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녀에 대한 사대부들의 태도는 평민들에게도 큰 영향을주었다. 그들은 임금의 지시 없이도 이혼할 수 있었으므로 환속한 아내와 며느리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환향녀‘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었다. 이는 본디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의미였으나, 오랑캐와 잠자리를 한 더러운 여자라는 악의적인 뜻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정절을 잃지 않은 여자들도환향녀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었다. 손가락질은 집안에서 시작돼 동네 전체로 번졌다. 환향녀의 이빨에 빨간 칠, 까만 칠을 해서 사람들과 마주할 수 없도록 한 마을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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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초기부터 외국과의 무역을 차단했다. 중국이나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유지했지만 사신단을 통한 극도의 제한된 통상만 이루어졌다. 국 내 상공업의 미비와 국제무역의 부재는 더욱더 상품의 부재 혹은 편재 현상을 가져왔다. 생산품이 유통되지 않으므로 도로와 교통, 수송수단이 미비했고, 고대부터 이용해오던 수레도 사용이 제한되거나 수레바퀴 등의 제작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물자의 이동이 어려웠다. 그러니 당연히 운송비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백성이 거주하는 집에도 제대로 된 가구 가 하나 없거나 작은 가구 정도만 두고 살았던 이유도 큰 가구를 제작하기 위한 나무 등의 원자재나 부피가 큰 완성품의 이동이 쉽지 않았기 때 문이다.

박지원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조선의 첩자를 청에 상주시키면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대부의 자제가 북경에 가서청의 과거를 통과하여 관리로 지내면서 중앙정부의 동향을 파악하고 조선 상인은 중국 각지를 다니면서 명의 회복을 기도하는 강남의 한족과연계하는 방안도 구상했다. 박지원은 청의 우수한 제도를 도입하여 부지강병을 이루고, 다양한 정보망을 통해 국제정세의 변화를 면밀히 살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급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를 명확히 자각하고 현실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우리는 이를 조선 후기의 개혁사상인 북학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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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오는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1901년「연암집 』(김택영 편)을 시작으로 『흠흠신서 』와 『목민심서」가 각각 장지연張志淵에 의해 광문사에서 간행되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간행되었다. "실로 우리 대한제국의 정치학 가운데 제일 신서가 『목민심서』다" 라는 『황성신문(10902년 5월 19일)의 찬사도 이어졌다. 당대의 과제 해결책으로 다산 정약용이, 서양 근대 학문과의 만남 속에서 연암 박지원의 위대성이 부각된 것이다. 당시 실학은 현실 타개책으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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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점점 더 심한 욕을 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이느나쁜 말들을 모두 생각해 냈다. 그리고 새로운 욕도 만들어 냈
‘다. 말도 안 되는 욕이었지만 어쨌든 저속한 말이었다. 우리에게는 그 점이 중요했다.
그러고 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우리는 갖가지 묘안들을 짜냈다. 오이대왕을 지하실로 다시 몰아내기 위한 계획도 세웠고 경찰에 신고하자는얘기도 해 보았다. 오이대왕을 자연사 박물관의 실험 용액에넣어 두는 것도 괜찮은 생각 같았다.
우리는 알렉스 형을 끝까지 괴롭혀서 형이 결국은 누나에게구들을 품도록 만들자고, 하슬링거 선생님이 중병에 걸려 곧여식을 하도록 하자고, 또 아버지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도 우리 말에 귀기울일 수 있게 만들자고 결의를 다쳤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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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는 사고파는 일은 시간과 물건을 낭비하는 꼴이니 안 하느니만못했습니다. 결국 먹고살기 위해서는 약초를 캐는 사람도 농사를 지어야 하고, 물고기를 잡다가도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과일을 키우는 사람도 농사를 지어야 하고 목화를 재배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한 가지 일만 한다면 물건도 훨씬 많이 만들고 물고기도 많이 잡을수 있습니다. 물건은 질이 좋아지고 값도 싸질 것입니다. 그러면 더 많 이 팔릴 것입니다.

서울의 명문가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남부러울 것 없이 지 내 온 유형원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양평에 머물면서 비로소 가난에 찌든 농민들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오로지 전쟁 탓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내 청나 라에 대한 복수만 생각했던 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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