치곡(致曲) 문제입니다. 주희가 曲을 '모퉁이'라고 했다는군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기동은 '한 부분‘으로 읽어 致曲을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지극한 誠이 어려울 때는 차선으로 한 부분부터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이 또한 주희 식 명사적 독법입니다. 저는 曲을 '곡진하게 (행) 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퉁이든 한 부분이든 그 것을 명사로 읽으면 치곡능유성(致曲能有誠)이 아니고  곡능유성(曲能有誠)이라 한 본문을 설명하기 궁합니다. 그리고 본문 맨 앞에 있는 기차(其次)를 보면 이 장이 바로 앞장인 제22장과 문맥상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앞 장의 키워드 중 하나인 진(盡)은 여기의 曲이고, 화육(化育)은 여기의 化입니다.   

 

3. 곡진하다는 말은 자세하고 간곡하다는 뜻이므로 자연스럽게 誠과 연속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曲能有誠인 것이지요. 誠에 진정성을, 간절함, 섬세함을 부여한 또 다른 표현이 바로 曲입니다. 曲으로 표현된 誠은 치밀한 과정을 밟아 至誠으로 나아갑니다.  

곡진하게 誠의 실천을 통해 중용적 삶의 얼개를 그리는(形) 것이 첫 번째 과정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삶을 중용의 도에 정향(定向)하는 일일 것입니다. 선택하고 선언하고 약속하는 순간들이 모여서 그 방향과 테두리를 잡아 갈 것입니다.  

 

그  윤곽에 내용을 채워 확연하게 드러내는(著) 과정이 그 다음입니다. 드러낸다는 말은 자랑한다거나, 무기로 삼는다는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실천의 열매들이 무르익고 쟁여져서 자연스럽게 밖으로 넘쳐나는 현상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 삶을 통해 도리를 명쾌하게 꿰뚫는(明) 과정이 세 번째 과정입니다. 단순한 지적 깨달음이 아니라 실천에서 오는 이른바 증득(證得)입니다. 몸으로 아는 것이지요. 그런 行知로써 세상사는 이치를 밝히는 일은 다만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중용의 위상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과정은 거침없이 大同을 향해 움직이는(動) 단계입니다. 밝히는(明) 목적은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중용이 구가하는 사회동원력이 바로 動 한 글자에 실려 있습니다.  중용은 결코 책상머리 놀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꾸는(變) 다섯 번째 과정으로 진입합니다. 움직이되, 나아가되 혁파가 없다면 무의미합니다. 승자와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악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구체적인 힘으로 나타나지 않는 중용은 중용이 아닙니다. 특별하고, 잘난 소수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세상을 뒤흔드는 함성으로 들리지 않는 중용은 중용이 아닙니다.  

 

마침내 大同으로 질적 전환하는 화(化)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저 舜이 이룩한 세상, 온 생명이 평등하게 상호 소통함으로써 함께 자유롭고 더불어 평화로운 누리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런 세상의 꿈을 간직한 곡진한 발걸음  하나하나가  어둠을 뚫는 촛불이 되어 중용천지를 만들어 갑니다.  

 

4. 우리는 오늘날  반중용적 헤게모니 블록이 대놓고 권력을 사유화함으로써 무참하게 중용천지가 도륙되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의 손과 발이 되어 반중용의 폭거를저지해야 할 사람들이 곡진한 실천을 통해 나라의 앞길을 닦지도 않고, 꿰뚫고 나아가 악을 혁파하지도 않고, 결국 새 세상을 만들지도 않으면서 입만 열면  백성 위한다고 떠드는 소리를 듣고 살아갑니다.  언제까지 슬픈 마음으로 저 오만방자한, 또는 입만 살아 있는 엘리트들이 變하고 化하기를 빌고 있어야 할는지요....... 정녕 이제는 우리 백성이 사화산 되고 만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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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가라
조셉 M.마셜 지음, 유향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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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Keep Going인데 왜 번역자는 '그래도'를 덧붙였을까? 사실 이 의문 때문에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저자가 북미대륙 원주민 전통의 사유 세계에 있다는 정보 하나만으로도 이 의문은 든든한 근거를 지니게 됩니다. 영어로 된 것을 읽어 보지 못해서 책 본문 어딘가에 '그래도'란 표현이 있는지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그들의 정신 속에는 '그래도'가 없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 문제 때문에 이 글을 썼습니다. 

'그래도'란 말을 구태여 넣은 까닭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까닭에 수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갈 수 없을 만큼, 또는 그러기 싫을 만큼 고통스런 상황임을 전제하고 있는 어법이거든요. 그리고 이 전제는 일반적으로 그 상황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다시 전제합니다. 결국 고통 자체와 고통에 대한 부정적 판단의 이중 장벽 때문에 사실은 계속 가라고 할 수 없음에도 가라고 한다는 뜻에서, '그래도' 가라고 한 것이지요. 누구든 이런 맥락에 선뜻 이의를 제기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늙은 매'를 화자로 해서 펼쳐지는 저자의 사유 지평은 인생사, 아니 세계 전체의 양면성 또는 대칭성을 알아차리는 것에 근본적으로 터 잡고 있습니다. 이 양면성 또는 대칭성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구체적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는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한 가치가 결코 완전 분리된 무엇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피하고 환희만 좇으려 해도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됩니다.  이치로 보아 그렇게 해도 결국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통해 진정한 환희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고통 자체를 환희로 받아들이는 고행주의나 매저키즘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환희는 완전히 쪼개진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포개진 하나도 아니거든요. 

이런 이치에 깊이 주의를 기울이면  '그래도'란  수식어는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친 것이어서 저자의 사유를 현저하게 비틀거나, 적어도 제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번개처럼 우리에게 떠오르는 또 하나의 접속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빙고! 리듬까지 맞추자면 "그러니"도 좋겠지요. '그래도'가 고통과 환희의 불연속성 쪽에 방점이 찍힌 것이라면  "그러므로"는 양자의 연속성에 방점이 찍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치상 연속성은 불연속성을 포함(包含 아닌 包涵)하기 때문에 훨씬 더 궁극적인 관계지음입니다.  

요컨대 뭔가 '임팩트' 있게 하기 위해 덧붙임 말을 넣으려 했다면 "그러므로"가 나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러므로 계속 가라"는 표현은 승승장구하는 사람에게나 주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이런 책을 왜 보겠습니까. 어차피 이런 책이 필요한 사람은 깊은 고통 속에 빠져 있거나, 뭔가 일이 안 풀려 힘을 잃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 상황 자체 속에 답이 있다, 즉 고통을 통해 환희를 깨닫고 강인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데는 "그러므로"야말로 기품 있는 '임팩트'가 아닐까요?   

 '그래도' 계속 가라, 이는 이른바 긍정주의, 즉 '고통은 없다 치고' 가라 하는 사기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나마 균형을 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세계의 전체적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가 가리키는 도저한 진실, 더 나아가 '그래도'와 "그러므로"를 분별하되 분리하지 않는 따스한 진실을 향해 옛 생각 거적을 훌렁 벗어 던지고 한 번 가보시지요. 홀가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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