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소설,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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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듣기를 병적으로 좋아하고 닥치는 대로 읽으면 미친 듯이 쓰고 싶다는 열정만으로도 부엌 테이블에서 이런 글이 써지는구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의 동일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저 다른 이야기로 읽힌다. 우선은 핀볼을 찾아봤다. 오래전 어느 오락실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아직 읽어보질 못해서 철학적 연관이 지어지진 않는다.

'나'는 문득 스무 해로부터 멀리 떠나온 기분을 느낀다. 나오코의 미소는 '나'에게 끝나지 않을 상실감을 남긴다. 그리고 더 이상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다. 갈망도 욕망도 바람도 없는 삶. 그는 어떠한 의문도 질문도 해답도 찾지 않는다. 그저 연기처럼 흩어지고 바람처럼 흘러가는 시간에 움직임만 부여할 뿐이다. '나'는 온갖 세상의 잡다한 서류들을 번역하며 일상을 산다. 다행이다. 세상이 굴러가는데 필요한 톱니바퀴는 되어 있다. 딱히 의미 있는 번역도 의미 있는 일도 아니지만 생활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로부터 700킬로 떨어져 지내고 있는 '쥐'는 여전히 섹스와 죽음이 빠진 소설을 쓰고 있으며 빠져버린 계절의 시간을 메우지 못한 채 여전히 고독하다. 시간이 지나가도록 슬쩍 자리를 비켜주기로 작정한듯하다. 한 여인을 만나 사는 모습이란 걸 잠시 떠올려보지만 자신은 그녀에게 기댈 공간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나'와 쥐의 일상을 포개어 본다. 그들은 겉돈다. 나가 쥐 같기도 하고 쥐가 나 같기도 한! 오묘한 기류를 느낀다. 두 사람 모두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쌍둥이와 함께 지낸다. 쌍둥이는 '나'를 보살펴 주는 영혼의 그림자 같다. 혼자서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의지하게 된다. 때로는 커피가 되고 때로는 말동무가 되어주며 균형을 잡아준다. '나'에게 쌍둥이란 존재가 있다면 쥐에겐 제이가 있다. 제이는 맥주 같은 존재로 쥐곁에 묵묵히 존재감을 유지한다.

갑작스레 무언가를 잃으면 급속하게 무언가에 빠지기도 한다. 무언가에 몰두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인간의 욕망이다. 나오코의 죽음 뒤 '나'는 어느 날 핀볼 게임에 상실감을 쏟아붓는다. 기계가 보내는 미소는 나오코의 미소만큼 행복감을 주었다. 기계의 반짝이는 불빛은 끝없는 해방감마저 선사한다. 최선을 다해 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핀볼 기계가 울려대는 소음이 위로의 말로 들린다.

당신 탓이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끝났어요, 모든 것이. ​

어느 날 핀볼 게임기가 사라진다. 미친 듯이 열정을 쏟았던 존재의 사라짐은 '나'가 느낀 두 번째 상실감이다. 그랬기에 핀볼의 존재에 집착했으리라. 스페이스쉽이라는 한정판에 일본에서는 고작 세대뿐인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존재이자 어쩌면 고철덩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존재지만 '나'에게는 기록 갱신용이 아닌 그저 그리운 존재였을 뿐이다. 나오코처럼.

수소문 끝에 커다란 창고 입구에 도착한 '나'는 핀볼 기계를 보러 가기까지 극심한 긴장감에 놓인다. 마치 죽은 나오코를 만나러 가는듯한 기분이다. '나'가 창고 불을 켠 순간 마주한 건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 늘어서 있는 기계 덩이가 아니라 그 공간을 부유하던 내면 저 깊은 곳의 상실감이었다. 그랬기에 그토록 두려웠으리라.

괴로워?

아니, 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無에서 생겨난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뭐.

'나'와 쥐는 이제 출구를 찾은 듯하다. 입구와 출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그에게 쌍둥이가 머물다 간 것도 그런 의미일까. 의식은 내면의 고립에서 벗어나 어느 방향으로든 줄기를 찾아 흐른다. 때로는 과거의 죽어버린 시간이 불러온 환상에 고립되어 있던 자아가 치유되기도 한다. 불확실한 미래는 그저 '아마도'일뿐이다. 이러한 불완전한 일들의 순환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깨달아가며 가벼워져 가는 게 아닐까.

아니. 가벼워져가면 좋겠다.


인간은 어떤 것에서든지 노력만 하면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야. 아무리 흔해 빠지고 평범한 곳에서도 반드시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다구.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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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카페
프란세스크 미랄례스.카레 산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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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은 한국소설 한 권이 떠올랐다. <시간을 마시는 카페>라는 이 소설에도 마법 카페가 등장한다. 아스가르드 카페는 과거와 미래의 연결통로 역할을 했다면 <일요일의 카페>의 길모퉁이 카페는 현세와 내세를 연결 짓고 있는 공간이다. 즉 이 소설은 판타지물이다. 오래전 방영된 환상특급이 떠오르기도 하고 심리치유를 위한 어른 동화 같기도 하다.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최대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설레임이다. 편안한 분위기와 음악, 그리고 맛있는 차 한 잔이면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할 정도다. 이 소설이 더욱 힐링 소설로 읽히는 이유는 그런 치유의 공간에서 일어난 마법으로 한 여인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데 있다. 두 분의 작가가 함께 했다는 점도 특이했다. 참, 사랑스런 일러스트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나처럼 표지에 이끌려 덜컥 결제부터 할는지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나쁜 선택을 하려 한 이리스. 그녀의 기분은 이미 선로로 발을 옮기려던 중이다. 그 찰나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일이 일어난다. 생과 사가 갈릴 뻔한 그 짧은 순간, 터지는 풍선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며 살아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리스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필요했다. 자신의 슬픔을 덜어줄 그 누군가가.

어찌 되었든 끔찍한 순간을 피한 뒤 그녀에게 낯선 카페가 들어온다. “이 세상 최고의 장소는 바로 이곳입니다.”라는 카페명이 어딘가 부담스럽지만 누군가 일부러 자신의 취향을 맞춘 듯 그녀는 카페 분위기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낀다. 나 역시 일러스트를 보며 상상을 하고 있자니 휘핑크림 잔뜩 얹은 커피 냄새가 어디선가 나는 듯하다. 이리스는 그곳에서 루카라는 남자와 합석을 하게 되고 석연치 않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카페에 마련된 여섯 테이블은 저마다 테마를 가지고 있었다. 기억의 탁자, 희망의 탁자, 용서의 탁자... 그 자리에 앉아 루카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는 이야기뿐 아니라 그에게 점점 빠져들게 된다.

사랑의 힘은 살아갈 힘을 부여한다. 이리스는 과거의 아픔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다. 카페 주인인 마법사와 루카는 그녀에게 힌트를 주고 또 준다. 고장 난 시계와 주머니 선물과 그리고 작은 메모지 한 장을.

그리고 카페는 홀연히 사라진다.

그녀에게 카페를 찾았던 그때부터가 변화였고 카페가 사라진 이후에도 변화를 계속된다. 그 변화는 그녀는 점점 나아가게 한다. 정녕 우리의 삶 깊숙이 어떤 운명의 힘이 존재하는 걸까. 강아지를 입양하기로 결정한 순간 오래전 인연의 끈이 다시 이어지고 새로운 결심은 새로운 만남과 공간으로까지 이어진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마법 카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그것 또한 사랑의 힘이 만들어 낸 기적이다. 아주 가슴 찡한.

과거를 잘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현재에 일어나는 일보다 현재에 속하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스가 선택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을 함께 하면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 최고의 시간과 장소가 어디인가를 결정짓는 것? 뻔하지만 마음가짐일 테지. 그때마다 쓰자. 버킷리스트고 쓰고 좋은 일 나쁜 일도 쓰면서.. 그러면서 현재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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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스터머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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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스텀 280의 유리 문을 민다. 나는 플라스크에 담긴 눈알을 본다. 동물 눈알은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그 옆 진열대에 주르르 놓여 있는 인간 눈알의 샘플 하나를 가리킨다. 이거 하나 붙여 주세요. 이마에다가.

<커스터머>속 세상은 그런 것쯤은 귀걸이나 코걸이를 걸듯 뚝딱할 수 있다. 메타버스 속 아바타가 아닌 자신의 신체를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디자인할 수 있다. 눈 색상은 물론이고 모양까지 바꿀 수 있으며 팔을 호스로 바꾸거나 피부색을 바꿀 수도 있다. 뿔을 달거나 날개를 달 수도 있으며 어깨에서 꽃이 피어나게 할 수도 있다. 놀랍도록 기술은 진화해서 무엇이든 가능하다. 생명체의 진화는 끝난지 오래이고 이제는 변형이 대세인 시대다. 생물과 무생물 안되는 게 없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강아고양이는 over지만 움직이는 돌맹이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반면 이런 유전자 변형으로 생긴 돌연변이도 있다. 요기까지만 생각하면 와~~ 멋지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세상이 한번 뒤엎어지고 난 후 인간들은 더 조심스럽고 불안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똑같이 살아남았음에도 어떤 계층은 죄책감에 억눌려 있고 어떤 계층은 분노에 억눌려 있다. 공부를 잘해야지만 빛을 볼 수 있다는 말이 모래바람만큼 갑갑하다. 그만큼 고착화된 계급 문제를 해결하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화합은커녕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불안정해 보이는 세상이다. 재건의 날이랍시고 행하는 의식 자체도 오히려 그날의 아픔을 부채질하는 듯 불편해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노력은 한다. 통합 교육 정책이 그런 의도였으니까.

인간은 날씨 하나에도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존재다. 그만큼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 되는 것도 있다. 수니가 사는 웜스구역은 전 세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어대는 모래바람을 감당할 수 없다. 모래가 가득한 도시에 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지끈거리고 깝깝하다. 그런 수니에게 태양시의 고등학교 통지서는 빛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입장권이 아니고 무엇이랴.

수니의 삶을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면 고등학교 입학을 그 경계지점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그만큼 수니는 엄청난 성장을 이룬다. 커스터머는 한 소녀의 성장기이자 '다름에 관하여'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 수니는 그토록 원하던 커스텀을 한다. 룸메이트 안을 향한 사랑과 어느 날 이마를 뚫고 나온 뿔에도 당당하다. 수니의 용기는 태양시의 진짜 햇빛이 만들어낸 것일까. 모래시의 억압이 만들어 낸 것일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지금보다 더 잔인하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이라고 나눈 거 자체가 아이러니지만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난 이들을 향한 비난이 도를 넘는다. 모든 건 인간의 과한 욕망 때문에 생겨난 결과임에도 커스터머를 혐오하고 돌연변이를 저주라 여긴다. 비단 인간의 비난 욕구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중성인으로 태어난 사람들까지 인류의 해악으로 여긴다.

비마저도 다양한 이름을 지니는게 세상인데 사람들은 존재의 다양성을 불편해한다. 어째서일까. 모래 색깔에 맞춘 건물들 사이로 파란색은 그저 튀는 색이자 거슬리는 색일 뿐이다. 어째서일까.

참 성가시다. 이런 것들에 의문을 가져야 되는 일이. 희망과 유대는 은밀한 조롱과 불쾌한 속삭임에 껍데기로만 존재한다.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건 커스텀이 아니다.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건 차별과 혐오, 선입견과 조롱, 비난과 원망 등의 감정들이다. 지금도 뿌리깊게 내려진 이러한 감정들이 힘든 팬데믹 시대를 갉아먹고 있지 아니한가.

한낮의 열기와 저녁의 서늘함, 비가 내린 후의 촉촉함, 다시 해가 뜬 후의 맑은 마름. 이런 날씨를 누릴 권리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구역 안에서 누군가에겐 과한 빛을 누군가에겐 어둠과 그늘만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 수니는 중성인인 안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음을 안다. 그처럼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들기 전에 경계를 허무는 것부터가 제대로 된 재건의 시작이 아닐까.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그저 그 선택을 존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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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호에 핀 꽃 사거리의 거북이 16
김춘옥 지음 / 청어람주니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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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잘 만나 태어나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일까.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깔리면 늘 드는 생각 중 하나다. 누군가의 열두 살은 오래전 누군가의 열두 살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오래전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시기를 따져보면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고 있는 이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겼다. 나라 잃은 설움을 환희로 되찾은 것도 잠시 다시 이념의 전쟁터로 전락한 한반도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념의 희생자가 되고 외세의 힘에 그어진 38선으로 생이별을 겪은 사람들이 넘쳤다. 지금은 북한과의 외교가 중단된 상태이기에 이산가족 상봉이니 금강산 여행이니 하는 뉴스가 끊어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TV에서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소양호에 핀 꽃>의 시대적 배경은 그런 민족의 비극을 담고 있다. 그랬기에 지금 세대들에게는 무덤덤해졌을 당시의 아픔을 공감하고 과거의 잘못을 돌아볼 수 있겠다.

가람이는 어느 날 자신에게 증조할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머나먼 북쪽 땅에서 말이다. <소양호에 핀 꽃>은 가람이네 할아버지가 그 안타까운 상봉 현장의 주인공이다. 어찌하여 할아버지는 5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서야 증조할아버지를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가람이는 할아버지와 방을 나누어 쓰는 사이다. 가람이는 증조할아버지와의 만남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계실 할아버지를 위해 가계도를 직접 그려 선물하기로 한다. 그런데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없던 가람이는 궁금해진다. 그리고 상봉전 지금은 사라진 마을 구만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때는 광복이 되기 직전부터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의 시대로 가람이의 할아버지가 열두 살이던 시절이다.

할아버지의 모습으로만 보아왔던 가람이에게 할아버지에게도 나와 같은 열두 살(준태)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도 묘하지만 생소한 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더욱 낯선 세상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저물어가던 시기였으나 일본인들은 더욱 악착같이 조선인들을 괴롭혔다. 긴 전쟁에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져가고 정신적으로는 무기력해져간다.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 아버지로 인해 준태의 마음 한켠은 원망도 서려있다. 반면 승우네처럼 친일파로 전향한 집들은 큰 소리를 치며 같은 동포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기도 한다.

소양호는 구만리와 대흥리 사이를 흘렀고 사람들은 사공의 도움으로 그곳을 오갔다. 구만리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준태와 승우, 난이는 마냥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일 수가 없다. 준태와 승우는 한바탕 쌈질을 할 수밖에 없었고 난이는 승우네 아버지로 인해 아버지가 주재소로 끌려가는 일을 당하게 된다. 이쯤 되면 이 세 친구에겐 우정 따위는 존재할 수 없을 듯 보인다.

그러나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 되자 상황이 달라진다. 준태의 아버지가 돌아왔고 친일파였던 승우네는 마을에서 쫓겨난다. 게다가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민족은 갈라질 조짐도 보인다. 준태에게 소양강은 돌아온 아버지와 낚시를 하며 부자간의 정을 돈독히 한 곳이자 난이와의 추억도 있는 곳이었지만 더 이상 소양강은 그런 추억의 강으로 남지 못한다.

"내가 돌아오는 날, 낚시하러 가자꾸나." -p.99

난이 아버지의 말처럼 강물에는 모든 삶이 다 들어있는 듯하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비극까지도 조용히 떠안고 흐른다. 무심하다고 느낄 만큼. 오래전 준태에게 강은 비극과 막연한 기다림의 장소일 뿐이었다. 그러나 강은 무심하지 않았다. 오래전의 약속을 잊지 않은듯하다. 이제 준태에게 강은 치유의 장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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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2022 : Better Normal Life
김용섭 지음 / 부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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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는 우리의 생활 전반을 뒤엎었다. 저마다 이전과는 달라진 세상, New Life를 부르짖었다. 나 또한 체감의 온도가 상승중이었기에 이제는 공부란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불을 지핀건 경제공부를 하면서다.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변화의 바람은 불어왔고 그 바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때 무엇보다 트렌드 공부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점을 가면 제일 먼저 향하는 쪽이 소설 코너다. 즉 나란 사람은 경제 인문 코너 쪽은 거들떠도 안 보았었다. 그런 내가 서점 입구에서 경제도서로 직진한 건 대단한 사건이다.ㅋㅋ

이미 김용섭 소장님의 트렌드 분석 영상은 맛보기로 몇 편 보았다. 이 트렌드 시리즈가 해마다 출간되고 있었단 사실도 몰랐으니 내가 얼마나 변화에 무딘 채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코로나는 내 지적 영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준 셈이다.

이 책이 좋았던 건 Better라는 단어가 주는 긍정의 에너지 때문이다. 2년이라는 팬데믹을 지나오는 동안 많은 이들이 부정적 감정에 시달려왔다. 그로 인해 사회는 더 다양하고 세분화된 격차와 분열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불평과 불만이 속출한다. 의심과 불신이 당연시되고 가짜 뉴스에 불안심리는 극대화된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 기사를 피해 종이 신문으로 옮겨 왔다. 어처구니없는 막말 댓글을 안 봐서 속이 후련하다.

사실 전문가들은 2022년은 위기가 가속화될 것이라 말한다. 더 힘들 거라고. 듣기만 해도 아찔하다. 아니 지금까지 힘들었는데 더 힘들 거라니. 하지만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위기대응능력이 출중하지 않은가. 아침에 신문을 펼칠 때마다 그런 기사들을 보아왔다. 백신을 개발하고 더 발 빠른 코로나 검사지를 만들어 내고 코로나 잡는 친환경 페인트와 코로나를 식별하는 마스크 등등. 대단하지 아니한가.


우리는 좀 더 긍정적이 될 필요가 있다. 그만큼 개인의 트렌드 대응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비즈니스적인 사고도 필요하다. 돈도 벌어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선 트렌드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Repair, Gardening, Small Action, Multiverse, Unlimited Style, All round veganism, 오염 엘리트, 클러터 코어, 크래프트 소비, 디지털 자산 등의 트렌드 키워드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내가 제일 먼저 찾아 읽은 건 환경도서였다. 비거니즘과 스몰 액션에 동참했다. 집콕 생활에 반려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고 식습관과 내가 소비하는 물건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미 샴푸와 린스와 바스대신 비누 하나로 머리를 감고 목욕도 한다. 미니멀을 고집하는 건 아니지만 굿즈에 대한 욕심을 버린 지도 오래다. 쓰레기를 줄이는 게 쉽지는 않지만 버리는 양에 늘 신경을 쓴다.

수많은 데이터가 말하고 있다. 가죽을 얻기 위해 10억 마리 이상의 동물의 희생되고 전 세계 농지의 80% 이상이 가축을 위한 곡물을 재배하는 데 쓰이며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15% 이상이 축산업에서 나온다. 전 세계 산업 폐수 중 20%가 패션산업에서, 세계 탄소 배출량의 약 10%가 의류와 패션산업에서 발생한다. 이미 우리는 너무 과하게 먹고 있지만 전 세계인의 10%에게는 기아 문제가 심각하다. 환경과 지구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친절한 소비주의가 필요하다는 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스몰 액션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주변을 바꾸는 일이다. -p.236

기업이 하는 친환경 사업도 놀랍다. 포도껍질, 사과 껍질, 파인애플 잎과 줄기, 버섯균으로 가죽을 만든다. 명품을 리페어하고 호텔은 비건 프렌들리 사업에 공을 들인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 업계와 철강, 선박 산업이 변화하고 있다. 이처럼 친환경 액션에 동참하고자 하는 고객은 자연스럽게 ESG 사업에 공을 들이는 기업에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2022년에는 멀티버스가 가속화될 것이다. 이제 메타버스가 뭔지 블록체인과 NFT가 뭔지 책으로 살펴본 게 다인데 22년에는 체험이란 걸 해 보려 한다. 최근 MBTI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 지인들 중에 이 테스트를 신뢰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가끔은 그 유형에 자기를 꿰다 맞추려는 듯 과해 보이긴 하지만 그만큼 자기 자신을 알려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지만 반면 자기중심 위주의 사고방식은 위험하다. 이 검사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비전문가 모녀에 의해 탄생된 테스트 하나가 코로나 시대 구글 검색창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사실도 재밌는 현상이다. 이렇듯 긴 팬데믹은 유행에 휩쓸리는 삶이 아닌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문화로 바뀌어가고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며 특정 현상에 편승하기보다는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맥시멀리즘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트렌드의 흐름에 올라타야지만 Better가 가능하다. 내 삶 어느 부분이 트렌드에 걸맞는지 혹은 맞추어갈 수 있는지를 고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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