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초기부터 외국과의 무역을 차단했다. 중국이나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유지했지만 사신단을 통한 극도의 제한된 통상만 이루어졌다. 국 내 상공업의 미비와 국제무역의 부재는 더욱더 상품의 부재 혹은 편재 현상을 가져왔다. 생산품이 유통되지 않으므로 도로와 교통, 수송수단이 미비했고, 고대부터 이용해오던 수레도 사용이 제한되거나 수레바퀴 등의 제작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물자의 이동이 어려웠다. 그러니 당연히 운송비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백성이 거주하는 집에도 제대로 된 가구 가 하나 없거나 작은 가구 정도만 두고 살았던 이유도 큰 가구를 제작하기 위한 나무 등의 원자재나 부피가 큰 완성품의 이동이 쉽지 않았기 때 문이다.

박지원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조선의 첩자를 청에 상주시키면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대부의 자제가 북경에 가서청의 과거를 통과하여 관리로 지내면서 중앙정부의 동향을 파악하고 조선 상인은 중국 각지를 다니면서 명의 회복을 기도하는 강남의 한족과연계하는 방안도 구상했다. 박지원은 청의 우수한 제도를 도입하여 부지강병을 이루고, 다양한 정보망을 통해 국제정세의 변화를 면밀히 살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급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를 명확히 자각하고 현실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우리는 이를 조선 후기의 개혁사상인 북학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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