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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재발견 - 다산은 어떻게 조선 최고의 학술 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했는가?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8월
평점 :
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을 좋아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한경에서도 백성들을 위하여 책을 쓰고 한 편으로는 자연과 더불어 그리고 어지러운 나라를 위하여 온 몸을 희생했던 다산 정약용, 내가 대학 졸업반 때 전남 강진에 갔다가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자리한 다산의 초당을 보고 온 후 부터였다. 다산이 1801년 황사영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다산 초당이 있다. 이곳에서 다산은 후학을 가르쳤고, 책도 많이 썼다.
이 책의 저자인 인문학자 정 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다산 정약용의 친필 편지가 있는 곳이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5년 이상 발굴하고 찾아 낸 편지가 150여 통이다. 다산의 자료를 발견하고 연구에 몰두하여 논문을 쓰고, 여러 편의 논문을 엮어 정리했다.
다산은 조선의 기품 있는 선비이자 실학파 시문학의 대표적인 사설주의 시인이자 철학자 사상가였다. 양반계층에 속해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진보적인 입장이 강했다. 그래서 어쩌면 더 고통이 심했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조금이라도 닮고 싶은 인물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그래서 그분 책은 다 좋아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통해서 지식인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다산은 성리학 체계가 강건한 시절 서학을 공부했으나 한쪽으로 빠지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학문을 추구하고 그 방향대로 살아갔다.
다산은 1801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반대파에 의해 박해를 받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때가 다산의 나이 40세 때이다. 강진에서 다산은 훗날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함께 완성하였다.
이 책은 모두 4개의 영역으로 나눠 22개의 논문을 실어 넓고 깊은 다산학의 지평을 755쪽의 분량에 보이고 있다. 1부 ‘다산의 강진 강학과 제자교육’에서는 다산의 강진 강학과 제자 교학방식, 강진 교학의 성과, ‘다산여황상서간첩’의 내용과 자료가치, 초의에게 준 다산의 당부와 다산의 선문답을 기록하고 있다. 2부 ‘다산의 사지 편찬과 불승과의 교유’에서는 다산과 은봉의 ‘만일암지’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다산 친필 서간첩 ‘매옥서궤’에 대하여, 다산과 혜장의 교유와 두 개의 ‘견월첩’, 새로 찾은 다산의 ‘산거잡영’ 24수에 대해서 설명한다.
3부 ‘다산의 공간 경영과 생활 여백’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이상주거론, 일민미술관 소장 ‘다산송철선증언첩’에 대하여, 다산의 초당 경영과 공간 구성과 다산 정약용의 부자론, 다산이 그린 두 폭의 매조도를 설명한다. 4부 ‘다산 일문(逸文)의 행간과 낙수(落穗)’에서는 신헌의 ‘금당기주’와 다산의 일문, 다산과 이인행의 남북학술 논쟁, 다산이 이강회의 이름으로 추사에게 보낸 편지, 정학연의 공후인시첩고에 대해서 설명한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생활하면서 백성들이 사는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강론 및 학문 탐구 활동을 통하여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저술하여 조선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생가인 여유당 뒷산에 묻혔으며, 1910년(순종 4년)에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훗날의 어떤 성인도 자신의 학문을 질책할 수 없으리라고 자부하던, 다재다능한 천재 실학자 다산의 사상과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