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아픔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의 시집
프리모 레비 지음, 이산하 엮음 / 노마드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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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ndela's Way>>라는 책에 이런 내용의 말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행한 선만큼 선하지 않다."   

이 말을 저는 이렇게 바꿉니다.   

"어떤 시인도 자신이 쓴 시만큼 아름답지 않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적어도 프리모 레비만큼은 이 진실에 날카로운 틈을 냅니다.  

2. 시집을 펴기 전!
표지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면.......
저 철저한 눈빛, 뭔가?
얼굴과 시선이 절묘하게 어긋나 있고,
그 눈은 응시와 응시를 벗어난 가녘에 칼 같은 중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아마도,  
그가 이런 시선을 유지한 채 죽음으로 걸어들어 갔을 것이라고 느낍니다. 

편역자는 그의 허무주의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허무주의자로 죽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그는초월하지도 않습니다.
뭇 시인의 운명인, 저 초월을,
그는끝내 거부합니다.
그의 시, 그의 삶은 단 한 순간도 인간의 지평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니, 그는 내려갑니다! 

<수레바퀴>의 마지막 네 줄. 

이젠 내려가야 할 때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 세월의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침묵해야 할 시간이다. 

그렇습니다.  
그 침묵의 절창, <석양>을 보십시오. 

그 어떤 것도 억지로 꿈꾸지 않았고 
그 어떤 것에도 애써 매달리지 않았네. 
거센 폭풍의 바다를 헤치고 나와 
항구의 선술집 난로 옆에 앉아 
홀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런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여라. 

축제 뒤의 사그라져가는 불씨처럼
저물어가는 강가의 모래알처럼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은 채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조용히 길모퉁이에 앉아 쉬고 있는
그런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여라.
욕망도 집착도 모두 내려놓고
말없이 저무는 석양만 응시하네. 


그 응시하는 눈은 웅숭깊은 질문으로 젖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 질문으로 그는 죽었습니다.
이 죽음으로 그가 택한 것은 허무 아닌 침묵의 응시입니다.  

글로 할 수 없는 증언을 위해 몸을 벗어난 것입니다. 

3. <게달레 대장>에 세 번 반복되는 후렴이자 마지막 연,
이를 그대 가슴에 안기면서
프리모 레비를 간곡히 권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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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0장 본문입니다.  

 

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 上律天時 下襲水土. 辟如天地之無不持載 無不覆도(巾壽*). 辟如四時之錯行 如日月之代明. 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小德川流 大德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 (*수건 건 에 목숨 수를 붙인 덮어 가린다는 뜻의 '도' 자인데 인터넷 사전에서 찾지 못해 이렇게 해 놓았습니다.^^)  

 

공자께서는 요 임금과 순 임금을 으뜸으로 계승하시고 문왕과 무왕을 본받아서 (그 법도를) 밝히셨으며 위로는 천시를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물과 흙의 상황에 맞추시었다. 비유하면 하늘과 땅이 붙들어 실어주지 아니함이 없고 덮어서 감싸주지 아니함이 없음과 같다. 비유하면 사계절이 번갈아 운행됨과 같고 해와 달이 번갈아 밝아지는 것과 같다. 만물은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고 도는 함께 행하여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작은 덕은 냇물처럼 흐르지만 큰 덕은 일시에 변화시킨다. 이것이 천지가 위대하게 되는 까닭이다.  

 

2. 공자의 중용은 사람의 실천과 자연의 운행을 두루 이치로 삼습니다. 사람의 실천에서 나타나는 도덕성과 창조성, 자연의 운행에서 나타나는 법칙성과 풍요성을 통합하는 혜안이 있었던 것이지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는 혜안은 크게 두 갈래의 통찰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인 맥락을 따라  그 변화의 결을 감지하는  통찰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 변화에는 반드시 특이점이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전후의 맥을 짚을 수 있다면 과거의 반성, 오늘의 성찰, 내일의 전망이 모두 가능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인 지평을 한눈에 보고 분석, 종합하는 통찰입니다. 변화를 견디는 구조와 그 역학관계를 알아차림으로써 현안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내는  조정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결국 시공간적 대칭 또는 모순을 역설적으로 공존시키는  능력입니다. 변화와 지속, 역사와 사회, 개체와 전체, 문명과 자연, 정의와 사랑, 자유와 평등, 결속과 대립...그 요동치는 경계에서 영예로움으로 남을 수 있는 선택을 하는 능력! 바로 이것이 중용이고, 공자의 실천입니다.  

 

3. 그 역설적 공존 능력을 본문은 우선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은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생명은 제각각 최대한 살기 위해 애씁니다. 그 과정에서 남을 해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칩니다. 우리 인간만 보더라도 목하 그렇게들 살고 있습니다. 금융자본이 세계를 제압한 현 신자유주의 체제는 가혹한 약육강식, 승자독식을 본령으로 합니다.  더군다나 그 세계체제의 주변부에 속한 이 나라는 이중, 삼중의 억압구조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올바르고 현명한 정치, 즉 중용 정치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헤게모니 블럭은 오히려 그렇게 중첩된 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축적하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양극화가 극으로 치달아가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서로 사소한 이익을 놓고 막가는 싸움을 싸우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래야 편하게 통치할 수 있기에 그리 하는 것일 테지만 반드시 그 편함은 부메랑으로 돌아와 등을 찍을 것입니다.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죽이려 하지만 자신만 살아 남아서는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모르고 있으니 이 아니 비극입니까. 남을 일으켜야 자신도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 아득하기만 하군요. 생명의 공존, 더 나아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일은 평등한 상호 소통을 전제로 합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 땅의 어진 백성은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제발 바라건대 그 뜻을 으뜸으로 계승하고(祖述), 본받아서 밝혀(憲章)주기를.......   

 

4. 그 다음엔 이렇게 말합니다.   

 

"도는 함께 행하여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방법(道)은 많이 다릅니다. 아니 대립합니다, 그것도 격렬하게. 국가 중대 현안 문제에 대하여 막무가내 들이미는 검증 안 된 정부 자료를 보고 날카롭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나라 백성이냐며 빨갱이로 모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이념의 차이든, 종교의 차이든, 단순한 정보의 차이든 이 정도의 난센스적 균열은 헤게모니 블럭이 충분히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이간질 하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견해를 상호 인정하고,  견디고, 기다리는 너그러움을 이끌어야 할 자들이 먼저 나서서 독선과 배타를 구가하다가 도리어 백성들이 편협하다며 뒷 삽질을 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드러내는 탈중심적이고 자유로운 의사 교환, 지식 공유의 전체 모습은 외면한 채  구석에 박힌 사소한 에피소드를 들춰내서 크게 떠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절함으로 똘똘 뭉친 인간집단의 진면목이 이렇구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밀고 당기면서도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본디 생명 속에 깃든 길항관계들입니다. 마주서 있다고 해서 다 적인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합니다. 풍부할수록, 두터울수록 좋습니다. 중용 정치란 바로 이 풍요와 후덕을 빚어가는 일 아닐까요?    

 

5. 지난 촛불 정국 이후 우리사회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포퓰리즘"이란 게 있습니다. 이문열이든 오세훈이든 헤게모니 블럭에 속한 자들의 어감은 한마디로 저급한 악마들의 음모적 소란 정도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근거를 둘러대보아도, 일시에 되게 하는(敦化) 백성의 큰 덕을 불에 덴듯 알아차렸기 때문에 생긴 불쾌감을 드러내는 작태일 뿐입니다. 소수 엘리트가 조작하고 통제함으로써 명품 시혜 체계를 만들어 길이 즐기는(川流) 일에 반하기 때문에 갖는 거부감일 따름입니다.  

 

허나 봄기운이 만물을 일제히 소생시키듯 상호소통으로 공유하게 된 백성의 생명감각은  어! 하는 사이에 새 세상을 일으킵니다. 그게 대덕(大德)이 아니라면 21세기에 우리가 앉아서 요순(堯舜)과 문무(文武)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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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9장 본문입니다.  

 

王天下有三重焉其寡過矣乎. 上焉者雖善無徵無徵不信不信民弗從. 下焉者雖善不尊不尊不信不信民弗從. 故君子之道本諸身徵諸庶民考諸三王而不繆建諸天地而不悖質諸鬼神而無疑百世以俟聖人而不惑質諸鬼神而無疑知天也百世以俟聖人而不惑知人也. 是故君子動而世爲天下道行而世爲天下法言而世爲天下則遠之則有望近之則不厭. 詩曰在彼無惡在此無射庶幾夙也以永終譽. 君子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者也.  

 

천하에 왕 노릇하는 데 세 가지 중요한 것을 갖추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옛 시대의 것은 비록 좋다고 하더라도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나중 시대의 것은 비록 좋을지라도 높여지지 아니하니 높여지지 아니하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자신의 몸에서 근본을 삼고 여러 백성에게 징험하는 것이니 이는 삼왕(三王)에게 상고하여 보아도 그릇되지 아니하고 천지에 세워 보아도 어긋나지 않으며 귀신에게 물어 보아도 의심스러움이 없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이고 백세를 지나 성인을 기다려서 따져 보아도 의혹스럽지 아니한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움직이면 대대로 천하의 도리가 되는 것이니 행하면 대대로 천하의 법도가 되고 말하면 대대로 천하의 준칙이 된다. 멀리 있으면 우러러 보게 되고 가까이 있으면 싫어하지 않는다. <시경>에 이르기를 "저쪽에서도 미워함이 없고 이쪽에서도 싫어함이 없다. 바라건대 밤낮으로 힘써서 길이 명예로움을 마치도록"이라 했다. 군자가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 일찍이 명예로움을 천하에 가지게 된 일은 없다.  

 

2. 법이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은 없습니다. 그 시대, 사회 상황에 맞는 것을 만들어 쓸 뿐입니다. 오래 된 것이라고 해서 성인의 작품 운운하며 신비화할 일도 없고 오늘날 상황에 꼭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미비점은 늘 있기 마련이므로 절대화할 일도 없습니다.   

 

문제는 백성의 법 감정입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하더라도 백성의 직관과 생명감각을 무시하고서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합리성이든 과학성이든 결국은 사람의 판단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서 권력자들은 이성과 논리, 그리고 전문지식을 동원하여 백성을 제압하려 하지만 백성은 감성과 직관, 그리고 생명감각을 통해 역동적으로 반응합니다.   

 

최근 튀니지를 출발점으로 하여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는 백성의 맨주먹 혁명이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신병적 수준에서 백성을 학살하는 카다피는 물론 그 이전의 독재자들 모두 백성을 업신여기고 오직 지배 대상으로만 여기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금의 상황을 보고 우리나라 수구언론은 자신들이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지금도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떠들어대고 있지만 불과 3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그 여파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 옵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촛불정국' 문제의 본질은 지배블록이 백성의 감성과 직관, 그리고 생명감각을 이른바 과학성이 결여된 낮은 눈높이로 폄하한 데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과학은 미국 측 일부, 즉 쇠고기 수출을 어떻게 해서든 관철시키려는 세력과 그들보다 더 혈안이 된 한국 종미(從米) 집단의 과학일 뿐이었습니다. 설혹 공정한 제삼자의 견해라 하더라도 광우병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확립된 주장 단 한마디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백성의 판단 기준은 순간순간을 살아내야 하는 자연적 생명주체가 지닌 몸 감각 이외에 달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배블록은 그것을 괴담과 선동에 휩쓸린  어리석음으로 멸시했습니다. 백 보 천 보를 양보해서 정말 백성 눈높이가 그렇게 형편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주권자인데 누가 누구를 제압한다는 것입니까? 그 당시 조갑제란 자는 "백성에게 항복할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결국 그리 되어서 그 자는 만족했을 테지요. 지금 리비아의 카다피한테 그 말을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백성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3. 중용의 정치는 군자의 몸, 즉 실천의 진정성을 점검함에서 출발합니다(本諸身). 자신의 실천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생략한 채 백성을 훈계하려고만 드는 권력자를 군자라고 할 수 도 없고 그의 정치를 중용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부도덕한 지배블록은 독선을 진리로 믿고 거침없이 내달립니다. 도무지 자기성찰을 모르는 자, 카다피나 베를루스코니만이 아닙니다.  

 

군자란 실천의 진정성을 돌아본 다음 겸허하게 백성과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존재입니다(徵諸庶民). 평등한 쌍방향 소통으로 이룩되는 "평범한 선"이 바로 중용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부도덕한 지배블록은 소통을 홍보와 설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백성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중심"에 있다는 뜻입니다. 백성을 "주변"으로 취급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과연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일까요?  

 

4. 천하에 실체, 즉 명사로 존재하는 도리(道), 법규(法), 준칙(則)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군자의 실천, 즉 동사적 사건으로만 드러납니다. 실체는 관념이고 의식입니다. 실천은 몸이고 감각입니다. 중용은 결코 관념과 의식이 아닙니다. 중용은 한사코 몸이며 실천입니다. 人能弘道非道弘人(동사적 실천이 명사적 실체를 담보하는 것이지 명사적 실체가 동사적 실천을 담보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속이 꽉 들어찬 중용은 온 백성의 것입니다(遠之則有望近之則不厭). 백성은 다만 적용 대상으로 사물화될 수 없습니다. 중용의 주체로 존중될 때 백성은 스스로 적용해 갈 것입니다. 무능한 대의정치가 거리의 백성에게 뺨 맞는 꼴을 보면서도 제도 정치만을 두둔했던 책상물림의 한심한 작태들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5. 지구상의 모든 권력이 백성과 더불어 "길이 영예로움으로 마칠 수 있기를(以永終譽)" 바랍니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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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지음 / 바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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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 코너로 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다음엔 인문 신간, 그 다음엔 사회 신간, 그리고 철학과 종교를 돌아 마지막으로 한의학, 대략 이런 순서지요. 한의사인데 거꾸로 됐나요?^^   

강남 영풍 시 코너에서 엊그제 이 시집을 보았습니다. 그 동안 분명히 있었을 텐데 제 눈에 이제서야 들어온 것일 테지요. 사실 특히나 시집은 시절인연이 확실히 있는 모양입니다. 남들 다 알고 있는데 혼자만 뒤늦게 살 떨려 하는 게 시에서는 그닥 허물이 안 되는 듯하니 말입니다. 

2. 이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받은 느낌은, 마치 운전 한 몇 년 하면 자신이 운전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운전하게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극적으로 말하면 남의 시가 아닌 내 시를 오랜만에 다시 읽는 것처럼, 어떤 일치감에 실려 흐르듯 읽었다고나 할까....... 아니 좀 더 팽창시킨다면, 팽창시켜서 사실은 좀 더 정확한 표현인데, 하염없이 읽었다는 게 맞습니다.  

보통 남의 시를 읽으면 문 앞에 서기만 해도 스르륵 열리는 경우는 거의 없고, 좀 두드리면 안으로 활짝 열리면서 주인장이 웃음을 띠며 맞아주거나, 드물게는 와락 달려들 듯 밖으로 열리며 꿰뚫고 들어오지요. 그런데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의 경우는 그냥 처음부터 문이 열려 있었다거나, 아예 문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십 편을 그렇게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 이 시인이 나와 같은 묶이의 사람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답으로 떠올랐습니다. 모국어를 통해 드러내는 삶과 세상에 대한 태도, 또는 자세가 같은 게 아닐까?,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수많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턴가 저는 스스로 식물성 인간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식물적 생명감각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식물에 대한 감수성, 친연성이 남다릅니다. 가령 한의원 개원할 때 축하용으로 받은 난을 비롯한 여러 식물들, 대개 일 년 이내에 죽지요. 제 경우는 오년 지난 아직도 살아 있는 난이 있습니다. 단순히 관리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식물적이어서 제 곁의 식물들과 함께 생명력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싶습니다.  

식물적 생명력의 본령은 "받아들임"입니다. 한 번 뿌리내린 곳에서 그 생을 마쳐야 하므로 삶의 온갖 조건, 이른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동물은 조건을 박차고 옮겨 가면 그만입니다. 식물은 그럴 수 없지요.  

시집의 제목이 된 시에서 시인은 그 "받아들임"의 흐름을 참으로 물처럼 유장하게 풀어냅니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 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채워넣고 

떠나라.

 

밑줄 그은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시가 됩니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 말고 다른 것을 넣어도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핵심 내용인 그 부분을 제외했습니다. 가령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의 마지막 네 행, 

 

....... 

마음속에  한 여자 살고 있네. 

바람이 세차도 날려가지 않는 여자 

그 여자의 마음속에  

나는 없네.   

 

이 처절한 사실도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섭섭함 버리고 생각해보고, 중얼거려보고, 사랑하고, 길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텅 빈 수숫대처럼 온 몸에 바람소릴 채워 넣고 떠나야 합니다. 물론 수숫대는 바람소릴 채울 뿐 떠나진 못하지요. 사람이기에, 사람한테니까 그리 말한 것입니다. 이 떠남은 바람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받아들임"의 절정 아니던가요. 

3. 식물의 생명력은 이렇듯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받아들임"은 속성상 가림이 없습니다. 겨울도 받아들여야 하고 여름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가림 없이 받아들이면 그 생명은 모순으로 차고 넘칩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정확하고도 풍요롭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모순의 공존, 저 도저한 역설의 삶으로 나아가는 자재함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예요, 여기예요, 손짓한 적 있씁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또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아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사랑은 기다림만큼 더디 오는 법 

다시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갑니다.   

 

기다릴수록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다시 기다림의 삶으로 나아가는 이것. 인생의 비대칭적 대칭.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무애(無碍). 시인은 마침내 식물적 생명감각을 완성합니다. "받아들임"이 공중제비 돌아 "꿰뚫음"과 만나는 뫼비우스 공간, 바로 그 푸른 지평선을 열어제친 것이지요.  

4. 그 경계적 성취는 제게 이런 문학적 풍경화를 건네줍니다. 김재진은 정호승과 마종기의 경계다! 정호승은 수직으로 솟구치고 마종기는 수평에서 떠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김재진은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는 길어도 대부분 연 구분이 없습니다. '설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재진의 생명감각이 그런 것이지요. 길어져도, 심지어 통속적으로 반복해도, 늘어진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반대로 선문답 같이 칼에 베이듯 툭! 떨어지는 말도 's라인'을 그리지 않습니다. 산문과 운문이 서로 누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제가 하염없이 읽어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일은 그의 산문을 읽어보아야겠군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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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스 웨이 - 넬슨 만델라의 삶, 사랑, 용기에 대한 15개의 길
리처드 스텐절 지음, 박영록 옮김, 넬슨 만델라 서문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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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가 누구한테 소개 받았다며 사다 달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다 읽은 뒤 별다른 말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독서 흐름에 약간의 공백이 생겨 그 틈을 메우려고 우연히 집어들었습니다. 

목차를 일별하다가 열 네번째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부분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무슨 내용이 들어있을지 짐작하면서 거기부터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인전이든 회고록이든 남 이야기 잘 안 읽는 제 습관에서 보면 비교적 신속한 결단(!)이었습니다.   

2. 그러나 정작 큰 울림을 느낀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용기를 다룬 제1장 내용과 이미지를 다룬 제5장입니다. 제게는 이 두 장이 한 흐름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용감한 척하면 용감해진다."는 말과 "겉모습은 실체를 구성한다."는 말이 같은 내용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제1장에서 만델라가 "두려운 게 없다고 해서 용기가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세심히 살피지 않으면 진의를 모른 채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두려움 없는 상태는 그냥 미분화된 감정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기는 미분화된 감정 차원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뜻이 그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용기는 마음에 두려움을 지닌 상태에서 몸으로 그 두려움을 떨쳐내는 결단을 요구하는 무엇입니다. "누군가는 용감한 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 말이 근거가 됩니다. 그 필요를 알아차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용기라는 사건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결국 용기는  누군가 지니고 있는 덕목으로서 명사적 존재가 아니라 찰나찰나 결단을 통해 발휘되는  동사적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용감한 척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위선을 떠는 행위가 아니고, 애써 결단을 내리는, 그래서, 분화된, 이성과 의지까지 알아차리는 '고급한 감정' 차원의 행위입니다.  

바로 이런 행위, 즉 "겉모습"이 두려움을 밀어내는 용기의 역동적 "실체"를 구성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진실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고 깨닫고 습관으로 만들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말들의 연결이 전혀 무의미한  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3. 저는 개인적으로 타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 자신의 상처와 punctum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인의 슬픔과 요구, 심지어 공격까지 품어 들이는 흡수의 감수성이 지나치게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흡수의 마음은 용기보다는 관용을 요구합니다. 용기는 강인함, 단단함에 방점이 찍히고 관용은 너그러움, 부드러움에 방점이 찍힙니다.  

용기는 관통하는 힘입니다. 바로 이 "관통"이 제 삶의 긴절한 화두가 되기 시작한 최근의 흐름에서 이 책은 조금 더 구체적인, 한 걸음 더 나아간 도움을  제게 주고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끌어내고 품어 들이는 만큼이나 나의 고통을 드러내고 꿰뚫어 나가는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낄 때, 대체 어찌 하면 그리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고뇌하게  되지요. 

만델라의 길에 이정표가 이렇게 붙어 있습니다. 

"관통력 있는 척하라!" 

또는, 

"관통력 있는 겉모습을 갖추라!" 

4. 일단 이것만으로도 제게 이 책은 그야말로 대박입니다. 그밖에도, 게임은 길다, 사랑은 차이를 만든다, 자기 자신만의 텃밭을 가꿔라, 이 부분도 좋았습니다. 누구든 자기 자신만의 상처와 punctum이 있을 테니 그런 채로 이 책 앞에 서면 맞춤한 울림을 맛볼 수 있겠지요.  

5. 사족. 왜 문학동네가 이 책에 <만델라스 웨이>라는 한글 이름을 달았을까, 궁금하네요. 번역자의 뜻일 수도 있긴 하지만. Mandela's Way를 영어로 읽을 수 없는 독자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없는 바에야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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