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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사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평점 :

"비가 오면 좋겠어요."
"올. 겁니다."
비가 오면 좋겠다. 무섭게 치솟은 열기를 식혀줄 비가 잠깐씩 왔다 가니 아쉽다. 이런 비라면 우산을 쓰지 않고 실컷 맞아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 학창 시절 친구와 함께 퍼붓던 비를 맞으며 하교하던 그때의 추억만큼 즐겁진 않겠지만.ㅎ
해주는 비를 좋아한다. 비의 낭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비는 구질구질함을 덮어주기 때문이다.
지금의 계절처럼 해주 역시 여름의 중심부를 견디고 있다. 해주는 자신의 인생이 사막 같다고 느낀다. 거기에 지표면을 데운 공기까지 해주의 청춘을 무자비하게 녹이고 있다. 밑바닥 가득 조여오는 숨통을 건물 맨 꼭대기 가장자리 작은 창에 꽂아두고 있으면 그나마 살 것 같다. 윗공기의 로망이 희망이든, 창이라는 형태에서 찾은 정서가 한 줄기 빛이 되었든 해주가 바라는 건 저 창의 안쪽에 놓여 보는 것이다.
가난은 인간을 구질구질하게 만든다. 가족의 뒤통수를 때리고 나가버린 엄마로 인해 남은 식구들의 삶엔 먹구름만 가득이다. 해주의 미래는 가난에 저당잡히고, 아빠는 과거에 발목 잡히고, 영주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편직기의 소음은 허름한 공간을 가득 채우며 텁텁한 열기를 만들어 내고 이십사 시간을 돌리고 돌려도 줄어들지 않는 부채에 인생이 공허하다.
이쯤 되니 아버지와 영주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일은 안 하고 밥만 많이 처먹는 건 두 사람의 공통점이고 아버지는 잠을 많이 처자는 것으로, 영주는 되지도 않는 죽음의 곡조로 삶을 위안 삼는다는 것이 다르다.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사막 위를 떠다는 무능한 구름일 뿐이다.
돕고, 싶습니다. -p.102
비도 오지 않는데 우산을 쓴 남자가 주위를 얼쩡거린다면 지금 같은 세상에선 거리를 둬야만 하겠지만 해주는 저러고만 있는 우산씨의 처지를 헤아려 본다. 한결같이 펼쳐 든 우산 곁을 다가선 해주와 기꺼이 우산 속을 내어 주는 우산씨.
해주를 위해, 해주를 위한 우산씨의 말들은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하듯 따스하고 정이 넘친다.
우산씨의 도시락에서 엄마를 떠올리는 해주를 보며 혹시 우산씨네 도우미 아줌마의 정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해주의 대나무숲이 되어주고 해주의 창문의 정서를 공감하고 해주의 피로회복제를 자처한 진정 그는 누구일까. 정말 해주의 말대로 사는 게 고달픈 이들에게만 보이는 거라면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될 텐데. 샤를리즈 테론 주연인 영화 <툴리>가 떠오른다. 못 보았다면 이 영화 강추! 우산씨가 명품으로 휘감은 것도 역시 해주의 바람이 형상화된것이고.ㅋㅋ
아무튼 우산씨가 기다리는 건 그런 고달픈 영혼이 아니었을까. 그는 돌보러 온 자다.
"접을 수, 없습니다"라며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던 우산씨는 시위대 틈에서 밟혀죽은 비둘기를 챙기려다 우산의 간극 따위 무시하고 밀쳐대던 사람들로 인해 우산도 망가지고 손도 다친다.
나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던 해주 역시 주민들의 따가운 시선과 욕지기에 상처를 입는다. 완강함으로 버티기에 세상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게다가 해주의 사막은 넘치는 물로 인해 온통 망가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우산씨같은 이가 있다면 상처를 위로받으며 살아가게 되겠지.
엄마만 있었어도!
해주는 자신의 인생을 살고 영주는 희망을 노래했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행과 절망론을 너무나 그럴듯하게 단정하는 영주에게 설득당하는 것보다 막연한 기대에 서슴없이 단정하는 우산씨에게 설득당하는 게 낫지 않을까. 비도, 긴 잠도, 파스 냄새가 사라질 날도, 집 나간 엄마도, 빚을 갚을 날도, 행복도 내일이면 올 거라는 느긋한 태도를 닮아가던 해주를 나도 닮아가보련다.
이쯤 되니 집을 나간 엄마도 이해가 되고 망가짐을 자초하던 영주도 이해가 된다. 꿈을 꿔보지도 못한 해주도, 꿈을 접어야만 했던 재하도 안쓰럽다. 그렇지만 추잡하고 무능력하고 찌질한 아빠는 참 이해가 안 된다.
아빠만 정신 차리면 내일이라도 빚을 갚을 수 있다는 해주의 충고를 제발 실천하고 살기를.
어떤 화가는 우산을 비밀스러운 하늘이라고 했대요. -p.172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 보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산이 등장한다. 우산을 펼치면 오로라에 눈을 뗄 수 없다. 그런 예쁜 우산속이라면 비밀스런 하늘을 간직한듯한 기분이 들것만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