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먼 미래의 어느 지점. 징글징글한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쩌면 인간 아니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어느 세력이 구축하고자 하는 세계 '에이전시'와 그 세계의 균열을 위해 그들을 집요하게 쫓는 과거의 어느 세력 '가든'.

분명한 건 평화를 바라는 이들의 힘보다 전쟁을 원하는 이들의 힘이 더 세고 그들의 싸움은 더 지능적이고 교묘하며 상상을 초월한다. 에이전시의 요원 레드의 임무는 '시간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시간 타래'를 지키는 것이다. 요원들은 그저 철저히 훈련된 기계 인간 같지만 레드는 어딘지 조금 달랐다. 인공 자궁에서 태어났지만 감정에 오류가 있는.

어쩌면 블루도 직감했을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은밀한 시도를 했을 수도.


우리는 시간 여행으로서의 편지, 시간을 여행하는 편지를 써. 겉으로는 안 보이는 의미를 담아서.-p.79

레드는 적의 편지를 발견한다. 전쟁에서 편지라니. 이 무슨 아날로그적 설정인가. 마법처럼 신기한 기술들이 넘쳐날 그 시대에. 그럼에도 편지가 갖는 '정서'라는 게 있다. 아무튼 레드는 분명 함정일 것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지만 읽는다. 편지의 시작은 도발적(우리는 이렇게 이길 거야.-p.19)이었지만 받을 사람과 쓴 사람에 덧붙여진 문장에서 고심한 흔적이 엿보여서인지 횟수가 거듭될수록 마치 두 친구의 교환일기를 보고 있는듯하다. 두 요원의 용의주도한 방식과 상대를 자극하는 대화가 꽤 재밌다. 다만 그들이 인용한 구절이나 문화적 지식들이 낯설어 와닿지 않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은 상대의 편지가 언제쯤 등장할지 잘 알아차린다. 예상치 못한 조건들과 상황이 흥미롭다. 시간 가닥마다 심어놓은 힌트들. 매킨토시, 물, 불, 빛, 나이테, 물범의 내장, 펄펄 내뿜는 용암, 한 잔의 차. 그것이 운치 있는 행동인 양 과시하는 그들의 허세? 도 볼만하다.

그저 상상력이 떨어지는 나를 탓하며 드라마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책은 친절하게도 색상으로 발신자를 구별해놓았다. 나 같은 독자를 위해.





단일한 '우리'는 존재하지 않거든. 그 대신 수많은 '우리들'이 있지. 우리들은 모습을 바꾸면서 서로의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p.64

거친 시간대에 놓인 두 요원에서 두려움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얼른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만 보인다. 그럼에도 사뭇 진지한 태도로 돌변하는 순간이 있다. 편지의 낌새를 느낀 순간만큼은. ​

시간 타래에 은밀히 접근해 자신의 궤적을 남긴 건 블루의 작전이었지만 일탈을 즐기는 건 레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두 요원은 도발을 즐긴다. 시간은 분명 흐르는 것임에도 시간을 퇴적하듯이 편지는 오랜 기간 걸쳐 쓰인다. 상대만을 위한 언어로만 새겨진 이유 역시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상대와 상대가 아닌 일대 일, 너와 나만을 위한.

너한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진짜 이야기를. -p.165

비꼬임을 되받아치는 재미에 푹 빠진 모습이다. 재미를 들였는지 추신도 남발이다. 레드와 블루가 존재하는 세계의 격차는 그들의 편지에서 느껴보게 된다. 먹는 즐거움을 포기한 먼 미래. 알약 하나면 끝나는 시대에 블루의 최상급 꿀과 부드러운 치즈와 따뜻한 빵의 도발이 레드를 자극할 수 있을까마는 독자를 자극하기엔 충분하다. 오고 가는 호기심 가득한 질문은 각자의 허기를 채운다. 서로의 답장에는 상대를 제거할 독이 아닌 진정성이란 바이러스가 감지된다. 상대를 서서히 전염시키는. 그리고 '우리'가 되어 '당신들'에게 치명타를 주게 될 그것.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 -p.267 라는 말과 함께 하게 될 새로운 시간 타래를 찾을 수 있기를. 이 또한 인류의 숙제이기도 하고.




토머스 채터턴의 등장은 78페이지 블루의 편지에서 언급된다.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고 다시 한번 블루는 고백한다. 시간 가닥 141, 자신이 출생 시점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림이 등장한다. 둘의 음모가 발각될 즈음 레드는 어느 유럽의 도시에서 지하에서 이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언급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비극적 설정임에도 소설은 희망적이다.

이 소설은 두 작가의 합작품이다. 글이 너무나 매끄럽고 자연스러워 두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다. 당최 먼 소리인지 흐름이 읽히지 않는다면 레드와 블루의 편지만이라도 읽어보시라. 화려한? 미사여구에 편지가 쓰고 싶어질는지도.

여름은 토끼풀에 내려앉은 벌처럼 찾아와. 금빛으로 바쁘게 움직이다가, 왔나 하고 보면 벌써 사라지고 없거든. -p.164

말은 상처를 입히지만 은유는 중재할 줄 알아. 다리처럼. 그리고 말은 다리를 지를 때 쓰는 돌 같은 거야. 대지에서 파낼 때는 힘들지만 재료가 되지. 새로운 것, 함께 나누는 것, 하나의 묶음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드는 재료. -p.173

나는 독개미와 대모벌로 너에게 편지를 쓸 거야. 상어 이빨과 가리비 껍데기로 편지를 쓸 거야. 바이러스와 너의 폐 속에 들이치는 아홉 번째 파도의 소금기로 편지를 쓸 거야. 나는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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