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을 두드리다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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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사랑>을 덮자마자 구매한 장은진 작가의 두 번째 책이다. 단편집인지도 모른 채 제목만 보고 선택했는데 일곱 편의 이야기를 읽은 후의 느낌이라면 인간은 지독하게도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한다는 것이다. 그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기 위해서 비도덕적인 순간을 이용하거나 즐기기도 한다. 내가 예전처럼 FM대로 각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했다면 욕 한 바가지 퍼부어댈 인물들이 더러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단편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빈집을 두드리는 이유>속 주인공이 바깥을 향해 돌을 던지는 행위에 대해, <페이지들>속 주인공이 책 속 페이지를 찢는 행위에 대해, <찾아가는 도서관>속 주인공이 유기견을 잡아다 도살자에게 넘기는 행위에 대해 나름의 변명을 찾게 된다.

전도 유망했던 투포환 선수였던 '나'는 은둔형 외톨이로 전락하여 점점 괴팍해져 가고 있다. 남의 집에서 개를 돌봐주며 빈집을 지킨지도 한 달째.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라면 돌을 던지는 일과 말라뮤트를 골려먹는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의 신경이 깨어난다. 그녀는 그들이 <빈집을 두드리는 이유>를 모아 모아 집주인의 실체를 추리해간다. 그녀인 줄 알았는데 그였던 그를 사려 깊은 사람으로 둔갑시킨 이유가 엉뚱스럽지만 미운 오지랖이라고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그가 걱정이 되었기에.

다이어트를 결심하며 줄어든 장바구니에 대신 돌멩이를 채워 온 '나'는 다시 던진다. 고요한 일상과 편견에 찌든 세상을 향해.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이들의 고충은 얼마나 클까. <나는 나를 가둔다>에서 '나'는 그 잠이라는 행위에 도달하지 못해서 수면 체험실을 찾는다. 판화가인 그에게 꿈은 곧 돈이다. 꿈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다. 그는 꿈속에 자신을 가두는 일을 즐긴다. 희한하게도 그가 특정한 방에서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자 오로지 혼자만의 행위인 이 잠이라는 것도 음양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었나 의구심이 든다. 어쩌면 주파수가 맞는 상대를 만난 건지도.

아버지의 눈밖에 나버린 '나'는 지붕에서 머물다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던 티슈의 정체에 호기심이 인다. 그에게 멀쩡히 흩날리는 티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된다. 티슈와 함께 화단으로 몸을 던진 '그녀'가 '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가버린 전처를 떠올린다. <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덕에 '나'는 위로와 용서와 이해가 작용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방법이 없어서 지붕에서 지내던 그는, "누가 방법을 알려준다면"이라는 문구를 외면하지 못한 순수한 오지랖 덕에 티슈처럼 마음이 가벼워질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보통 사람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삶의 방법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사람이므로, 그래서 다른 삶의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알려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쉽게 생각하고 비난하고 감싸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음으로써 상처 주는 것뿐이다. -p.97


자살한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찾아가는 도서관>을 운영 중인 '나'는 그다지 책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애초부터 그의 목적은 책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떠돌이 개를 잡아 팔아치우고 차 안에서 성욕을 해소하는 역겨운 행동을 일삼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차 안에 어린 비글을 버리고 간다. 그의 양심이 꿈틀댄걸까.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도살업자를 찾은 그는 애초부터 책이 목적이 아니었다던 그의 말에 정곡을 찔린다. 그렇게 찾으려던 목적은 이루었지만 정작 찾아주어야 할 유서는 전하지 못한다. 그토록 기다리던 만남에 반전이 있을 줄이야.

<나쁜 이웃>은 참말로 뜨끔하다. 어쩜이리도 인간의 이중적인 면을 예리하고도 흥미롭게 끄집어 냈을까. 고독사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하에 신고를 감행한 그녀와 이웃 주민들, 그리고 경찰과 열쇠수리공 등의 속마음이 재미나게 드러난다. 중요한 건 할머니의 죽음이 아니다. 각자의 역할이 중할 뿐이다. 그녀에게는 체면이 더 중한 것이고.

책을 찢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분노가 일던 <페이지들>에서는 책의 중요한 페이지를 찢은 뒤 자신의 연락처를 남겨 놓는 것에 의미를 두던 한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어떤 이유였든간에 그렇게 연락오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만난 <페이지들>과의 만남이 무모해 보이지만 신선한 구석도 있다. 어쩌면 당장에 멱살을 잡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다가도 호기심이 발동하게 될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도 통하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호감 가던 그녀에게는 반전의 결과를 선사하고 만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년이 있을 줄이야.

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하는 P는 말로 일기를 쓰는 게 취미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P앞에 <나무인형>같은 떠돌이 책방 주인을 발견하고는 미친듯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책방을 차려놓은 채 하루종일 죽어라 책만 보는 그녀의 사연이 기구? 해서 ㅋㅋ 안쓰러운 것도 잠시, 헤밍웨이를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 모를 수도 있지 않나?

암튼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진짜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한 여자는 이제 P의 역할대행 도우미가 된다. 일기장이라는 역할을.

역할 대행 도우미의 삶을 살던 P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못한 자신이 후회스럽고 이제는 정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차지도 넘치지도 않는 인물들이 갈구하는 외부로의 세상.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문을 두드리고 있음을 보았다. 마지막 단편의 P처럼 좀 더 적극적이고 귀여운 두드림이라면 나도 귀를 기울여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표지그림처럼 두드렸을때 열릴 세상이 저렇게 시원한 바다만 같다면 또 얼마나 좋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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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기억, 시네마 명언 1000 - 영화로 보는 인문학 여행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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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명연기나 명장면보다 명대사에 꽂힐 때가 더 많다. 물론 장면과 함께이기에 그 느낌이 배가 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주옥같은 대사로 인해 영화의 여운은 더 오래 남기도 한다. '카르페 디엠 (죽은 시인의 사회)'이나 'freedom (브레이브 하트)' 등 유명한 대사가 두고두고 회자되고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기생충)' 같은 대사가 여러 장면에서 패러디되고 있는 것처럼.

그랬기에 그러한 대사만을 발췌해 놓은 이 책은 펼쳐 보고픈 욕구가 강렬했다. 고전 속 한 줄이나 명언 모음집도 좋지만 영화 속 한 줄은 그때의 느낌을 되살릴 수도 있고 미쳐 보지 못 본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 빠지기 전엔 영화를 꽤 즐겼었다. 책에 빠진 후론 원작 영화를 주로 찾아보아서인지 보겠다고 찜 해 놓았던 영화들을 여전히 못 보고 있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대사를 뽑아내었을까 기대하면서 보았는데 각자가 느끼는 대사의 감흥이 다를 수밖에 없구나를 느끼기도 했다.


저자는 책을 구성하기에 앞서 이 많은 영화를 보았겠지만 이 많은 영화를 주제별로 분류하는 작업도 만만찮았겠단 생각이 든다. 워낙에 많은 영화를 다루다 보니 천 개의 명언에 부연 설명을 달기 버거웠으리라 생각한다. 영화 하나 당 다섯 개씩 뽑는 일도 쉽지 않았겠다. 주옥같은 대사가 많을수록 어떤 대사를 살리고 어떤 대사를 버릴지 도 고민스러운 일이니까.


목차를 쭉 살펴보니 보지 못한 영화가 꽤 된다. 게다 보았던 작품임에도 이런 대사가 있었던가 하는 것도 있다. 이래서 독서 리뷰를 쓰듯 영화 후기도 써놓으면 참 좋겠다 싶다. 부지런하지 못해서 본 영화를 일일이 기록하는 것조차 내겐 버거운 일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책의 구성처럼 간단한 소개와 명대사 몇 줄 정도는 기록하는 것도 좋겠다.

주제에 맞추어 대사는 뽑아내다 보니 명언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대사로만 느껴지는 문장들도 더러 있다. 특히 영화를 보지 못한 경우는 더더욱.

대신 강렬해서 당장에라도 보고 싶어지는 대사도 있다. 영 문장이 함께 소개되어 있어서 영어공부에도 도움이 되겠다.

역시나 Part 6. 인간적인 명대사 쪽과 Part 8. 상상력을 자극하는 명대사 쪽에서 본 영화가 많다. <레이디 버드>나 <나, 다니엘 블레이크>그리고 <헬프> 같은 영화는 정말 울림이 컸다. 소개된 대사들도 내가 찜 해두었던 대사들이라 반갑고 울컥했다.

750. 내가 말한 거 하나도 잊으면 안 돼. 다 기억하지? 넌 친절하고, 넌 똑똑하고, 그리고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Don't forget anything I said. You remember everthing, don't you? You're kind, you're smart, and you're precious.

위 대사는 영화를 보지 않고선 느낄 수 없는 명언이다. 아마 많은 대사들이 그렇겠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메멘토>는 많이 들었음에도 보지 못한 작품인데 명대사를 읽고 나니 챙겨 보고 싶다.

375. 내 마음 밖의 세상을 믿어야 한다. 기억은 못할지라도. 눈을 감고 있더라도 세상은 존재한다는 걸 믿어야 한다.

I have to believe in a world outside my own mind. I have to believe that my actions still have meaning. Even if I can't remember them. I have to believe that when my eyes are closed the world's still here.

안젤리나 졸리의 <처음 만나는 자유>는 낯선 영화인데 혼란스러운 심리를 다루고 있어 볼 만하겠다.

380. 감정의 보호막이 벗겨질 때 성장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Maybe there's a moment, growing up when something peels back.


내가 현재 처한 문제나 고민이 있다면 시네마 명언에 소개된 영화를 챙겨보며 위안을 얻어보는 건 어떨는지. 나 역시 책에서 충족하지 못했던 즐거움을 한 편 한 편 찾아보며 즐거움을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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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사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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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좋겠어요."

"올. 겁니다."


비가 오면 좋겠다. 무섭게 치솟은 열기를 식혀줄 비가 잠깐씩 왔다 가니 아쉽다. 이런 비라면 우산을 쓰지 않고 실컷 맞아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 학창 시절 친구와 함께 퍼붓던 비를 맞으며 하교하던 그때의 추억만큼 즐겁진 않겠지만.ㅎ

해주는 비를 좋아한다. 비의 낭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비는 구질구질함을 덮어주기 때문이다.

지금의 계절처럼 해주 역시 여름의 중심부를 견디고 있다. 해주는 자신의 인생이 사막 같다고 느낀다. 거기에 지표면을 데운 공기까지 해주의 청춘을 무자비하게 녹이고 있다. 밑바닥 가득 조여오는 숨통을 건물 맨 꼭대기 가장자리 작은 창에 꽂아두고 있으면 그나마 살 것 같다. 윗공기의 로망이 희망이든, 창이라는 형태에서 찾은 정서가 한 줄기 빛이 되었든 해주가 바라는 건 저 창의 안쪽에 놓여 보는 것이다.

가난은 인간을 구질구질하게 만든다. 가족의 뒤통수를 때리고 나가버린 엄마로 인해 남은 식구들의 삶엔 먹구름만 가득이다. 해주의 미래는 가난에 저당잡히고, 아빠는 과거에 발목 잡히고, 영주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편직기의 소음은 허름한 공간을 가득 채우며 텁텁한 열기를 만들어 내고 이십사 시간을 돌리고 돌려도 줄어들지 않는 부채에 인생이 공허하다.

이쯤 되니 아버지와 영주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일은 안 하고 밥만 많이 처먹는 건 두 사람의 공통점이고 아버지는 잠을 많이 처자는 것으로, 영주는 되지도 않는 죽음의 곡조로 삶을 위안 삼는다는 것이 다르다.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사막 위를 떠다는 무능한 구름일 뿐이다.


돕고, 싶습니다. -p.102

비도 오지 않는데 우산을 쓴 남자가 주위를 얼쩡거린다면 지금 같은 세상에선 거리를 둬야만 하겠지만 해주는 저러고만 있는 우산씨의 처지를 헤아려 본다. 한결같이 펼쳐 든 우산 곁을 다가선 해주와 기꺼이 우산 속을 내어 주는 우산씨.

해주를 위해, 해주를 위한 우산씨의 말들은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하듯 따스하고 정이 넘친다.

우산씨의 도시락에서 엄마를 떠올리는 해주를 보며 혹시 우산씨네 도우미 아줌마의 정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해주의 대나무숲이 되어주고 해주의 창문의 정서를 공감하고 해주의 피로회복제를 자처한 진정 그는 누구일까. 정말 해주의 말대로 사는 게 고달픈 이들에게만 보이는 거라면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될 텐데. 샤를리즈 테론 주연인 영화 <툴리>가 떠오른다. 못 보았다면 이 영화 강추! 우산씨가 명품으로 휘감은 것도 역시 해주의 바람이 형상화된것이고.ㅋㅋ

아무튼 우산씨가 기다리는 건 그런 고달픈 영혼이 아니었을까. 그는 돌보러 온 자다.

"접을 수, 없습니다"라며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던 우산씨는 시위대 틈에서 밟혀죽은 비둘기를 챙기려다 우산의 간극 따위 무시하고 밀쳐대던 사람들로 인해 우산도 망가지고 손도 다친다.

나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던 해주 역시 주민들의 따가운 시선과 욕지기에 상처를 입는다. 완강함으로 버티기에 세상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게다가 해주의 사막은 넘치는 물로 인해 온통 망가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우산씨같은 이가 있다면 상처를 위로받으며 살아가게 되겠지.

엄마만 있었어도!

해주는 자신의 인생을 살고 영주는 희망을 노래했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행과 절망론을 너무나 그럴듯하게 단정하는 영주에게 설득당하는 것보다 막연한 기대에 서슴없이 단정하는 우산씨에게 설득당하는 게 낫지 않을까. 비도, 긴 잠도, 파스 냄새가 사라질 날도, 집 나간 엄마도, 빚을 갚을 날도, 행복도 내일이면 올 거라는 느긋한 태도를 닮아가던 해주를 나도 닮아가보련다.

이쯤 되니 집을 나간 엄마도 이해가 되고 망가짐을 자초하던 영주도 이해가 된다. 꿈을 꿔보지도 못한 해주도, 꿈을 접어야만 했던 재하도 안쓰럽다. 그렇지만 추잡하고 무능력하고 찌질한 아빠는 참 이해가 안 된다.

아빠만 정신 차리면 내일이라도 빚을 갚을 수 있다는 해주의 충고를 제발 실천하고 살기를.

어떤 화가는 우산을 비밀스러운 하늘이라고 했대요. -p.172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 보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산이 등장한다. 우산을 펼치면 오로라에 눈을 뗄 수 없다. 그런 예쁜 우산속이라면 비밀스런 하늘을 간직한듯한 기분이 들것만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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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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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먼 미래의 어느 지점. 징글징글한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쩌면 인간 아니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어느 세력이 구축하고자 하는 세계 '에이전시'와 그 세계의 균열을 위해 그들을 집요하게 쫓는 과거의 어느 세력 '가든'.

분명한 건 평화를 바라는 이들의 힘보다 전쟁을 원하는 이들의 힘이 더 세고 그들의 싸움은 더 지능적이고 교묘하며 상상을 초월한다. 에이전시의 요원 레드의 임무는 '시간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시간 타래'를 지키는 것이다. 요원들은 그저 철저히 훈련된 기계 인간 같지만 레드는 어딘지 조금 달랐다. 인공 자궁에서 태어났지만 감정에 오류가 있는.

어쩌면 블루도 직감했을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은밀한 시도를 했을 수도.


우리는 시간 여행으로서의 편지, 시간을 여행하는 편지를 써. 겉으로는 안 보이는 의미를 담아서.-p.79

레드는 적의 편지를 발견한다. 전쟁에서 편지라니. 이 무슨 아날로그적 설정인가. 마법처럼 신기한 기술들이 넘쳐날 그 시대에. 그럼에도 편지가 갖는 '정서'라는 게 있다. 아무튼 레드는 분명 함정일 것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지만 읽는다. 편지의 시작은 도발적(우리는 이렇게 이길 거야.-p.19)이었지만 받을 사람과 쓴 사람에 덧붙여진 문장에서 고심한 흔적이 엿보여서인지 횟수가 거듭될수록 마치 두 친구의 교환일기를 보고 있는듯하다. 두 요원의 용의주도한 방식과 상대를 자극하는 대화가 꽤 재밌다. 다만 그들이 인용한 구절이나 문화적 지식들이 낯설어 와닿지 않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은 상대의 편지가 언제쯤 등장할지 잘 알아차린다. 예상치 못한 조건들과 상황이 흥미롭다. 시간 가닥마다 심어놓은 힌트들. 매킨토시, 물, 불, 빛, 나이테, 물범의 내장, 펄펄 내뿜는 용암, 한 잔의 차. 그것이 운치 있는 행동인 양 과시하는 그들의 허세? 도 볼만하다.

그저 상상력이 떨어지는 나를 탓하며 드라마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책은 친절하게도 색상으로 발신자를 구별해놓았다. 나 같은 독자를 위해.





단일한 '우리'는 존재하지 않거든. 그 대신 수많은 '우리들'이 있지. 우리들은 모습을 바꾸면서 서로의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p.64

거친 시간대에 놓인 두 요원에서 두려움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얼른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만 보인다. 그럼에도 사뭇 진지한 태도로 돌변하는 순간이 있다. 편지의 낌새를 느낀 순간만큼은. ​

시간 타래에 은밀히 접근해 자신의 궤적을 남긴 건 블루의 작전이었지만 일탈을 즐기는 건 레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두 요원은 도발을 즐긴다. 시간은 분명 흐르는 것임에도 시간을 퇴적하듯이 편지는 오랜 기간 걸쳐 쓰인다. 상대만을 위한 언어로만 새겨진 이유 역시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상대와 상대가 아닌 일대 일, 너와 나만을 위한.

너한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진짜 이야기를. -p.165

비꼬임을 되받아치는 재미에 푹 빠진 모습이다. 재미를 들였는지 추신도 남발이다. 레드와 블루가 존재하는 세계의 격차는 그들의 편지에서 느껴보게 된다. 먹는 즐거움을 포기한 먼 미래. 알약 하나면 끝나는 시대에 블루의 최상급 꿀과 부드러운 치즈와 따뜻한 빵의 도발이 레드를 자극할 수 있을까마는 독자를 자극하기엔 충분하다. 오고 가는 호기심 가득한 질문은 각자의 허기를 채운다. 서로의 답장에는 상대를 제거할 독이 아닌 진정성이란 바이러스가 감지된다. 상대를 서서히 전염시키는. 그리고 '우리'가 되어 '당신들'에게 치명타를 주게 될 그것.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 -p.267 라는 말과 함께 하게 될 새로운 시간 타래를 찾을 수 있기를. 이 또한 인류의 숙제이기도 하고.




토머스 채터턴의 등장은 78페이지 블루의 편지에서 언급된다.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고 다시 한번 블루는 고백한다. 시간 가닥 141, 자신이 출생 시점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림이 등장한다. 둘의 음모가 발각될 즈음 레드는 어느 유럽의 도시에서 지하에서 이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언급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비극적 설정임에도 소설은 희망적이다.

이 소설은 두 작가의 합작품이다. 글이 너무나 매끄럽고 자연스러워 두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다. 당최 먼 소리인지 흐름이 읽히지 않는다면 레드와 블루의 편지만이라도 읽어보시라. 화려한? 미사여구에 편지가 쓰고 싶어질는지도.

여름은 토끼풀에 내려앉은 벌처럼 찾아와. 금빛으로 바쁘게 움직이다가, 왔나 하고 보면 벌써 사라지고 없거든. -p.164

말은 상처를 입히지만 은유는 중재할 줄 알아. 다리처럼. 그리고 말은 다리를 지를 때 쓰는 돌 같은 거야. 대지에서 파낼 때는 힘들지만 재료가 되지. 새로운 것, 함께 나누는 것, 하나의 묶음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드는 재료. -p.173

나는 독개미와 대모벌로 너에게 편지를 쓸 거야. 상어 이빨과 가리비 껍데기로 편지를 쓸 거야. 바이러스와 너의 폐 속에 들이치는 아홉 번째 파도의 소금기로 편지를 쓸 거야. 나는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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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만나기 대작전 청어람주니어 고학년 문고 10
김명진 지음, 전명진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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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자주 들여다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오은영 박사님이 나오셔서 행동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관찰하고 부모에게 조언을 드리는 프로인데 보면서 느끼는 건 애초에 문제아는 없었고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부모 역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처음이고 새로운 환경과 상호 관계에 있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부모는 아이를 키우면서 함께 성장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힘이 들 땐 다른 사람의 조언과 상담도 받아들여야 한다.

<외계인 만나기 대작전>이라는 제목만 보면 단순히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일듯하지만 어른도 함께 읽어보면 정말 좋을 책이다.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아이와 그릇된 훈육방식을 고수하던 부모. 모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에 우리 모두의 관심이 수반되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걸 원치 않는 이들도 있고 내 이웃의 일에 무관심한 이들도 있어 이 책은 그만큼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다가왔다. 작가는 무엇보다 이런 사안에 조심스레 다가간다. 부모의 무관심과 지나친 훈육 게다가 버릇을 고치겠다고 행해지던 과도한 체벌은 한 아이를 계속 절망으로 밀어 넣을뻔했다. 일찍 알아차린 친구들과 주변의 따스한 시선이야말로 지금과 같은 시기에 절실해 보인다.

철구는 여자친구다. 이름만 들으면 남자친구라고 여길 만한데 이름에 깃든 의미가 사뭇 진지해서 오히려 더 정감 있다. 그렇지만 철구는 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답게 예쁜 이름이 탐나는 때다. 아빠에게 왜 이렇게 지었다며 따져 묻고 싶지만 철구는 아빠를 못 본 지 오래되었다. 엄마는 도통 이유를 말하지 않고 그런저런 이유로 더욱 아빠가 그리운 철구는 엄마의 도움 없이 아빠를 만날 계획을 세운다.





'아무거나 교환소'는 그렇게 문을 연다. 괜찮은 물건이 들어오면 되팔 목적이었고 그렇게 용돈을 벌어볼 심산이었다. 고 녀석 참 경제 쪽으론 될성부른 떡잎일세.ㅋㅋ

그러던 어느 날 예상외의 친구가 무당벌레 브로치를 내밀며 사라지게 해달라고 한다. 이런! 황당한 일이.

나 역시 이래저래 지칠 때면 가끔 일주일만 사라지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 안나 역시 그냥 재미로 사라지고 싶다며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닐 것이다. 열 두살 친구가 사라지고 싶다고 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단 얘기니까.

이야기의 시작은 가을이와 안나의 싸움으로 시작된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가을이는 무언가 억울함에 펄쩍 뛰는 입장이고 안나는 모함을 당하는 입장이다.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들은 안나를 두둔하며 가을이를 흉보기에 이른다. 억울한 가을이는 안나의 흠을 까발려서라도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다. 분명 안나에겐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듯하고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 이면에는 무언가로부터의 억압이 있는듯하다. 그랬기에 가을이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다.


철구는 아빠를 보겠다는 의지가 한가득이기에 얼토당토않은 안나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자 문득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가 번뜩 떠오른다. 지하실 박스를 뒤져 찾은 노트에 적힌 촌스러운 제목 하나가 어쩌면 방법을 찾아 줄는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외계인 만나기 대작전'이라는 제목 아래 적힌 몇 가지 행동 작전을 보며 어쩌면 사라지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거나 말거나>라는 잡지도 영 틀린 정보를 제공하는 것 같지도 않고 또 외계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브로치를 돌려주고픈 마음이 없기도 했기에 철구는 일단 저지르고 본다.

외계인이 출몰했다는 장소를 찾아가기도 하고 외계인을 본 사람을 찾아보기도 한다.

철구는 계획대로 안나의 부탁을 들어주고 브로치를 팔아 아빠를 만날 수 있을까.




우연히 몇 번,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다른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처럼 어두워지는 안나의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p.26

주변에 행동이 독특한 친구를 만나면 외계인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만큼 소통이 잘 안되는 친구들을 그렇게 칭하며 가까이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잘 관찰해보면 그 친구들 역시 도움을 원하거나 누군가의 이해를 받고 싶어한다는걸 알게 된다.

안나의 차분함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안나는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안나의 방에서는 자주 모스 부호가 관찰된다. 그런 안나의 특징을 놓치지 않은 철구의 세심함과 유진이의 당찬 매력, 가을이의 배려심이 없었다면 안나는 진짜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 주눅 들고 원망하며 좌절하기보다는 달라진 안나의 모습처럼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고 당당해지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흐뭇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다행스럽다.

어제 본 기사 하나가 떠오른다. 무안에서 UFO가 출현했다는 소식이었는데 영상을 보고 있으니 SF 소설이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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