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4장 본문입니다.  

 

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芪龜 動乎四體 禍復將至 善  必先知之 不善 必先知之. 故 至誠 如神.  

 

지극히 성실한 사람은 앞일을 먼저 알 수 있다. 국가가 장차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하면 반드시 흉한 징조가 있어서 시초(주역점)와 거북(거북점)에서 나타나고 몸에서 움직여진다. 화와 복이 장차 이를 경우 좋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알며 좋지 않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안다. 그러므로 지극한 성실함은 신과 같다.    

 

2. 온전히 적확한, 흐트러지지 않은 실천의 길을 가노라면 모름지기 예지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 예지력은 무슨 신비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그 흐름을 공감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백성과 더불어 호흡함으로써 그들의 일상을 꿰뚫고 있다면 오늘의 마음 씀, 몸놀림을 보고 내일을 아는 일 또한 일상적 수준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백성의 선한 말, 바른 행동, 즐거운 노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겠습니까? 백성의 악한 말, 슬픈 노래, 고통스런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징조란 것도 신비한 무엇이 결코 아닙니다. 하얀 구렁이가 나타났네, 돌부처가 눈물을 흘렸네...흥미롭기는 하나 그런 현상을 징조라 한다면 군자의 至誠으로 얻어지는  통찰력과는 실로 무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대인의 복서(卜筮) 행위는 자기 성찰이라는 정갈한 바탕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고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이는 행위를 다만 앞날을 예견하는 기술쯤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에서는 백성을 위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요,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인다는 의미에서는 사태를 통합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 마음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마음 비움과 마음 챙김의 역설적 일치에서 군자의 중용은 시대를 밝히는 빛이 됩니다.  

 

3. 이렇게 至誠은 신과 같습니다. 중용 명상을 통해 신통력을 얻게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치열한 실천에서 증득(證得)되는 통찰력, 예지력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권력, 재물, 명예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중용으로 이룬 大同 세상에서는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있을 뿐이거늘 무슨 억압과 차별과 소외가 있을 것입니까? 혁명의 기득권과 전리품을 내려놓고 밀림으로 돌아간 체 게바라가 바로 至誠의 화현이요 신입니다.   

 

4. 일전 주역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대산 선생과 인터뷰한 기사를 어느 일간지에서 읽었습니다. 그 어른께서 2012년에 어진 지도자가 난다고 하시더군요. 주역을 풀어 말씀하신 것을 중용적 실천에 따른 통찰력과 그대로 일치시키는 것이 가당한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예언을 믿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지금 세월이 너무나 신산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실 거꾸로 된 생각이 더 큽니다. 왜 저 어르신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역사의 한가운데서 백성의 각성을 이끄시지 않을까, 주역에 기대어 예언하는 게 주역을 배운 이들의 최상의 실천은 아닐 텐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과연 그 어진 지도자가 누굴 말하는지, 아니 어떤 이를 세워야 할지, 말해야 하지 않을까.......이런 생각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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