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4장 본문입니다.

 

至誠之道 可以前知. 

지성지도 가이전지.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芪龜 動乎體 禍福將至 善 必先知之 不善 必先知之. 

국가장흥  필유정상  국가장망  필유요얼 견호기구  동호사체 화복장지 선 필선지지 불선 필선지지. 

故 至誠 如神.

고 지성 여신.


지극히 성실한 사람은 앞일을 먼저 알 수 있다. 국가가 장차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하면 반드시 흉한 징조가 있어서 시초주역점와 거북거북점에서 나타나고 몸에서 움직여진다. 화와 복이 장차 이를 경우 좋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알며 좋지 않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안다. 그러므로 지극한 성실함은 신과 같다.

 

2. 온전히 적확한, 흐트러지지 않은 실천의 길을 가노라면 모름지기 예지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 예지능력은 무슨 신비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그 흐름을 공감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백성과 더불어 호흡함으로써 그들의 일상을 꿰뚫고 있다면 오늘의 마음 씀, 몸놀림을 보고 내일을 아는 일 또한 일상적 수준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백성의 선한 말, 바른 행동, 즐거운 노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겠습니까? 백성의 악한 말, 슬픈 노래, 고통스런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징조란 것도 신비한 무엇이 결코 아닙니다. 하얀 구렁이가 나타났네, 돌부처가 눈물을 흘렸네.......흥미롭기는 하나 그런 현상을 징조라 한다면 군자의 지성至誠으로 얻어지는 통찰력과는 실로 무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대인의 복서卜筮 행위는 자기 성찰이라는 정갈한 바탕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고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이는 행위를 다만 앞날을 예견하는 기술쯤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에서는 백성을 위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요,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인다는 의미에서는 사태를 통합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 마음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마음 비움과 마음 챙김의 역설적 일치에서 군자의 중용은 시대를 밝히는 빛이 됩니다.

 

3. 이렇게 지성至誠은 신과 같습니다. 중용 명상을 통해 신통력을 얻게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치열한 실천에서 증득證得되는 통찰력, 예지능력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권력, 재물, 명예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중용으로 이룬 대동 세상에서는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있을 뿐이거늘 무슨 억압과 차별과 소외가 있을 것입니까? 혁명의 기득권과 전리품을 내려놓고 밀림으로 돌아간 체 게바라가 바로 지성의 화현이요 신입니다.

 


4. 전임 대통령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 어법으로 임기 내내 국민의 입길에 오르내린 바 있습니다. 안 해본 일이 없는, 그래서 전지전능한 국가수장이라는 자의식을 드러냈던 셈입니다. 허나 나라는 극히 어두운 곳으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자랑해마지 않는 토건 전문가로서, 국가 CEO로서 한 일이란 이른바 4대강사업과 자원외교로 혈세 낭비한 것뿐이었으니 말입니다.


현임 대통령은 유체이탈 어법과 해독불능의 신성 어법으로 입때껏 국민의 입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구름 위에 있는, 그래서 전지전능한 국가수장이라는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허나 나라는 더욱 더 어두운 곳으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가 자랑해마지 않는 아버지의 딸로서, 국가 자체로서 하는 일이란 제 국민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것뿐이니 말입니다.


실천의 실재에서 얻은 예지능력이 국민과 함께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자의 도, 그러니까 중용일 수 없습니다. 함께 나누어지기는커녕 일방적으로 훈계하고 꾸짖는 제왕적 대통령과 그 수하들의 준동에서 드러나는 낙후와 남루. 대한민국의 이름은 몽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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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3장 본문입니다.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기차 치곡. 곡능유성. 성즉형 형즉저 저즉명 명즉동 동즉변 변즉화. 유천하지성 위능화.


그 다음은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한 부분에 지극하면 성誠이 있을 수 있다. 정성스러우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드러나며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변하고 변하면 화化한다. 오직 천하의 정성스러움만이 화化할 수 있다.

 

2. 여태까지 기초적 본문 읽기는 이기동 역譯을 따랐지만 구체적 내용에서는 명사적 독법을 대부분 따르지 않고 제 나름의 이해를 펼쳐 왔습니다. 이 장에서는 처음부터 아예 번역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치곡致曲 문제입니다. 주희가 곡曲을 '모퉁이'라고 했다는군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기동은 ‘한 부분’으로 읽어 치곡을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지극한 성誠이 어려울 때는 차선으로 한 부분부터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이 또한 주희 식 명사적 독법입니다. 저는 곡을 “곡진하게 (행)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퉁이든 한 부분이든 그 것을 명사로 읽으면 치곡능유성致曲能有誠이 아니고  곡능유성曲能有誠이라 한 본문을 설명하기 궁합니다. 그리고 본문 맨 앞에 있는 기차其次를 보면 이 장이 바로 앞장인 제22장과 문맥상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앞 장의 키워드 중 하나인 진盡은 여기의 곡曲이고, 화육化育은 여기의 화化입니다. 

 

3. 곡진하다는 말은 자세하고 간곡하다는 뜻이므로 자연스럽게 성誠과 연속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곡능유성曲能有誠인 것이지요. 성에 진정성을, 간절함, 섬세함을 부여한 또 다른 표현이 바로 곡입니다. 곡으로 표현된 성은 치밀한 과정을 밟아 지성至誠으로 나아갑니다.

 

곡진하게 성의 실천을 통해 중용적 삶의 얼개를 그리는[형形] 것이 첫 번째 과정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삶을 중용의 도에 정향定向하는 일일 것입니다. 선택하고 선언하고 약속하는 순간들이 모여서 그 방향과 테두리를 잡아 갈 것입니다.

 

그 윤곽에 내용을 채워 확연하게 드러내는[저著] 과정이 그 다음입니다. 드러낸다는 말은 자랑한다거나, 무기로 삼는다는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실천의 열매들이 무르익고 쟁여져서 자연스럽게 밖으로 넘쳐나는 현상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 삶을 통해 도리를 명쾌하게 꿰뚫는[명明] 과정이 세 번째 과정입니다. 단순한 지적 깨달음이 아니라 실천에서 오는 이른바 증득證得입니다. 몸으로 아는 것이지요. 그런 행지行知로써 세상사는 이치를 밝히는 일은 다만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중용의 위상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과정은 거침없이 대동을 향해 움직이는[동動] 단계입니다. 밝히는[명明] 목적은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중용이 구가하는 사회 동원력이 바로 동 한 글자에 실려 있습니다. 중용은 결코 책상머리 놀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꾸는[변變] 다섯 번째 과정으로 진입합니다. 움직이되, 나아가되 혁파가 없다면 무의미합니다. 승자와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악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구체적인 힘으로 나타나지 않는 중용은 중용이 아닙니다. 특별하고, 잘난 소수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세상을 뒤흔드는 함성으로 들리지 않는 중용은 중용이 아닙니다.

 

마침내 대동으로 질적 전환하는 화化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저 순舜이 이룩한 세상, 온 생명이 평등하게 상호 소통함으로써 함께 자유롭고 더불어 평화로운 누리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런 세상의 꿈을 간직한 곡진한 발걸음 하나하나가 어둠을 뚫는 촛불이 되어 중용천지를 만들어 갑니다.

 

4. 오늘 이 땅의 지배집단의 행태를 보면 자기 이익을 위한 일에만 곡진하고 국민을 위한 일에는 한사코 건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사건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국민 죽여 자신 살리는 짓거리만을 되풀이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 갇혀 국민이 죽어갈 때 사진 찍고 라면 먹었습니다. 유족들이 울부짖을 때 조문 쇼, 눈물 쇼를 벌였습니다. 중동독감대란 때는 또 어떠했습니까. 건성 대처한 중동독감으로 국민이 죽어갈 때 감염 없다 발표한 뒤 마스크 썼습니다. 중동독감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을 때 치료 경험 없이 준비 중일 뿐인 의료기관 찾아 현장지휘 쇼를 벌였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 야합 때 급기야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피해자 어르신들의 고통과 분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10억 엔짜리 굴욕 외교의 최고책임자가 직접 표독한 표정으로 국민을 야단치며 윽박지르는 담화를 발표하였으니 말입니다. 그야말로 참담무인지경입니다.



현실 정치 한복판에다 윤리학을 던져 넣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도 인간의 일인 한 최소한의 염치와 절제의 요구는 불가피합니다. 그 최소한의 염치와 절제 속에 담긴 곡진함만이라도 챙겼더라면 대한민국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배집단이 챙긴 것은 정반대로 매판과 독재, 그리고 통속종교가 채워준 금고였습니다. 이제 다른 길이 없어 보입니다. 민중이 옹골차고 맑은 마음을 다시 일으켜 곡진함을 되찾음으로써 이 나라를 변하고 화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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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2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則可以贊 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 능진기성즉능진인지성 능진인지성즉능진물지성 능진물지성즉가이찬 천지지화육. 가이찬천지지화육즉가이여천지참의.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자기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 자기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남의 성을 다할 수 있고 남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물物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며 물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2. 흔히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성이 훌륭하면 그에 걸맞은 행위가 나온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지 않은가에 대한 선험적 구별을 전제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설혹 있다 해도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는 실천을 보고 나서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자신이 실천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실천되지 않은 관념이나 지식이나 자세는 아직 그 사람이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 곧 지성至誠, 온 힘을 다한 선택만이 자기 본성을 나타낼 뿐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실천하지 않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탐욕입니다. 탐욕을 거절하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중용의 이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이렇게 실천의 자리에만 자신의 본성을 매겨 넣어야 타인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참 소통은 실천의 소통입니다. 실천으로 관통하고 실천으로 흡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참 인식의 통합이 꽃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실천의 연대가 바로 사회적 본성입니다. 중용의 사회적 본질이 여기서 생겨납니다.

 

인간사회가 중용의 이치를 담는 최종적 그릇은 아닙니다. 인간 아닌 존재, 그것이 생명이든 아니든 우리와 함께 시공간을 지나는 모든 존재와 소통함으로써 중용은 생태학적 지평을 획득합니다.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눈에 띄지 조차 않는 작은 벌레 한 마리, 돌 하나, 아니 물 한 방울까지 우리와 본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우리가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그들 모두도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세계가 온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유아적 허상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마주한 주체이며, 소통의 동등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일방적 제압, 착취는 있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라야, 곧 화육化育해야 합니다. 서로 경이로움을 향해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함께 그 존재 가치를 맘껏 펼쳐야 합니다. 이 경지가 대동입니다. 우리가 천지와 하나 되는, 곧 여천지참與天地參하는 궁극의 차원입니다.

 

천지와 하나 되는 일은 초월명상이나 면벽참선에서 일어나는 신비 현상이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의 부단한 확산, 치열한 선택의 무궁무진한 증폭을 통해 이루어지는 숭고의 과정이며 영성의 공유입니다. 숭고는 인간이 개체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 전체를 향해 삶의 영역을 넓혀가는, 거꾸로 말하면 개체 밖의 삶과 가치를 널리 받아들이는 사유와 실천입니다. 영성은 숭고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광활함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천지와 하나 되려면 통속한 행복론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도생이 삶의 원리인 이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돈만이 ‘근본’인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회자되는 행복이란 결국 절대다수를 수탈해서 취하는 극소수 패거리의 향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행복을 꿈꾼다는 것은 수탈체제에 부역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숭고와 영성이 깃들 수 없습니다. 기존의 통속 인문학과 종교는 이미 여기에 휩쓸린 지 오래입니다. 천지와 하나 되는 일은 이런 향락적 행복을 거절하고 공공의 어젠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 속에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태여 참된 행복이라고 한다면 이 행복만을 우리는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세상입니다.


3. 오늘 우리 대한민국 사회를 돌아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라 천지와 하나 되는 중용은커녕 끊임없이 후패하고 퇴행하는 정치로 말미암아 국민은 더욱 죽음과 고달픔, 그리고 두려움으로 내몰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월호에 250명 아이들을 포함해 304명의 국민을 가두어 잔혹하게 살해하였던 바로 그 국가가 피의 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중동독감으로 불특정 다수의 국민을 살해하였고, 역사교과서 획일화 책동으로 역사를 살해하고 있으며,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다시 한 번 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최근 몇 년 동안 언제나 그래왔듯 처음부터 끝까지 사태의 경과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전략을 썼습니다. 사태의 경과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핵심 전술은 ‘닥치고’ 하는 거짓말이었습니다. 거짓말 중 가장 큰 파괴력을 지닌 것이 바로 ‘대통령의 시간’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시간’은 전혀 하자 없는 촘촘한 서사를 구성하는 것으로 발표·보도되는 바로 다음 찰나 치명적 부재를 공공연히 드러냈습니다. 사태의 경과 진실과 전혀 관련 없는 설정 임재臨在가 사태의 서사를 분산하고 해체했습니다. 세월호 서사도 중동독감 서사도 역사교과서 획일화 서사도 일본군 성노에 피해자 문제 서사도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서사가 붕괴된 사태로 말미암아 죽음은 확산되고 불안은 증폭되었습니다. 세월호 우울로 위축된 경기는 중동독감 공포 때문에 바닥을 쳤습니다. 연이은 악정은 바닥상태를 고착시켰습니다. 절대 다수의 인간적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극소수의 비인간적 향락은 세계 사치성소비시장을 견인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삶이 피폐로 적나라해질수록 더욱 비밀스러워지는 ‘대통령의 시간’은 철통 같이 보위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라 천지와 하나 되는 중용은 못할망정 대놓고 소시오패스 행태를 보이는 것만이라도 삼갔으면 하는 최소한의 바람조차 물색없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 국민의 운명을 지고 살아야만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대체 누구를 붙잡고 물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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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1장 본문입니다.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자성명 위지성 자명성 위지교. 성즉명의 명즉성의.


정성스러움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性의 작용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정성스러워지는 것을 교敎의 효과라 한다.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정성스러워진다.

 

2. 치열한 실천을 통해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은 생명의 타고난 본디 작용, 곧 성性입니다. 이치를 깨우쳐서 적확하게 실천하는 것은 교敎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실천할수록 명쾌하게 깨달아지고 꿰뚫어 알수록 옹골차게 실천하는 법입니다. 인식과 실천은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아주 진부한 말이지만 한 순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이 성誠을 한사코 ‘정성스러움’, ‘성실함’으로 파악함으로써 내적 자세 정도로 묶어두는 흐름이 굳어졌습니다만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성을 철저히 동사적 의미로 읽습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정성스러움, 성실함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내포를 넘어 적확하고, 어김없는 실천의 뜻까지도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명明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밝음’이라 하든 ‘밝아진다.’라고 하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이 드러나지 않는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명은 선택과 결단에 의거한 인식 추구 행위입니다. 따라서 억압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그 어둠을 뚫고 올바른 인식을 지니는 것 자체가 이미 실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은 쉽고 실천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허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억압이 합리화된 사회일수록 인식의 전환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한 때 반독재 투쟁에서 전설적 실천가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의 환원을 통해 스러져 갔는지 우리는 수없이 목도한 바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은 그 자체로 벡터적 동력을 지니는 법입니다. 그들이 변절했다는 것은 그들의 인식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바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는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인식은 처음 것도 나중 것도 투철함에서든 방향 잡음에서든 관철함에서든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둠을 뚫고 올바른 인식에 다다른 명을 이를테면 ‘시명始明’이라 할 때 성의 차원을 온전히 획득한 명을 이를테면 ‘본명本明’이라 한다면 그것이 곧 인식과 실천의 일치입니다. 여기서 명은 성의 또 다른 이름이 됩니다. 한결같은 실천 안에서 명은 명이자 성인 것입니다.


한편, 제 방향을 잡은 인식, 그러니까 명 안에서 성은 제대로 된 성입니다. 방향 없는, 서사敍事 없는, 기승전결 없는 성은 성이 아닙니다. 성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장엄을 향한 숭고함이 있습니다. 이 속에서 성은 명의 또 다른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사회 지배집단은 선거철만 되면 ‘민심이 천심天心’이란 사탕발림을 해댑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곧 바로 ‘민심은 천심賤心’으로 떨어뜨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소인배의 인식이며 실천입니다. 국민을 천한 아랫것으로 인식하므로 그 국민을 향한 소인배의 실천은 시혜로 위장한 착취와 의도된 무능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전자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후자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고의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월호사건, 이것은 단군 이래 최고의 의도된 무능, 그러니까 부작위不作爲 전능이었습니다. 몰라서 못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왕좌왕하다가 사고 수습을 그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 알면서 냉철하게 계산하고 일부러 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실을 다 밝힌다면 모름지기 이 정권이 처음부터 기획하고 조작하고 은폐했다는 것이, 그러니까 무능을 가장한 전지전능이었음이 드러날는지도 모릅니다. 저들이 사건 이후 일관되게 보여주는 대응은 이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잘못된 인식에 터하여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이든 잘못된 인식에 딱 맞는 잘못된 실천을 하는 것이든 저들은 저들답게 저들이 할 짓을 하고 있습니다. 반중용 말입니다.



문제는 중용을, 명을, 성을 부둥켜안고 있는 사람들 곁을 차마 떠날 수 없어 주위에서 서성대는 사람들입니다. 권력이 하는 짓을 다 알면서도 두려운 나머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일처럼 가슴 치고 눈물 흘리면서도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가슴에 품은 실천이 언제 어떻게 몸으로 나타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그들을 위해 고요히 낮은 음성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살며시 손을 내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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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담 2016-07-05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bari_che 2016-07-05 13: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1. 제20장 일곱 번째 문단입니다.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성자천지도야 성지자인지도야. 

誠者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聖人也.

성자불면이중 불사이득 종용중도성인야. 

誠之者 擇善而固執 之者也. 

성지자 택선이고집 지자야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 

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 措也. 

유불학 학지 불능불차야. 유불문 문지 부지부 조야.

有弗辨 辨之 弗明弗措也. 

유불변 변지 불명부조야. 

有弗行 行之 弗篤弗措也.

유불행 행지 부독부조야.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인일능지기백지 인십능지기천지. 

果能此道矣 雖愚 必明 雖柔 必强.

과능차도의 수우 필명 수유 필강.


성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성한 자는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며 저절로 도에 적중하니 성인이다. 성해지려고 하는 자는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는 자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운다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묻는다면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하면 밝히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하나를 할 수 있으면 자기는 백을 하고 남이 열을 할 수 있으면 자기는 천을 한다. 과연 이 방법을 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연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진다.

 

2. 길고 긴 제20장이 이제야 끝납니다. 처음에는, 울퉁불퉁하고 부자연스러워서 앞부분을 모조리 없애고 딱 이 문단만 가지고 제20장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내용만으로도 성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해 가며 여러 의미 갈래를 거느려 온 텍스트라는 역사적 현실성을 인정해 수신修身을 지도리 삼아 중용과 성을 연결하는 문맥으로 이전 문단들을 자리매김 해 본 것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 자유나마 누릴 수 있는 세상이 고맙습니다. 조선시대 윤휴는 주희와 다른 해석을 했다 해서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까지 당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지금 세상은 지금 세상대로 더 가혹한 질곡이 있지만 주희가 산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 그 아니 다행입니까.

 

3.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성은 성실함, 정성스러움이라고 이해하기에 앞서 중용의 중中과 본질적으로 같은 뜻으로 새겨야 합니다. 제16장에서 살폈듯이 만물의 주체로서 도에서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곧 체물이불가유體物而不可遺하고 치열하게 실천한다는 역동적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확하다, 벗어나지 않는다, 어긋나지 않는다는 내포로서 중과 연속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완전한 성誠과 애쓰는 성지誠之를 구별합니다. 완전한 성이야 순舜 임금 같은 성인이나 할 수 있는 경지이니 현실적으로는 오로지 푯대요 깃발일 뿐입니다. 나머지 우리 모두는 찰나 마다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아야 하는, 곧 택선이고집지擇善而固執之하는 노력 과정 자체로 살아갑니다. 늘 깨어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하는, 곧 박문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辨之 독행지篤行之하는 순간순간을 무릎으로 지나갑니다.

 

안 하면 몰라도 하려 들면 하고자 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남보다 더 분투하는 과정에서 우유愚柔가 명강明强으로 바뀝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과정 자체가 성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실천이 한 줄기 한 줄기 모여 중용의 강을 이루어 냅니다. 

 

중용은 존재가 아닙니다. 중용은 실천입니다. 중용은 결과가 아닙니다. 중용은 과정입니다. 중용은 완성이 아닙니다. 중용은 영원한 노력입니다. 중용은 특별한 자의 포효가 아닙니다. 중용은 평범한 자의 함성입니다. 바로 이런 중용의 모습을 돋을새김 한 표현이 성입니다.

 

4. 지금은 그도 쉰을 넘기고 유수한 대학의 교수로 있는 제자가 대학원 다닐 때 제게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릅니다. 명문가 출신인 그의 지도교수가 자녀를 어떻게 호방하고 자유롭게 양육하는가를 간결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가령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공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운운. 제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거나 못 해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냐?”


제자가 답했습니다.


“에이, 선생님도·······그랬으면 제가 이 말씀 왜 드렸겠어요?”


제자가 당연히 여긴 부분과 제가 당연히 여긴 부분이 사뭇 달랐습니다. 하여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바로 그게 세습이야. 이른바 명문가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그 아이들은 열린 공부 길 위에 이미 서 있는 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의 아이들은 공부해라, 공부해라 골 백 번 잔소리해야 하고, 심지어 욕하고 때려야 공부 길로 겨우 들어서. 들어서서도 백배 천배 독하게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어.”


물론 여기 공부와 중용은 전혀 다릅니다. 중용은 세습으로 다가갈 수 있는 통속한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제3장에서 『중용』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생존의 문제가 걸린 시간들을 어렵게 견뎌야 하는 사람일수록 중용을 선택하고 지속하는 일이 더욱 힘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중용의 덕이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하루하루 가족 먹여 살리는 일에 목맬 수밖에 없는, 평범하기조차 어려운 사람이 시시각각 강요되는 극단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중용은 이들에게 독하고 또 독한 요구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용이, 평범하기조차 어려운 사람에게 독하고 또 독한 요구라면, 분명 이들보다 더 용이하게, 더 수준 높게 중용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해야 이치상 맞습니다. 공자 당시로 돌아가 말한다면 공자 자신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계층 지성집단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각성하여 중용을 정치경제학 비판의 고갱이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중용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권력에 편입되고 그 중심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다른 개념의 중용을 신봉하겠지만 오늘날에도 이런 지성집단은 반드시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연히 힘과 돈을 장악하고 있는 제후 집단입니다. 정치경제의 현실은 명실상부 이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이므로 공자가 한 평생 이들을 곡진히 계몽하고 설복시키는 일에 매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실패하였습니다. 이는 공자의 실패가 아닙니다. 인간 자체의 실패입니다. 공자에게서 『중용』이 발원된 지 이천오백 여 년, 여전히 제후의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여전히 이들은, 아니 이들이야말로 중용 실천의 의무 앞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을 보면 스스로 각성한 지성집단은 나태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는 오히려 날 세우고 떠들던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들어오면서는 입을 닫음으로써 파렴치하게 부역하고 있습니다. 통치 집단과 재벌, 그리고 통속종교의 제후동맹은 날로 그 반중용적 매판독재분단고착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제후의 가치는 갈수록 난공불락이 되어가고 공자의 수레바퀴는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결국 우리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평범함조차 사치랄 저 민중, 미상불 불가촉천민the Untouchable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생존의, 생명의 낮은 연대를 형성하는 그 단 하나의 길 말고 달리 생각할 중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용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중용 하도록 숙명 지우는 국가를 끌어안고 우리는 목숨 걸고 중용을 해야 합니다. 아, 참으로 독한 실천의 독한 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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