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저항의 축’은 통상 일극적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 제국주의의 대 이슬람 및 아랍 지배의 교두보라 할 이스랄의 폭력에 맞서 형성된, 서아시아 일부 국가 및 세력의 연맹을 가리킨다. 이 연맹은 국가로는 이란과 시리아를, 비국가로는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라크의 민병대, 예멘의 안사르 알라, 팔레스타인 가자지역의 하마스 세력을 포함하고 있다. 저항의 축은 최근에 특히 활약을 강화했는데, 작년 10월 7일에 하마스가 ‘알아크사 홍수 작전’을 감행한 것이 그 계기였다.

‘알아크사 홍수’ 작전으로 이스라엘의 군인과 민간인 1,139명이 목숨을 잃은 것을 놓고 이스랄 당국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방의 정부들과 주류매체들은 하마스를 테러 조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그 작전은 서방 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인 이스랄이 국제법을 위반하며 가자지역을 지상 최대의 야외감옥으로 만들어 수십 년간 팔인을 탄압하고 학살해온 것에 맞서 하마스 세력이 감행한 군사작전으로서, 피점령자가 자신의 정당한 자위권을 행사한 행위였다는 견해도 유력하다. 이미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랄의 가자지역 팔레스타인 공격을 인종학살의 혐의가 짙다고 규정하고 이스랄에 더 이상 폭력행위를 하지 말 것을 명령한 바 있다. 그런데도 이스랄의 안하무인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 6개월 미국과 일부 나토국가의 일방적인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이스랄 점령군이 가자지역을 공습하고 탱크로 밀어붙여 빼앗은 목숨이 4월 5일 현재 어린이 1,3000명을 포함해 적어도 33,091명이나 되고, 부상당한 사람의 수가 75,750명이 넘는다. 사망자의 수에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의 건물 잔해 아래 묻혀 있는 10,000명 정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스랄 측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가자지역에서 몰아내려는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천인공노할 인종학살과 인종청소를 저지르는 이스랄과 이스랄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미국 등 제국주의 세력에 의연히 맞서 싸우는 세력이 저항의 축이다. 저항의 축에 속한 6개 국가 또는 세력은 다른 이슬람과 아랍 국가들이 이스랄과 이스랄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패권국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데 지금 각기 가능한 방법으로 적과 교전하고 있다. 특히 예멘 안사르 알라의 경우 홍해를 장악해 이스랄 선박과 이스랄로 향하는 타국의 선박들의 홍해 통과를 금지하고 요구에 응하지 않는 선박들을 가차없이 공격한다. 미국과 영국 등이 해군력을 동원해 예멘의 공격을 막아내려 하지만 제국주의 세력에 맞선 예멘의 태도는 갈수록 강경한 모양새다. 안사르 알라 외에 레바논-이스랄 국경을 사이에 두고 이스랄 군과 대치하며 대 이스랄 공격을 멈추지 않는 헤즈볼라도 있다. 이란의 경우 며칠 전 이스랄이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자국 영사관을 폭격해 혁명수비대 소속 장성 2명을 포함한 10여 명을 살해한 데 상응하는 보복을 조만간 감행할 것으로 알려진다. (오늘 들은 한 방송에 따르면 이란이 미국에 자국의 보복 행보에 관여하지 말라고 미리 경고해 놓았다는 소문이 있으니 정말 큰 공격이 준비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항의 축’은 미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 그리고 이들의 대리인 이스랄과 맞선다는 점에서 근대적 세계체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서도 드러난 것처럼 미국 주도의 일극적 세계질서는 과거와는 달리 더 이상 세계를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 분명해졌다. 미국 주도의 나토국가들이 온 힘을 합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또 러시아에 대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지마는 전세는 러샤의 일방적 우세로 진행되고 있고, 러샤의 경제도 미국이나 EU보다 더 잘 나가는 모습이다. 동유럽에서 서방 제국주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것이 러샤라면, 저항의 축은 서아시아에서 그들과 맞서 싸우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저항의 축이 보여주는 활약은 한편으로 보면 서방의 제국주의가 최근에 구축해 운영하는 일극적 세계체계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면서 다른 한편에서 보면 세계가 이제는 일극적이기만 하지 않고 다극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징후로 보인다. 러-우 전쟁과 팔레스타인 가자전쟁에서 러샤와 저항의 축이 밀리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면, 세계는 이제 크게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정말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제국주의의 호령에 따라서만 세상이 움직이던 시기는 지난 것 같다.

아프리카의 사헬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보인다. 지난달 3월 24일에 개최된 세네갈 대선에서 야당 후보인 바시루 디오마예 파예가 당선했으며, 그가 당선 직후 프랑스가 세네갈의 목을 죄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과 그 발언의 함의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주목을 요구하는 것은 최근까지도 프랑스가 역내 국가를 대부분 신식민지로 관리해온 사헬 지역에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의지를 나타낸 것이 세네갈 한 나라만 아니라는 점이다. 세네갈의 최근 태도는 몇 년 전부터 사헬에서 불고 있는 탈프랑스화, 탈식민화 흐름과 궤를 함께한다고 할 수 있다. 말리, 뉴기니,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등 사헬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꼭두각시 정권들을 무너뜨리고 자국민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새로운 정권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 이미 3, 4년 전이다. 세계 지정학 관련 분석과 보도 전문 ‘풍운아’ 페페 에스코바르에 따르면 “아랍과 무슬림 국가들에 걸친 서아시아 저항의 축은 이제 서에서 동으로 이르는, 즉 세네갈과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에서 차드와 수단, 에리트레아에 이르는 아프리카 사헬 지역을 관통하는 저항의 축이라는 영혼의 동지를 찾았다”(Pepe Escobar, “The Sahel’s ‘Axis Of Resistance’,” The Cradle, 2024.4.1.).

작년 7월에 친프랑스 현임 대통령을 축출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니제르의 군부정권은 자국에 주둔하던 1,500명의 프랑스군대를 쫓아낸 바 있다. 군부의 탈프랑스 정책은 큰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실시되었는데, 그런 점을 잘 보여준 한 사례가 니제르 여성들이 프랑스 대사관을 에워싸고 냄비를 두드리며 소음 시위를 벌인 것이다. 당시 니제르 여성들은 프랑스인은 ‘문명인’이라 거들먹거리니 시끄러운 것을 싫어할 것이라고 우정 소음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니제르 군부는 탈프랑스화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 그들은 자국에 아직 주둔하는 미군의 철수도 요구하고 나섰다고 전해진다. 아프리카 최대의 자국군 드론 기지를 둔 니제르에서 쫓겨나면 미군으로서는 큰 타격을 입는 셈이다. 미국 측은 아직은 니제르 측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있으나,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 자국 주둔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는 것 자체가 니제르의 신군부는 우리가 흔히 아는 군사쿠데타 세력, 즉 정권을 잡은 뒤에는 제국주의의 꼭두각시가 되는 반민족, 반민중 군부 세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니제르는 부르키나파소, 말리와 함께 작년에 ‘사헬 국가 동맹’을 맺은 상태이기도 하다. 니제르가 작년에 프랑스군대를 축출한 데 이어 미군에 대해서도 철수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그런 동맹의 결성으로 자국 안보가 강화되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행동일 듯싶기도 하다.

사헬 지역에서 형성된 저항의 축은 서아시아에서 형성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커 보인다. 서아시아 저항의 축에 속한 국가는 이란과 시리아뿐이고 다른 세력은 비국가 조직들이다. 반면에 사헬 저항의 축에 속한 것은 모두 국가들이다. 물론 이들은 이란을 중심으로 결성된 서아시아 저항의 축과는 달리 아직은 공동전선을 형성한 것은 아니다. 세 나라로 구성된 ‘사헬 국가 연맹’ 이외에는 하나의 흐름 또는 바람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헬에서 구축되는 저항의 축은 아프리카대륙 전역에 걸쳐 이미 형성돼있는 반제국주의 흐름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세계질서에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클 수 있다. 최근에 브릭스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를 새 회원국으로 받아들여 기존의 회원국 남아공과 함께 아프리카 국가 회원국 수를 늘렸고, 올해에는 알제리아를 회원국으로 추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밖에 가봉,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도 가입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나라가 브릭스 회원국이 되고, 아울러 사헬 지역 저항의 축 국가들과 서로 협력관계를 구축하면 아프리카에는 전혀 새로운 국제관계 판도가 형성되는 셈이다.

저항의 축이 서아시아에 이어 아프리카에도 형성되는 것은 미국 주도의 서방 제국주의 세력에는 큰 타격일 수 있다. 미국 등은 이미 우크라전쟁에서 패배를 앞두고 있고, 가자전쟁에서도 난국에 봉착한 상태다. 그런 마당에 아프리카에서도 반제국주의 흐름이 강화되면 이미 나타난 일락서산의 형세는 더욱 짙어질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미국이 주도해온 일극적 세계질서가 무너지고 있고, 다극적인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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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도읍 한양에 있는 내산(內山) 넷과 외산(外山) 넷이 바리 나라 도읍에도 있다. 오는 나는 마지막으로 서쪽 외산을 걸어 그림을 마무리한다. 우선 남쪽 내산 남쪽 사면을 가로지른 다음 도림천을 따라 걷는다. 도림천과 봉천천이 만나 크게 휘어지는 곳에 우와피(牛臥陂)가 있다. 소가 누운(엎드린) 모양을 지닌 웅덩이 또는 못()이라 해서 그렇게 지었다는데 마을 사람들은 쇠내피라 불렀다고 한다. 보라매 공원 큰 연못이 거기서 비롯했을 테다. 그 연못을 서북으로 감싸는 낮은 산이 바로 우와산(牛臥山)이다. 공식 명칭은 와우산이지만 역사를 보듬어 나는 우와산이라 부른다. 좀 더 욕심내 소눈뫼, 곧 소가 누운 뫼라 하고 싶지만 뭐 이쯤 해둔다.


 

정작 내 관심사는 동쪽 외산 미도산을 달리 읽었듯, 우와를 달리 읽는 일이다. ()를 와()로 읽는다는 말이다. 소가 황소걸음을 떠올리게 하듯 달팽이는 달팽이걸음을 떠올리게 한다. 달팽이걸음은 황소걸음을 극대화한 느림 미학이다. 돌아보면 내 한평생은 도저한 느지막이였다. 쉰 살이 돼서야 비로소 직업다운 직업을 가졌고, 낼모레 일흔인 오늘 되돌아 우리말을 공부하며 내 인생을 쑥대밭으로 만든 제국주의와 싸우는 일에 나지막이 진심인 중이다. 느리게 사는 삶이 오래 사는 삶을 보장하지도 못하는데 왜 한사코 이렇게 느지막이 사는지 나도 잘 모른다. 무슨 목적 따위는 없고 그저 본성을 이루는 슬픔과 아픔이 고동이려니 짐작한다.



달팽이걸음으로 우와산 숲속에 든다. 미도산보다 더 낮은 산이라 사람 발길을 쉬이 불러들여 달뜬 분위기가 역력하다. 심지어 산마루는 배드민턴장이 점령한 터라 소란스럽기까지 하다. 아랑곳없는 내 귀는 한껏 핀 벚꽃으로 열려 고요하다. 북쪽 숲까지 초군초군 톺으며 숲에서 나온다. 신림선 보라매병원역에서 보니 동쪽 하늘에 국사봉이 당실하게 뜬다. 이렇게 해서 바리 나라 내산, 외산 넷씩을 모두 걸었다. 바리 나라 도읍 서사는 이제 여기서 안녕이다. 이 헤어짐은 무궁한 마주침으로 번져간다. 여태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바리 나라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느지막이 제국주의 속도, 그리고 가속도와 싸울 것이다. 저 오래된 미래 함성이 울려 퍼진다.

 

우와! 우와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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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산마루 집 거실에서 남쪽을 보면 바로 앞이 정능산이고 그 본진은 관악산이다. 서쪽은 국사봉이고, 왼쪽은 서달산이다. 북쪽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또는 이름이 없는 낮은 산인데, 거기 사육신묘가 있다. 한강 가로지르면 용산이고 그 본진은 안산 (너머 북한산)이다. 이 지정학적 배치를 인류학적 서사로 재구성하면 정능산은 주작, 국사봉은 백호, 서달산은 청룡, 사육신묘가 있는 산은 현무가 된다. 북한산은 진산(鎭山), 관악산은 객산(客山)이다. 도림천을 그려 넣으면 배산임수 풍수도 완성이다.

 

오늘 숲 걷기 동력은 바로 물색없어 보이는 이 인류학적 이야기에서 나왔다. 백호를 돌아 주산 능선을 타고 청룡으로 들어간다. 청룡이 품은 동작동 국립묘지를 정화하려 의식을 행한다. 동작동 국립묘지는 국방부 소속 국립서울현충원이 관장한다. 국립서울현충원 누리집 소개란에 <현충원의 지세>라는 글이 있다. 전문을 인용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은 북한산, 남산, 공작봉,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푸른 동맥을 잇는 공작봉(孔雀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공작봉은 서울 강남에서 드물게 푸르른 녹지를 가진 현충원을 감싸 안은 봉우리로 양쪽으로 뻗어내려 불끈 솟아올랐다가는 엎드리는 듯 줄기와 봉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늠름한 군사들이 여러 겹으로 호위하는 모양으로 기운이 뭉쳐 있다.

 

사방의 산은 군인들이 모여 아침 조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지하에는 여러 갈래 물줄기가 교류하여 생기가 넘치는 명당자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체의 형국은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으로 공작장익형(孔雀張翼型)이면서,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다. ,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의 흐름이 마치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다정하게 마주 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모양이며 한강 물은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들어 마치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러 내려가고 있다.

 

이와 같이 국립묘지가 위치한 공작봉(孔雀峰)은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 산세가 전후좌우에 펼쳐져 흐르는 듯하여 하나의 산봉우리, 한 방울의 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으며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인 갈형취상(渴形取象)으로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웹 망원경이 우주 진실을 전하는 세상인데 대한민국 국립서울현충원은 누리집에서 풍수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한다. 천하 난센스인가? 일단 대답을 유보한다.

 

청룡을 남북으로 따라 걷다가 달마사 직전에 서북으로 방향을 틀어 매봉재(까치산) 능선길을 걷는다. 상도터널 위를 가로질러서 마침내 사육신묘에 다다른다. 청룡을 따라왔지만, 실은 사육신묘 품은 산은 다른 흐름에서 와 청룡과 만난다고 해야 한다. 사당이고개에서 청룡과 갈라져 흐르는 능선은 둘이다. 하나는 그대로 동서 방향으로 흘러가 국사봉에 이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도동과 노량진1동을 가로지르는 남북 방향 능선이다. 그 끄트머리가 사육신묘 품은 산이다. 그 흐름의 분기점이 바로 내가 사는 바리뫼 마루다.

 

사육신묘는 김시습이 사육신 주검을 거둬 묻음으로써 역사에 등장했다. 방치되다가 숙종과 정조를 거치며 정비·법제화되었다. 사당을 비롯한 건물들은 박정희 때에 지어졌다. 박정희가 벌인 이런 토건이 지닌 모순도 모멸감을 자아내지만, 한 가지 전해야 할 진실이 또 있다. 바로 김문기다. 김문기는 사육신이 아니다. 정조가 만든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따르면 삼중신(三重臣)에 해당한다. 여기 묻힐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된 까닭은 김문기 후손인 김재규 때문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사육신이 지닌 상징적 위상에 편승하려 권력을 이용했다는 이야기다. 문중에서는 이를 부인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병도·이선근·백낙준·한우근·이기백·김원룡·최영희-이들은 대부분 일제 특권층 부역자다- 15인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꾸려 이 문제를 논의하고 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중에 결정을 뒤집기는 했지만, 여전히 김문기 빈 무덤이 봉안된 채로 있다. ‘6’신묘에 ‘7’신묘를 봉안한 이 웃지 못할 꼴을 언제까지 두고 봐야 할까.



나중에 덧붙인 김문기에 관해 아무런 설명도 없다




오른쪽 아래 묘역에 하나가 억지로 더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 지도


 

그런데 이 문제에 김두규라는 외부 필자 글이긴 하지만, 조선일보가 입을 댔다. 글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노량진 사육신 묘역의 풍수는 어떨까? 묘역의 지세는 관악산 지맥이 북상하여 한강으로 나아가려 한다. 사육신묘는 그 흐름을 따르지 않고 거꾸로 한양도성과 등을 돌리고 관악산을 바라본다. 이른바 지세를 거슬러[] 안장되었다. 하극상으로 투옥될 자리라고 풍수서는 말한다. 풍수에 능한 숙종이 이곳에 사육신묘를 허락한 것도 겉으로는 '충신'으로 현창하지만, 속으로는 '배신자들'의 무덤임을 알리려 한 것이 아닐까? 김재규 부장의 풍수 패착은 이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익히 경험했고, 현재도 목격하는 바처럼 이 식민지 부역 권력과 재력 정상부 담론에서 점술과 풍수는 필수다. 대놓고 일삼는 일제는 훨씬 더 음산하다. 과학과 합리를 가면으로 쓴 서구 제국은 기독교 주술과 묵시록에 절어 가장 악마적이다. 저들이 인류학으로 인류에게 뒤집어씌운 온갖 어두운 서사는 실제 극단화된 자기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 찬란할수록, 합리가 결곡할수록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점술과 풍수는 맹랑하고 허황하다. 전향한 저들 인류학도 여전히 그 품에 깃든 채 파닥거릴 따름이다.

 

모순과 모멸을 그득 안고 나는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으로 들어간다. 크게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닦아 놓은 길을 따라 걷는다. 순국선열을 기리며 숙연한 마음을 지니는지 알 길 없지만 수많은 사람이 산책한다. 박정희 묘 앞에 선다. 음모가 작용했는지도 알 길 없지만, 마치 그 묘 하나를 쓰기 위해 국립묘지 전체가 들러리 선 듯한 규모와 위치다. 국립서울현충원 누리집 소개 글과 조선일보 글을 함께 음미하면 음울한 음모론 속으로 빠져든다. 황군 장교 출신 독재자, 그 죽음을 둘러싼 인연과 후손, 친일파들이 대거 발 뻗고 누운 천하 명당 국립묘지, 그리고 저 사신묘, 이 모두를 이어주는 풍수 이야기가 마치 지적으로 설계한대하극 같으니 말이다. 응시로 응징하고 박정희 묘에서 돌아선다.



중요한 많은 사실을 숨기고 찬양만 가득 채웠다




왼쪽 아래 있는 박정의 묘가 모든 묘를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다  //네이버 지도


 

해가 서달산 서쪽 능선으로 내려앉으려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을 떠나며 헤아려 보니 서달산으로써 200m 이하 낮은 산도 스물두 개를 걸었다. 200m 이상 높은 산 스물두 개까지 합해 서울 산에 갖출 예의를 다했다. 이제부터는 마음 가는 대로 홀가분하게 떠돌아다니련다. 이 놓여남을 기리면서 한 가지 다짐을 매어둔다.

 

생애 마지막 공부라 여기며 식물에 진심을 쏟아부음으로써 60대 후반부가 시작되었다. 생명 이치에 따라 공부는 곰팡이를 앞장세운 미소 생명으로 이어졌다. 공부는 숲 걷기와 한 묶음이었다. 그 숲이 제국주의 공부를 일깨워 주었다. 또한 숲은 제국주의와 함께 싸우는 전사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이 내게 도전해 온 화두는 바로 인류학이었다. 내가 힘입은 인류학을 넘어 나는 범주적 인류학을 꿈꾼다. 지난 역사 속에서 인간이 이룩한 모든 (서구적) 학문을 인간학이라 이름하고, 그 맞은편에 비대칭 대칭으로 인류학을 세운다는 뜻이다. “인간학은 인간 이외 모든 존재, 심지어 어느 정도는 인간까지도 사물로 대하는 학문이다. “인류학은 인간 이외 모든 존재를 사물로 대하지 않는 학문 (너머 학문)이다. 내가 글 들머리에서 말한 풍수는 바로 그런 인류학어법 중 하나다. 온 존재가 낱낱이 팡이실이 하는 초인과·초합리 서사다. 특히 제국 지배층 인간과 특권층 부역 인간이 사적 탐욕 논리로 접근하는 풍수는 인류학이 아니다. 개벽 인류학이 찐 학문으로서 세계 앞에 서려면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체제를 해석·변혁 범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인간학이 제국주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학을 응시하는 인류학도야말로 남은 날 내 정체성이다.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에서 남은 날을 다짐하는 일은 삶을 단지 육중함에 잡아두지 않는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나지막이 경계 이루는 여기는 오히려 나를 경쾌함으로 놓아준다. 두 묘역을 돌아 20km가 훌쩍 넘었으니 이제 온온한 곳에 퍼지고 앉아 막걸리 한 대포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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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4-02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날이 좋으니 막걸리 한 대포 시원하게 맛있게 드실 수 있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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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길거리에 떨어진 휴지를 보고 그냥 지나가면 아이고, 주워 휴지통에 버리고 가면 어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온통 아이 천지인 셈이다. 내 세금으로 월급 주는 환경미화원이 있는데 왜 내가? 라고 묻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반론이 분명히 있을 테지만 이는 논점을 벗어난 헛똑똑이임이 틀림없다.

 

지지난 일요일인가 외출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던 짝지가 하하 웃는다. 밥집에서 둘렀던 앞치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무심코 그 위에 외투를 입는 바람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번 주말에는 앞치마 돌려주려 그 집 가야겠다며 다시 웃는다. 그러자 하고 앞치마를 챙겨 개키는데 크게 뜯어진 솔기가 눈에 들어온다.

 

생각을 되작인다. 일부러 뜯어서 되돌려준다고 생각이야 하겠나만 이대로 돌려주기에는 민망한 꼴이다. 그렇다고 꿰매서까지 돌려주는 일은 지나친 오지랖 아닐까. 이대로 돌려줄 때 음식점에서 바느질해 쓸 가능성은 없다. 이렇게 뜯어진 줄 뻔히 알면서 다시 손님에게 내밀도록 눈감는 일도 그렇다. 결국은 쓰레기통으로···

 

생각을 되잡는다. 구멍 난 양말, 해진 한복 바지저고리를 꿰맬 때 사물과 생명을 향하는 내 공경심에 경계가 있는가? 있다면 어디까진가? 이른바 내 것에서 멈추는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내 버려두지 않고 내 시간을 조금 덜어내 바느질하는 일이 마냥 오지랖만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이내 5분가웃 꿰매어 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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