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30장 본문입니다.  

 

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 上律天時 下襲水土. 辟如天地之無不持載 無不覆도(巾壽*). 辟如四時之錯行 如日月之代明. 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小德川流 大德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 (*수건 건 에 목숨 수를 붙인 덮어 가린다는 뜻의 '도' 자인데 인터넷 사전에서 찾지 못해 이렇게 해 놓았습니다.^^)  

 

공자께서는 요 임금과 순 임금을 으뜸으로 계승하시고 문왕과 무왕을 본받아서 (그 법도를) 밝히셨으며 위로는 천시를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물과 흙의 상황에 맞추시었다. 비유하면 하늘과 땅이 붙들어 실어주지 아니함이 없고 덮어서 감싸주지 아니함이 없음과 같다. 비유하면 사계절이 번갈아 운행됨과 같고 해와 달이 번갈아 밝아지는 것과 같다. 만물은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고 도는 함께 행하여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작은 덕은 냇물처럼 흐르지만 큰 덕은 일시에 변화시킨다. 이것이 천지가 위대하게 되는 까닭이다.  

 

2. 공자의 중용은 사람의 실천과 자연의 운행을 두루 이치로 삼습니다. 사람의 실천에서 나타나는 도덕성과 창조성, 자연의 운행에서 나타나는 법칙성과 풍요성을 통합하는 혜안이 있었던 것이지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는 혜안은 크게 두 갈래의 통찰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인 맥락을 따라  그 변화의 결을 감지하는  통찰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 변화에는 반드시 특이점이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전후의 맥을 짚을 수 있다면 과거의 반성, 오늘의 성찰, 내일의 전망이 모두 가능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인 지평을 한눈에 보고 분석, 종합하는 통찰입니다. 변화를 견디는 구조와 그 역학관계를 알아차림으로써 현안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내는  조정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결국 시공간적 대칭 또는 모순을 역설적으로 공존시키는  능력입니다. 변화와 지속, 역사와 사회, 개체와 전체, 문명과 자연, 정의와 사랑, 자유와 평등, 결속과 대립...그 요동치는 경계에서 영예로움으로 남을 수 있는 선택을 하는 능력! 바로 이것이 중용이고, 공자의 실천입니다.  

 

3. 그 역설적 공존 능력을 본문은 우선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은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생명은 제각각 최대한 살기 위해 애씁니다. 그 과정에서 남을 해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칩니다. 우리 인간만 보더라도 목하 그렇게들 살고 있습니다. 금융자본이 세계를 제압한 현 신자유주의 체제는 가혹한 약육강식, 승자독식을 본령으로 합니다.  더군다나 그 세계체제의 주변부에 속한 이 나라는 이중, 삼중의 억압구조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올바르고 현명한 정치, 즉 중용 정치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헤게모니 블럭은 오히려 그렇게 중첩된 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축적하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양극화가 극으로 치달아가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서로 사소한 이익을 놓고 막가는 싸움을 싸우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래야 편하게 통치할 수 있기에 그리 하는 것일 테지만 반드시 그 편함은 부메랑으로 돌아와 등을 찍을 것입니다.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죽이려 하지만 자신만 살아 남아서는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모르고 있으니 이 아니 비극입니까. 남을 일으켜야 자신도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 아득하기만 하군요. 생명의 공존, 더 나아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일은 평등한 상호 소통을 전제로 합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 땅의 어진 백성은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제발 바라건대 그 뜻을 으뜸으로 계승하고(祖述), 본받아서 밝혀(憲章)주기를.......   

 

4. 그 다음엔 이렇게 말합니다.   

 

"도는 함께 행하여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방법(道)은 많이 다릅니다. 아니 대립합니다, 그것도 격렬하게. 국가 중대 현안 문제에 대하여 막무가내 들이미는 검증 안 된 정부 자료를 보고 날카롭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나라 백성이냐며 빨갱이로 모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이념의 차이든, 종교의 차이든, 단순한 정보의 차이든 이 정도의 난센스적 균열은 헤게모니 블럭이 충분히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이간질 하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견해를 상호 인정하고,  견디고, 기다리는 너그러움을 이끌어야 할 자들이 먼저 나서서 독선과 배타를 구가하다가 도리어 백성들이 편협하다며 뒷 삽질을 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드러내는 탈중심적이고 자유로운 의사 교환, 지식 공유의 전체 모습은 외면한 채  구석에 박힌 사소한 에피소드를 들춰내서 크게 떠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절함으로 똘똘 뭉친 인간집단의 진면목이 이렇구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밀고 당기면서도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본디 생명 속에 깃든 길항관계들입니다. 마주서 있다고 해서 다 적인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합니다. 풍부할수록, 두터울수록 좋습니다. 중용 정치란 바로 이 풍요와 후덕을 빚어가는 일 아닐까요?    

 

5. 지난 촛불 정국 이후 우리사회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포퓰리즘"이란 게 있습니다. 이문열이든 오세훈이든 헤게모니 블럭에 속한 자들의 어감은 한마디로 저급한 악마들의 음모적 소란 정도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근거를 둘러대보아도, 일시에 되게 하는(敦化) 백성의 큰 덕을 불에 덴듯 알아차렸기 때문에 생긴 불쾌감을 드러내는 작태일 뿐입니다. 소수 엘리트가 조작하고 통제함으로써 명품 시혜 체계를 만들어 길이 즐기는(川流) 일에 반하기 때문에 갖는 거부감일 따름입니다.  

 

허나 봄기운이 만물을 일제히 소생시키듯 상호소통으로 공유하게 된 백성의 생명감각은  어! 하는 사이에 새 세상을 일으킵니다. 그게 대덕(大德)이 아니라면 21세기에 우리가 앉아서 요순(堯舜)과 문무(文武)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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