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소설,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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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듣기를 병적으로 좋아하고 닥치는 대로 읽으면 미친 듯이 쓰고 싶다는 열정만으로도 부엌 테이블에서 이런 글이 써지는구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의 동일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저 다른 이야기로 읽힌다. 우선은 핀볼을 찾아봤다. 오래전 어느 오락실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아직 읽어보질 못해서 철학적 연관이 지어지진 않는다.

'나'는 문득 스무 해로부터 멀리 떠나온 기분을 느낀다. 나오코의 미소는 '나'에게 끝나지 않을 상실감을 남긴다. 그리고 더 이상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다. 갈망도 욕망도 바람도 없는 삶. 그는 어떠한 의문도 질문도 해답도 찾지 않는다. 그저 연기처럼 흩어지고 바람처럼 흘러가는 시간에 움직임만 부여할 뿐이다. '나'는 온갖 세상의 잡다한 서류들을 번역하며 일상을 산다. 다행이다. 세상이 굴러가는데 필요한 톱니바퀴는 되어 있다. 딱히 의미 있는 번역도 의미 있는 일도 아니지만 생활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로부터 700킬로 떨어져 지내고 있는 '쥐'는 여전히 섹스와 죽음이 빠진 소설을 쓰고 있으며 빠져버린 계절의 시간을 메우지 못한 채 여전히 고독하다. 시간이 지나가도록 슬쩍 자리를 비켜주기로 작정한듯하다. 한 여인을 만나 사는 모습이란 걸 잠시 떠올려보지만 자신은 그녀에게 기댈 공간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나'와 쥐의 일상을 포개어 본다. 그들은 겉돈다. 나가 쥐 같기도 하고 쥐가 나 같기도 한! 오묘한 기류를 느낀다. 두 사람 모두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쌍둥이와 함께 지낸다. 쌍둥이는 '나'를 보살펴 주는 영혼의 그림자 같다. 혼자서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의지하게 된다. 때로는 커피가 되고 때로는 말동무가 되어주며 균형을 잡아준다. '나'에게 쌍둥이란 존재가 있다면 쥐에겐 제이가 있다. 제이는 맥주 같은 존재로 쥐곁에 묵묵히 존재감을 유지한다.

갑작스레 무언가를 잃으면 급속하게 무언가에 빠지기도 한다. 무언가에 몰두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인간의 욕망이다. 나오코의 죽음 뒤 '나'는 어느 날 핀볼 게임에 상실감을 쏟아붓는다. 기계가 보내는 미소는 나오코의 미소만큼 행복감을 주었다. 기계의 반짝이는 불빛은 끝없는 해방감마저 선사한다. 최선을 다해 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핀볼 기계가 울려대는 소음이 위로의 말로 들린다.

당신 탓이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끝났어요, 모든 것이. ​

어느 날 핀볼 게임기가 사라진다. 미친 듯이 열정을 쏟았던 존재의 사라짐은 '나'가 느낀 두 번째 상실감이다. 그랬기에 핀볼의 존재에 집착했으리라. 스페이스쉽이라는 한정판에 일본에서는 고작 세대뿐인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존재이자 어쩌면 고철덩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존재지만 '나'에게는 기록 갱신용이 아닌 그저 그리운 존재였을 뿐이다. 나오코처럼.

수소문 끝에 커다란 창고 입구에 도착한 '나'는 핀볼 기계를 보러 가기까지 극심한 긴장감에 놓인다. 마치 죽은 나오코를 만나러 가는듯한 기분이다. '나'가 창고 불을 켠 순간 마주한 건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 늘어서 있는 기계 덩이가 아니라 그 공간을 부유하던 내면 저 깊은 곳의 상실감이었다. 그랬기에 그토록 두려웠으리라.

괴로워?

아니, 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無에서 생겨난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뭐.

'나'와 쥐는 이제 출구를 찾은 듯하다. 입구와 출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그에게 쌍둥이가 머물다 간 것도 그런 의미일까. 의식은 내면의 고립에서 벗어나 어느 방향으로든 줄기를 찾아 흐른다. 때로는 과거의 죽어버린 시간이 불러온 환상에 고립되어 있던 자아가 치유되기도 한다. 불확실한 미래는 그저 '아마도'일뿐이다. 이러한 불완전한 일들의 순환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깨달아가며 가벼워져 가는 게 아닐까.

아니. 가벼워져가면 좋겠다.


인간은 어떤 것에서든지 노력만 하면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야. 아무리 흔해 빠지고 평범한 곳에서도 반드시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다구.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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