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계속 가라
조셉 M.마셜 지음, 유향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원제가 Keep Going인데 왜 번역자는 '그래도'를 덧붙였을까? 사실 이 의문 때문에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저자가 북미대륙 원주민 전통의 사유 세계에 있다는 정보 하나만으로도 이 의문은 든든한 근거를 지니게 됩니다. 영어로 된 것을 읽어 보지 못해서 책 본문 어딘가에 '그래도'란 표현이 있는지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그들의 정신 속에는 '그래도'가 없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 문제 때문에 이 글을 썼습니다. 

'그래도'란 말을 구태여 넣은 까닭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까닭에 수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갈 수 없을 만큼, 또는 그러기 싫을 만큼 고통스런 상황임을 전제하고 있는 어법이거든요. 그리고 이 전제는 일반적으로 그 상황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다시 전제합니다. 결국 고통 자체와 고통에 대한 부정적 판단의 이중 장벽 때문에 사실은 계속 가라고 할 수 없음에도 가라고 한다는 뜻에서, '그래도' 가라고 한 것이지요. 누구든 이런 맥락에 선뜻 이의를 제기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늙은 매'를 화자로 해서 펼쳐지는 저자의 사유 지평은 인생사, 아니 세계 전체의 양면성 또는 대칭성을 알아차리는 것에 근본적으로 터 잡고 있습니다. 이 양면성 또는 대칭성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구체적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는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한 가치가 결코 완전 분리된 무엇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피하고 환희만 좇으려 해도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됩니다.  이치로 보아 그렇게 해도 결국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통해 진정한 환희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고통 자체를 환희로 받아들이는 고행주의나 매저키즘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환희는 완전히 쪼개진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포개진 하나도 아니거든요. 

이런 이치에 깊이 주의를 기울이면  '그래도'란  수식어는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친 것이어서 저자의 사유를 현저하게 비틀거나, 적어도 제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번개처럼 우리에게 떠오르는 또 하나의 접속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빙고! 리듬까지 맞추자면 "그러니"도 좋겠지요. '그래도'가 고통과 환희의 불연속성 쪽에 방점이 찍힌 것이라면  "그러므로"는 양자의 연속성에 방점이 찍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치상 연속성은 불연속성을 포함(包含 아닌 包涵)하기 때문에 훨씬 더 궁극적인 관계지음입니다.  

요컨대 뭔가 '임팩트' 있게 하기 위해 덧붙임 말을 넣으려 했다면 "그러므로"가 나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러므로 계속 가라"는 표현은 승승장구하는 사람에게나 주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이런 책을 왜 보겠습니까. 어차피 이런 책이 필요한 사람은 깊은 고통 속에 빠져 있거나, 뭔가 일이 안 풀려 힘을 잃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 상황 자체 속에 답이 있다, 즉 고통을 통해 환희를 깨닫고 강인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데는 "그러므로"야말로 기품 있는 '임팩트'가 아닐까요?   

 '그래도' 계속 가라, 이는 이른바 긍정주의, 즉 '고통은 없다 치고' 가라 하는 사기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나마 균형을 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세계의 전체적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가 가리키는 도저한 진실, 더 나아가 '그래도'와 "그러므로"를 분별하되 분리하지 않는 따스한 진실을 향해 옛 생각 거적을 훌렁 벗어 던지고 한 번 가보시지요. 홀가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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