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9장 본문입니다.  

 

王天下有三重焉其寡過矣乎. 上焉者雖善無徵無徵不信不信民弗從. 下焉者雖善不尊不尊不信不信民弗從. 故君子之道本諸身徵諸庶民考諸三王而不繆建諸天地而不悖質諸鬼神而無疑百世以俟聖人而不惑質諸鬼神而無疑知天也百世以俟聖人而不惑知人也. 是故君子動而世爲天下道行而世爲天下法言而世爲天下則遠之則有望近之則不厭. 詩曰在彼無惡在此無射庶幾夙也以永終譽. 君子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者也.  

 

천하에 왕 노릇하는 데 세 가지 중요한 것을 갖추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옛 시대의 것은 비록 좋다고 하더라도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나중 시대의 것은 비록 좋을지라도 높여지지 아니하니 높여지지 아니하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자신의 몸에서 근본을 삼고 여러 백성에게 징험하는 것이니 이는 삼왕(三王)에게 상고하여 보아도 그릇되지 아니하고 천지에 세워 보아도 어긋나지 않으며 귀신에게 물어 보아도 의심스러움이 없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이고 백세를 지나 성인을 기다려서 따져 보아도 의혹스럽지 아니한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움직이면 대대로 천하의 도리가 되는 것이니 행하면 대대로 천하의 법도가 되고 말하면 대대로 천하의 준칙이 된다. 멀리 있으면 우러러 보게 되고 가까이 있으면 싫어하지 않는다. <시경>에 이르기를 "저쪽에서도 미워함이 없고 이쪽에서도 싫어함이 없다. 바라건대 밤낮으로 힘써서 길이 명예로움을 마치도록"이라 했다. 군자가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 일찍이 명예로움을 천하에 가지게 된 일은 없다.  

 

2. 법이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은 없습니다. 그 시대, 사회 상황에 맞는 것을 만들어 쓸 뿐입니다. 오래 된 것이라고 해서 성인의 작품 운운하며 신비화할 일도 없고 오늘날 상황에 꼭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미비점은 늘 있기 마련이므로 절대화할 일도 없습니다.   

 

문제는 백성의 법 감정입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하더라도 백성의 직관과 생명감각을 무시하고서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합리성이든 과학성이든 결국은 사람의 판단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서 권력자들은 이성과 논리, 그리고 전문지식을 동원하여 백성을 제압하려 하지만 백성은 감성과 직관, 그리고 생명감각을 통해 역동적으로 반응합니다.   

 

최근 튀니지를 출발점으로 하여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는 백성의 맨주먹 혁명이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신병적 수준에서 백성을 학살하는 카다피는 물론 그 이전의 독재자들 모두 백성을 업신여기고 오직 지배 대상으로만 여기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금의 상황을 보고 우리나라 수구언론은 자신들이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지금도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떠들어대고 있지만 불과 3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그 여파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 옵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촛불정국' 문제의 본질은 지배블록이 백성의 감성과 직관, 그리고 생명감각을 이른바 과학성이 결여된 낮은 눈높이로 폄하한 데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과학은 미국 측 일부, 즉 쇠고기 수출을 어떻게 해서든 관철시키려는 세력과 그들보다 더 혈안이 된 한국 종미(從米) 집단의 과학일 뿐이었습니다. 설혹 공정한 제삼자의 견해라 하더라도 광우병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확립된 주장 단 한마디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백성의 판단 기준은 순간순간을 살아내야 하는 자연적 생명주체가 지닌 몸 감각 이외에 달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배블록은 그것을 괴담과 선동에 휩쓸린  어리석음으로 멸시했습니다. 백 보 천 보를 양보해서 정말 백성 눈높이가 그렇게 형편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주권자인데 누가 누구를 제압한다는 것입니까? 그 당시 조갑제란 자는 "백성에게 항복할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결국 그리 되어서 그 자는 만족했을 테지요. 지금 리비아의 카다피한테 그 말을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백성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3. 중용의 정치는 군자의 몸, 즉 실천의 진정성을 점검함에서 출발합니다(本諸身). 자신의 실천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생략한 채 백성을 훈계하려고만 드는 권력자를 군자라고 할 수 도 없고 그의 정치를 중용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부도덕한 지배블록은 독선을 진리로 믿고 거침없이 내달립니다. 도무지 자기성찰을 모르는 자, 카다피나 베를루스코니만이 아닙니다.  

 

군자란 실천의 진정성을 돌아본 다음 겸허하게 백성과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존재입니다(徵諸庶民). 평등한 쌍방향 소통으로 이룩되는 "평범한 선"이 바로 중용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부도덕한 지배블록은 소통을 홍보와 설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백성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중심"에 있다는 뜻입니다. 백성을 "주변"으로 취급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과연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일까요?  

 

4. 천하에 실체, 즉 명사로 존재하는 도리(道), 법규(法), 준칙(則)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군자의 실천, 즉 동사적 사건으로만 드러납니다. 실체는 관념이고 의식입니다. 실천은 몸이고 감각입니다. 중용은 결코 관념과 의식이 아닙니다. 중용은 한사코 몸이며 실천입니다. 人能弘道非道弘人(동사적 실천이 명사적 실체를 담보하는 것이지 명사적 실체가 동사적 실천을 담보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속이 꽉 들어찬 중용은 온 백성의 것입니다(遠之則有望近之則不厭). 백성은 다만 적용 대상으로 사물화될 수 없습니다. 중용의 주체로 존중될 때 백성은 스스로 적용해 갈 것입니다. 무능한 대의정치가 거리의 백성에게 뺨 맞는 꼴을 보면서도 제도 정치만을 두둔했던 책상물림의 한심한 작태들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5. 지구상의 모든 권력이 백성과 더불어 "길이 영예로움으로 마칠 수 있기를(以永終譽)" 바랍니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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