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식민지 시대 준동했던 특권층 부역자들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 어떻게 가족, 친인척, 나아가 더 큰 패거리로 번성해 갔으며, 그 인맥 간 합종연횡, 그리고 일본 지원으로 사회 각 분야를 어떻게 석권했는가, 하는 역사 이야기를 지금 내가 원하는 수준만큼은 할 수 없다. 슬프고 아픈 현실이다. 그러나, 아니 그럴수록, 전경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체계는 마련되지 않았더라도 이미 나와 있는 각각 정보를 정리해 공유하는 일이 절실하다.

 

자료들을 통해 특권층 부역 집단 실체가 상상 이상으로 전방위·전천후 거대 괴물임을 확인했을 때 나는 가슴을 치며 울었다. 우리 공동체가 어찌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가 있었을까. 아니. 이 정도면 벌써 공동체라고 말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그동안 지엽적으로 피상적으로 비판하고 조롱하는 일에 갇혀 긴 세월을 허비한 자신이 용서되지 않는다. 알량한 글쓰기로나마 참회와 공부 앞에 무릎 꿇어야겠다.

 

오래된 경험담 하나에서 시작한다. 1988년이라고 기억한다. 인사동 한 카페에서 작은 공부 모임을 끝낸 뒤 술 한잔하고 있었다. 주인장이 합석해도 되느냐 물으면서 젊은 여자 사람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그는 초면임에도 자기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내용인즉: 나는 모그룹 창업자 손녀다. 방금 제주도에서 올라왔다. 제주도는 매년 한 번씩 큰 모임이 있어서 간다. 그 모임은 정·재계 VIP 2·3세들 400여 명으로 이루어진다. ·야 구분 없다. 이를테면 공개 미팅 비슷하다. 혼맥을 형성하는 교두보인 셈이다.

 

카페 주인장을 포함해 모두가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고 매우 놀랐다. 이야기가 자유롭게 이리저리 흘러가다가 내가 검사 아무개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취한 상태인데도 안색이 변하더니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중에 카페 주인장한테 단골손님이었는데 그 뒤로는 발길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술 취해 발그스레하던 그 얼굴과 비틀거리며 사라지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은 이름 석 자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뜨르르한 저명인사다.

 

젊은 날 나는 그 이야기를 그리 오래 의식 표면에 남겨두지 않았다. 지배층이 다 그렇지 뭐, 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요사이 특권층 부역 집단 속살을 들여다보면서 받은 충격이 아마도 그 기억을 깨운 듯하다. 그 기억에서 두 가지 질문을 꺼낸다: 특권층 부역자 후손은 대한민국에서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혼맥으로 얽히고설켜 대한민국을 부역 제후국으로 만들고 있는가? 앞 질문에 대한 답은 자발적 한량이라는 필명으로 <토털로그>를 운영하는 분이 2015년에 조사해 밝힌 자료를 그대로 인용해 올린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김연수

호남지방 대지주로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 기업인. 삼양그룹 창업주. 1961년 전경련 전신인 전경협 회장 역임.

-자 김상준 (삼양염업 명예회장)

-자 김상협 (16대 국무총리)

-자 김상홍 (삼양사 명예회장)

-자 김상하 (삼양사 회장)

-손자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손자 김량 (삼양홀딩스 부회장)

-손자 김원 (삼양사 부회장)

-손자 김정 (삼양사 사장)

 

김성수

김연수의 형. 2대 부통령. 일제강점기 말 친일로 변질, 친일 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과 이사를 지냄. 그 외에도 국방헌금을 헌납하고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한 전력 있음.

-자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자 김 남 (윤보선 대통령 비서)

-자 김상흠 (민정당 국회의원)

-자 김상종 (우진토건 회장)

-손자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한국신문협회 회장)

-손자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

-증손 김재호 (동아일보 회장, 채널A 회장,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문명기

제지업, 수산업, 금광개발로 부 축적.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를 조직, 막대한 양의 국방헌금 납부, 중추원 참의 역임.

-손자 문태준 (7~10대 국회의원, 대한의사협회 회장, 보건복지부 장관)

 

민병석

경술국적. 한일합병 공로로 자작 작위 받음. 총독부 중추원 고문 다섯 차례 역임. 이완용과 처내종 간이자 절친한 친구.

-자 민홍기 (자작 작위 승계)

-자 민복기 (일제 사법부 근무,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손자 민경성 (유니콘재팬 사장)

-손자 민경택 (서울지법 판사, 서울지검 검사)

-손자 민경삼 (한합산업(현 심팩 에이앤씨) 사장)

 

민영휘

명성황후의 먼 친척. 한일합병을 지지하여 자작 작위를 받고 매국공채 5만 원을 사들임. 조선 최대 갑부 반열에 오른 권력형 부정 축재가.

-손자 민병도 (그랜드하얏트호텔 회장, 휘문고교 이사장, 제일은행 총재, 한국은행 총재, 현대미술관 회장, 남이섬 설립자)

-증손자 민덕기 (풍문여고 설립)

-증손자 민인기 (휘문고교 이사장)

-증손자 민웅기 (남이섬 소유)

-고손자 민경현 (풍문여고 이사장)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졸업, 만주군 장교로 근무.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 유신독재.

-녀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

-녀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

-자 박지만 (EG회장)

 

박제순

을사오적. 한일합병 공로로 자작 작위 받음. 중추원 고문 역임.

-자 박부양 (중추원 서기관)

-손자 박승유 (독립운동가, 강원대 음대 성악과 교수)

 

송병준

을사오적. 일진회 총재. 한일합병 공로로 백작 작위 받음.

-자 송종헌 (작위 및 재산 승계, 중추원 참의, 조선농업주식회사 설립)

-서 구연수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 안내 및 명성황후 시체 소각 감독. 중추원 참의)

-손자 송재구 (홋카이도에서 조선목장 경영)

-외손자 구용서 (한국은행 초대 총재, 대한석탄공사 총재, 상공부 장관)

-증손자 송돈호 (역삼동 건설회사 운영, 송병준 명의 토지 상속소송 주도. 사기 혐의로 구속. 친일 재산 특별법 위헌소송 냈으나 기각)

 

이근택

을사오적. 형 이근호, 동생 이근상 등 총 6명의 일제 귀족을 배출한 대표적 친일 집안.

자 이창훈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조선귀족회 이사)

증손자 이상우 (전 공주대 총장)

증손자 이춘우 (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2005년까지 선대의 친일 재산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총 9건의 소송)

 

이명세

일제강점기 기업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 경학원(성균관) 사성.

-손녀 이인호 (고려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주핀란드 대사, 주러시아 대사, KBS 이사장)

 

이병무

정미칠적. 해산된 군대가 일으킨 의병 진압. 한일합병 공로로 자작 작위 수여 받음.

-자 이홍묵 (자작 작위 승계)

-증손자 이진 (12대 국회의원, 국무총리 비서실장, 환경부 차관, 공주영상정보대학 학장, 웅진그룹 부회장)

 

이완용

을사오적. 한일합병 공로로 백작 작위 및 은사금 15만 원 하사.

-자 이항구 (이왕직 장관)

-손자 이병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한국 전쟁 중 실종)

-손자 이병주 (1962년 일본 밀항, 일본 정부가 귀화시키고 환대)

-증손자 이윤형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 땅찾기 소송 승소)

-증손자 이석형 (1979년 이완용 부부 묘를 파내어 화장)

 

이해승

조선 왕족 종친. 한일합병 공로로 후작 작위 및 매국공채 162천 원 받음.

-손자 이우영 (그랜드 힐튼 서울 호텔 회장, 동원INC 회장)

 

최남선

3.1 운동 후 변절. 어용단체 조선사편수회 참여. 중추원 참의.

-자 최한웅 (서울대 의대 소아감염학 권위자)

-손자 최국주 (피부과 전문의)

-손자 최득주 (경기대 경영학부 교수)

 

최준집

강릉 갑부. 중추원 참의 역임. 37년 중일전쟁 발발하자 회갑연 취소 후 국방헌금 1,000원 납부.

-자 최돈웅 (8, 14, 16대 국회의원. 2000년 당시 부동산 소유 110. 새누리당 상임고문)

 

현준호

민족주의적 계몽 활동 중 변절, 중추원 참의.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자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

-자 현영국 (고우건업 대표)

-손자 현양래 (현우실업 대표)

-손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증손자 현병철 (한양대학교 교수, 국가인권위원장)

-외증손녀 정지이 (현대 유엔아이 전무)

 

홍진기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김신석의 사위로 일제 판사 재직. 해방 후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역임. 중앙일보 회장 역임.

-녀 홍라희 (중앙일보 상무이사, 호암미술관 관장,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예술의전당 비상임이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자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 전 주미대사)

-자 홍석조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보광훼미리마트 회장, 국립중앙박물관회 부회장, BGF리테일 회장)

-자 홍석준 (삼성 SDI 경영기획실 부사장, 보광창업투자 회장)

-자 홍석규 (보광 회장,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회장)

-녀 홍라영 (삼성문화재단 상무, 삼성미술관 리움 총괄부관장)

 

방응모

일어 상용운동 주창, 일제 찬양 시국 강연 참여,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회원. 조선일보 사주.

-자 방재선 (계초 방응모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부친 방응모 친일 행위에 대한 공식 사과)

-양손자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 아시아신문재단 이사장, 별칭 '밤의 대통령' '밤의 황제')

-양손자 방우영 (연세대학교 이사장, 조선일보 회장)

-양증손자 방상훈 (조선일보 회장, 한국신문협회 회장. 부인은 친일파 윤치호의 증손녀인 윤순명)

-양증손자 방성훈 (스포츠조선 부사장)

-양현손자 방준오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이사대우.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의 장녀 허유정과 혼인)

-양현손자 방정오 (TV조선 상무)

 

이병도

중추원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친일 사학자로 한국 고대사 연구의 권위자.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진단학회 이사장, 국편찬위원회 위원, 문교부 장관 역임. 윤보선 대통령과 사돈 관계.

-자 이기령 (한국생화학회 회장, 서울대학교 의대 교수)

-자 이춘녕 (한국농화학회 회장, 서울대학교 농대 교수)

-자 이태령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명예회장, 서울대학교 사범대 교수)

-자 이동녕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자 이본녕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교 의대 교수)

-서 장욱진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

-서 민헌기 (친일파 민영휘의 증손자이자 풍문여고 설립자 민덕기의 동생. 서울대학교 의대 교수)

-녀 이운경 (이운경내과의원 원장)

-손자 이웅무 (아주대학교 화학과 교수)

-손자 이장무 (산업기술평가원 이사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서울대학교 총장,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손자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용인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한국고고학회장, 문화재청 청장)

 

백붕제

경상북도 군위군수, 경상북도 산업부 이사관 등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 형 백인제와 함께 백병원 설립 후 납북.

-자 백낙환 (백병원·인제대학교 이사장, 서재필기념회 이사장,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회장)

-자 백낙청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개헌 청원 지지 문인 61인 선언 참여, 해직교수협의회 부회장, 창작과비평 발행인,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위원장)

-자 백낙서 (인제대학교 석좌교수)

 

윤치영

윤치호의 사촌 동생. 독립운동가였지만 후에 변절해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 참가, 동양지광사 주최의 미·영 타도 대좌담회 연사로 참가하는 등 친일로 돌아섬. 초대 내무부 장관, 13대 서울특별시장, 1·2·3·7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안중근 의사 숭모회 초대 이사장.

-녀 윤성선 (숙명여대 교수)

-자 윤인선 (서울 백제병원 기획실장, 국회사무처 서기관)

-질 윤보선 (대통령)

-손자 윤인구 (KBS 아나운서)

 

남정철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될 때 조약 체결에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 받음.

-자 남평우 (경남여객 대표, 민자당·신한국당 국회의원)

-손자 남경필 (새누리당 국회의원, 경기도지사)

-손자 남경훈 (경남여객 대표)

 

박승직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 일본의 대기업 이토추상사와의 협업. 두산그룹 창립자.

-자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손자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

-손자 박용오 (두산그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KBO 총재)

-손자 박용성 (한국상업은행 회장,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IOC 위원, 국제상업회의소 회장, 중앙대학교 이사장,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국제유도연맹 회장)

-손자 박용현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장, 대한병원협회 부회장,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전경련 부회장, 서울대학교 이사장, 예술의전당 이사장)

-손자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이화여대 경영대학 겸임교수)

-손자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

 

김순흥

일제강점기 대지주. 각종 국방헌금 헌납, 조선유도연합회 참사.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발기인 참여. 이화여대 이사.

-손녀 이지아 (본명 김상은. 탤런트)

 

이홍규

조선총독부 산하 지방법원에서 검찰 서기로 근무. 해방 이후 광주지검장 역임.

-자 이회창 (대법원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자유선진당 대표)

 

김영한

중추원 찬의.

-녀 김옥숙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일환

만주군 장교. 해방 후 육군 중장 전역. 상공부·내무부·교통부 장관 역임. 한국관광공사 총재, 재향군인회 회장, 한국전력 사장, 한진관광 사장.

-자 김의광 (장원산업 대표이사 사장)

-자 김의덕 (리젠트보험 이사대우)

-자 김의순 (외과 의사)

-녀 김의정 (한양여대 교수)

 

박희준

일본 사법 경찰

-자 박관용 (국회의장)

 

백선엽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중위(생존)

-제 백인엽 (육군 중장. 선인학원 이사장)

 

신상묵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탄압한 유명한 일본군 헌병 오장. 부사관 중 가장 높은 계급인 군조까지 진급. 해방 후 제주도 경찰국장 역임.

-자 신기남(해군대학 교수, 열린우리당 의장,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장지량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만주보민회 활동. 해방 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 주도. 9대 공군참모총장, 10대 국회의원.

-자 장대환(매일경제신문 대표이사 회장)

 

김명수

일본 신문사의 기자와 전무를 지냈고, 귀국 후 10년간 합천 용주면의 물자공출이나 지원병, 정신대 등 인력 동원을 현장에서 처리하는 역할인 면장과 17년간 금융조합장을 지냄. 해방 후 합천을과 부산 동래에서 국회의원을 지냄.

-자 김용균(한나라당 국회의원·변호사)

 

송금선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입해 순회 강연을 다녔고, 조선총독부 방송선전협의회에서 친일 강좌를 하는 한편 조선 귀족 부인들·여성계 친일 인사들과 애국금차회 가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활동. 덕성여대 초대 학장.

-자 박원국 (덕성여대 이사장)

 

박흥식

대표적 기업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군수 업체로서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다. 공장의 인력은 강제 징용된 노동자로 채워졌다. 화신백화점 화신산업 대표. 경희대학교 음대 피아노 교수를 지낸 피아니스트 한인하와 재혼.

-자 박병석 (광신 중··정보산업고 이사장)

-녀 박봉숙 (이화여대 교수)

 

박인덕

인덕대학 설립자. 친일 단체 녹기연맹의 지원을 받음. 자발적 황민화 운동.

-녀 김혜란 (인덕대학교 이사장)

 

윤종화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임명되어 항일 운동을 탄압하는 업무. 조선인 최초 경찰부장.

-자 윤석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민정당 국회의원)

-질 윤광순 (한국투자신탁 사장)

-종손 윤상현 (새누리당 국회의원)

 

현상윤

일제강점기 문학박사. 고려대 총장

-자 현인섭 (이화여대 의대 교수)

-손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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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시적 얼개 김춘추의 저주 이야기에 이어서 누락시킬 수 없는 통시적 서사가 두 가지 더 있다: (1) 미군정 이야기 (2) 식민지 시대 준동했던 특권층 부역자들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 어떻게 가족, 친인척, 나아가 더 큰 패거리로 번성해 갔으며, 그 인맥 간 합종연횡, 그리고 일본 지원으로 사회 각 분야를 어떻게 석권했는가, 하는 역사 이야기. 후자는 어렵다. 모르고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아직 이 문제에 관한 종합적 연구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전문 연구자도 아닌 나로서는 우선 전자에 집중해 살펴볼 수밖에 없다. (여러 출판사가 거절해 원고 상태로 있는 중용 416<34-29: 군자는 명예를 백성의 가슴 속에 둔다> 내용 일부를 그대로 가져옴.)

 

일제가 항복한 직후 미군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을 점령하였습니다. 194597미 육군 태평양사령부 포고 제1는 점령지 내의 입법, 행정, 사법에 걸친 모든 권력을 점령군이 장악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 점령군 사령관이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우리는 그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대한민국을 구원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점령군 수장으로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왜곡한 장본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점령군은 군정 실시를 위해 군정청을 설치하였습니다. 군정청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그대로 유지하는 통치 기조를 짰습니다. 한국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방침을 바꾸어 아베 총독을 해임하고 아놀드 소장을 초대 군정장관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총독부의 종전 기구를 그대로 유지하였음은 물론입니다. 당연히 일본인 고위 관료들을 고문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들은 남한 상황 및 행정 각 분야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군정청에 제공함으로써 군정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군정의 이런 기조는 해방 이후 식민 유제와 부역자 청산을 통해 새로운 독립 국가가 수립되기를 기대하던 한국인의 열망을 무참히 짓밟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군정의 법률체계였습니다. 점령군인 미군의 명령(포고, 명령, 지령)과 군정청 법령은 불가피하다 하겠습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군정이 명시적으로 폐기하지 않은 식민지 법률 모두를 그대로 살려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군정법령 21는 지방의 모든 법규와 관례와 식민지 행정조직의 유지를 명하였고, 조선 총독이 행하던 모든 권한을 군정장관이 행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임시보안령, 보안법, 집회취체령, 조선불온문서임시취체령등 대표적인 악법을 그대로 존속시켰습니다.

 

19463월부터는 군정에 한국인을 본격적으로 참여시켰습니다. 물론 이는 식민지 관료와 우익세력에게 행정 실권을 이양해가는 절차였습니다. 한국인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우는 이른바 신식민지 통치는 이렇게 철저히 일제 식민지 체제와 부역 세력을 근간으로 하여 기조를 잡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독립 국가의 물리적 토대가 되는 군대와 경찰 창설 문제입니다. 미군정은 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 설치령을 공포하면서 좌익 성향이 강한 국군준비대 해체를 명령했습니다. 이후 자발적으로 생겨났던 군대 조직을 통폐합하면서 만주군·일본군 사관·부사관 출신과 우익을 중심으로 국군 조직을 형성했습니다.

 

경찰은 창설이 아니라 식민지 경찰 복원이었습니다. 조직에서도 식민지의 중앙집권적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인력에서도 식민지 경찰 관료를 핵심에 채워 넣었습니다. 경위 이상 고위직의 경우 식민지 경찰 경력자 비율이 80%를 넘었습니다.

 

결국 이런 기반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부도덕하고 불의한 정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을 팔아먹었던 왕족·노론과 식민지 신흥 부역 세력은 그 어떤 단죄도 받지 않고 승승장구했습니다. 여론에 떠밀려 만들어진 반민특위도 사실상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식민지 35년 동안 일제의 마름 노릇을 하며 호의호식했던 자들 가운데 오직 2명만이 공식적으로 처벌받았다고 합니다. 5년의 나치 점령 기간을 겪은 프랑스와 비교해보십시오. 드골 정부는 99만여 명의 나치 협력자를 투옥하고 이들 중 5,700여 명은 사형, 2,700여 명은 종신 강제노동, 22,800명은 징역, 1만여 명에게는 유기한 강제노동이 선고하였습니다. 또한 95,000명에게는 부역죄 형을 선고하고 7만여 명의 공민권을 박탈했습니다. 언론에 대한 단죄는 특히 가혹했습니다. 900여 개의 신문 잡지 가운데 649곳을 폐간하거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로 살아남은 매판 세력은 북한 정권과 체제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반공을 등에 업고 식민지 체제와 본질이 같은 독재체제를 자연스럽게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쿠데타 이후에는 개발독재의 전선에 섬으로써 국가 경제의 역군이라는 영예까지 얻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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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2014,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에서 원효 사상을 논하던 중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경주김씨 신라가 일으켜, 삼국의 대립을 끝내고 민족의 대통합을 이룬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전승되고 기억되는,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저 삼국 전쟁은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내면 진실을 지닙니다. 648년 김춘추는 당 태종과 밀약을 맺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데 성공하면 대동강 이북의 영토를 넘겨주겠다는 내용입니다. 민족사 전체를 왜곡한 매판의 길은 이렇게 열렸습니다. 그래 놓고 삼한통일로 상징조작을 한 것입니다. 광활한 고구려 영토 대부분과 그 백성은 물론 수많은 백제 백성까지 팔아넘기고 당의 연호 아래 그 체제를 국가 경영의 근간으로 삼은 일을 두고 어찌 삼한통일이라 할 것입니까. 대체 누가 어떻게 이런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일까요.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은 흉노 수장으로 한건국에 공을 세워 투후가 된 김일제가 자기 조상이라 천명했습니다. 김일제 후손은 왕망의 난이 일어나 입지가 흔들리자 한반도 동남부로 이동해 왔습니다. 거기서 내세운 시조가 바로 김알지입니다사실이면 사실일수록 아니면 아닐수록 이 주장은 김일제 집단과 김춘추 집단의 매판적 본질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니 절묘할 따름입니다. 만일 흉노가 동이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민족이라면 김춘추 집단의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모순입니다. 당과 야합해 동이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치면서 삼한통일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이 경우,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매판 행위를 은폐하려는 술수일 따름입니다. 만일 흉노가 동이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민족이라면 김춘추 집단의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기만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와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은 민족통일이 아니라, 이민족 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침략전쟁을 은폐하려는 술수일 따름입니다. 덕업일신망라사방德業日新網羅四方? 실로 가소로운 말장난입니다. 덕업德業은 전쟁입니다. 일신日新은 당나라 좇는 것입니다. 한반도 허리 아래 땅에 웅크리고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방四方을 망라網羅하는 게 아닙니다. 사방을 망보는 것입니다. 거창한 이름 자체가 모순이고 기만입니다.

 

삼국 전쟁이 끝난 뒤 짧은 세월의 번영기를 빼고 신라는 급격히 쇠락과 멸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가적 잠재력을 흡수하지 못한 사이비 통일임을 증명하는 결과입니다. 흥융興戎의 피해가 흥륭興隆을 심각하게 잠식해버린 것입니다. 신라 그 매판의 역사는 동이 정체성을 지닌 왕건 집단, 고려의 건국으로 외막이 내려집니다. 왕건 집단은 동이의 가치, 고구려 재현을 기치로 세웁니다. 그러나 신라의 내막을 온존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김부식으로 상징되는 신라 집단이 도리어 흉노의 꿈을 재현합니다. 고려를 송에 조아리게 하고, 원에 무릎꿇림으로써 고구려를 당에 팔아넘긴 그 매판적 조상의 길로 회귀합니다. 고려는 얼마간의 회복국토와 KOREA 이름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고려 그 아쉬운 동이 재건의 역사는 이성계 집단, 조선의 건국으로 외막이 내려집니다. 이성계 집단은 동이의 가치, 고조선의 재현을 기치로 세웁니다. 그러나 고려와 같이, 신라의 내막을 뿌리 뽑지 못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송시열로 상징되는 서인 노론 신라 집단이 도리어 흉노의 꿈을 재현합니다. 조선을 명에 조아리게 하고, 왜에 갖다 바침으로써 고구려를 당에 팔아넘긴 그 매판적 조상의 길로 회귀합니다. 조선은 압록·두만 경계와 한글을 남기고 사라집니다.”(75~77)

 

특권층 부역 집단을 통시적 축으로 삼아 구성해본 경주김씨 신라에서 조선까지 얼개 서사다. 동의할 사람은 드물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 신라 집단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인류-인류학을 만들면서 서구인이 말한 그 인류- 시선으로 볼 수 있다면, 대뜸 공감할 일이다. 신라 집단 실재는 상상력 공동체 인류아닌 분석 집단 서구인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

 

이 대목을 읽었던 독자 가운데 김일제 후손 이야기에 관해 묻는 이가 적지 않았다. 실제 <문무왕릉비>에 위 내용이 실려 있으며, 같은 내용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도 있다. 제 가계를 신성하게 보이기 위해 날조했다 하더라도 그런 의식을 지녔으며 훗날을 위해 명문화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의식이 무의식으로 침윤되어 오늘날 영남인 정치적 정체성을 강고하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서사에 이런 이름을 붙인다: 김춘추의 저주.

 

김춘추가 이세민(태자 시절 당 태종)과 맺은 늑약은 단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역사를 거듭하며 특권층 부역 집단은 송----미로 이어지는 제국과 유·무명 늑약을 수없이 맺어왔다. 마침내 가쓰라 태프트 늑약을 제물 삼아 을사년(1905) 보호 늑약, 경술년(1910) 합방 늑약으로 조선 숨통을 끊기까지 저주는 계속됐다. 국권 회복 이후에도 이승만이 국군통수권을 헌납한 대전 늑약(1950), 박정희가 일제를 면죄한 한일 늑약(1965), 박정희 딸 근혜와 뉴라이트 윤기중 아들 석열이 맺은 일군 성노예 늑약(2015, 2023)으로까지 이어지며 유구한 저주로 작동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이 지금 하는 짓은 이완용 집단이 경술년에 했던 짓을 떠올리게 한다. 김춘추의 저주는 힘이 이토록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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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과 반역에 대한 내 통절한 각성은 고백이 아니다. 내면을 성찰하고 표현하는 인간 정신 작용은 더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아우르는 네트워킹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정치경제를 종식하고 공동체 선물 세계를 여는 존재론이자 윤리학이다.

 

그 세계 존재론은 살해당한 생명을 되불러내며, 그 윤리학은 수탈당한 풍경을 되돌려놓는다. 누가 어떻게 죽음으로 내몰렸는지, 무엇이 어떻게 소유물로 뒤바뀌었는지 알아야만 존재는 복원되고 윤리는 완성된다. 존재도 윤리도 각각 알맞은 고유 맥락을 구성한다.

 

우리는 우리 맥락에서 공동체 선물 세계를 열어간다. 조선 반도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와 그 마름 이야기를 옹골차게 해야만 그럴 수 있다. 이제 그 남다른 이야기를 구성해야만 한다. 남다른 이야기라서 남과 더불어 펼치면 모든 이야기가 한 이야기로 어우러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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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숲을 연속해서 두 번 들어가기는 처음이지 싶다. 검단 숲, 이번에는 서쪽 사면 계곡으로 들어가 능선 거쳐 옆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 아닌 길을 만들어서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 나왔다. 지난주 나올 때 남은 아쉬움을 덜기 위해서였으니 역시 소식을 전했고 돌귀를 남겼다.

 

산곡천을 거슬러 따라가며 남한산을 향한다. 천변 길은 물론 가재울 골짜기로 들어가 점점이 박힌 농가·전원주택·별장을 지나는 동안 사람은 거의 없고 풍경은 어수선했다. 생각 않고 버린 폐기물로 할퀴어진 물, 길섶, 자투리땅들을 보는 내내 아리고 쓰린 통증이 구시렁거린다.

 

모름지기 그 통증은 풍경이 내게 건네는 하소연과 신음에서 비롯했으리라. 심사가 편치 않으니 어쩌다 마주치는 농부에게도 눈길 보내지 못한 채, 남한산 동쪽 계곡으로 스며든다. 숲 깊이 들어가 500고지에 닿을 때까지 인적이 전혀 없다. 인적 없으니 그제야 마음이 눅는다.



고요한 숲에서 만난 작은 습지가 도롱뇽과 개구리알을 품고 있다. 낙엽이 덮여서 보이지 않는 작은 도랑물 소리가 들려온다. 연달래꽃 가족이 우꾼우꾼 마지막 천명을 피워올린다. 능선, 그리고 그 너머 인간 훤요만이 지나친 욕망, 넘치는 술수로 자신과 자연을 오염시킬 뿐이다.

 

산성에 올라 둘러본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522m), 위치상 특히 서울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일이 확인하다가 문득, 거대한 아파트 바다가 산들을 섬으로 가두고 있는 광경을 목도한다. 5천 년 역사를 지닌 나라, 6백 년 고도는 어디 가고 식민지 살풍경만 가득하다.



예정에 없던 청량산 길을 걸어 내려오다 청량한 약수로 목을 축인다. 맑은 기분으로 물길 따라 숲 밖으로 향하는데 느닷없는 굴착기 소리가 고요를 깨뜨린다. 무슨 터널 공사 같은 작업을 하는 모양이다. 식민지 토건은 영일 없구나. 6시간 산행한 다리보다 가슴이 더 무겁다.


지하철 안에서 생각한다. 왜 산 가장자리 마을은 모두 궁상맞고 너저분한 모습일까? 산처럼 푸근하지도 도심처럼 깔끔하지도 않고 어리숙한 욕망만 맨몸으로 나뒹굴까? 분명히 둘 다일 수도 있는데, 왜 둘 다가 아닐까? 스스로 내팽개치는 식민지 변방인 심성이 투영돼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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