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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라 탈출하라 - 한 언론인 아버지와 딸이 함께 쓴 회상록
한용상.한나라 지음 / 레페토에이아이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일흔이라는 나이를 지나다 보면 지나온 세월의 수많은 장면이 아지랑이처럼 떠오르곤 한다.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어린 시절, 헐벗고 가난했지만 희망 하나로 견디던 청년기, 그리고 격동하는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지켜내야 했던 그 무수한 날들까지. 그렇기에 1940년생 원로 언론인 한용상 선생과 그의 딸 한나라 저자가 함께 써 내려간 회상록 <떠나라 탈출하라>를 펼쳐 들었을 때, 첫 장부터 가슴 밑바닥에서 밀려오는 묵직한 울림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책은 한 개인의 단순한 자서전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낸 우리 세대의 뜨거운 숨결과 고뇌가 그대로 녹아 있는 거울이자 기록이다.
저자인 한용상 선생은 경북 김천 추풍령 자락의 작은 산골에서 태어나 CBS 기자와 앵커, 정치부장, 보도국장을 거치며 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언론인이다. 독재 정권의 서슬 퍼런 압제 속에서 정의를 외치다 투옥과 해직이라는 고초를 겪고, 캐나다로 망명해 타향살이를 해야 했던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자 숭고한 궤적이다. 70대의 눈으로 바라본 그의 인생은 타협하지 않는 신념이 얼마나 무겁고도 외로운 길인지를 절절히 증명한다.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권력의 불의에 맞서며 겪어야 했던 해직과 망명의 세월은, 단순한 고난을 넘어 한 인간이 자신의 가치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치러낸 고결한 대가였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떠나라 탈출하라’는 구절은 참으로 다층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가난했던 시골 마을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청년기의 열망이자, 불의한 권력의 압제와 감시로부터 자유를 찾아 캐나다로 떠나야만 했던 절박한 탈출이었다. 나아가 이는 현실의 안주와 타협,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라는 영적인 일침이기도 하다. 저자는 고난의 순간마다 신앙의 힘으로 절망을 딛고 일어섰으며, 타향이라는 낯선 땅에서도 절망하는 대신 새로운 삶의 뿌리를 내렸다. 그 질긴 생명력과 신념은 노년의 길목에 서 있는 나 자신에게도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특히 이 책이 더욱 특별하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버지의 지나온 시간을 딸이 함께 기억하고 정리하며 완성했다는 점이다.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의 굴곡진 역사를 단순한 옛날이야기로 치부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정의’와 ‘신앙’의 유산을 온전히 이해하고 기록해 낸 과정은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을 준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경험과 가치관을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데, 이 책은 세대 간의 진정한 화해와 유산의 승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친절한 모범이 되어준다. 딸의 따뜻하고 시선 어린 문장들은 아버지가 견뎌낸 혹독한 세월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 마음의 영혼과 정의관까지 풍요로워졌는지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쉽게 타협하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가치를 저버리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한 언론인의 삶은 경종을 울린다. 노년에 이르러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과연 나는 내 삶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흔적을 남겼는가 질문해 보게 된다.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길의 의미를 정리하고 남은 나날을 존엄하게 가꿔가는 시간이어야 함을 이 책은 다시금 일깨워준다.

<떠나라 탈출하라>는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해 온 원로 언론인의 뜨거운 고백이자, 한 가정의 아름다운 역사서다. 불의에 맞섰던 곧은 기개, 절망의 순간마다 길을 제시해 준 신앙의 깊이, 그리고 가족 간의 끈끈한 사랑이 한데 어우러져 한 권의 깊고 그윽한 인생 교향곡을 만들어냈다. 동시대를 살아오며 삶의 무게를 견뎌낸 나의 동년배들에게는 깊은 공감과 위로를,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는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명작으로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