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디 아워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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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6월의 어느 하루. 세 여인은 자신 본래의 이름으로 살고 싶어 한다. 지긋지긋한 그 시간들(The hours)을 버리고.

1923년, 버지니아 울프는 <델러웨어 부인>의 삶을 궁리 중이다. 부인에게 부여할 자유와 권리에는 그녀의 내재된 욕망으로 충만하다. 부인이 살아가는 소설 속 세상은 버지니아 스티븐, 그녀가 원하는 삶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익히 알다시피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운 채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완성된 책은 1949년, 로라 브라운의 삶을 흔든다. 그녀는 스스로 이름 없는 존재라 여기며 살고 있다. 남편이 꿈꾸던 이상적 삶에서 그녀는 그저 보조출연자이자 부속품인 것만 같다. 어린 아들과 뱃속의 아기, 다정한 남편이 있음에도 그녀는 다른 세상을 향한 문을 찾고 싶어 한다. 다른 세상에서라면 그녀는 평생 책을 읽으며 보냈을지도 모른다. -p.65 그녀는 우울하고 싶지 않다. 망쳐버리는 건 케이크 하나면 족하다. 실패하는 것 역시 케이크 하나여야만 한다. 마음은 이미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다. 로라 지엘스키로!

그리고 현재, '델러웨어 부인'이라고 불리던 클러리서 본은 연인의 파티를 준비 중이다. 열여덟, 그녀의 청춘은 사랑으로 충만했지만 그에게 새 애인이 생기는 걸 지켜보았으며 이제 꺼져가는 그를 돌보고 있는 오십 대의 여인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댈러웨어 부인'이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그 여름날의 높은 둔덕 위에 서 있을 것이다.-p.196 남들 눈엔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녀 역시 그녀의 삶이 그녀만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과거의 어느 순간들을 부여잡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순간들을 그리워할 때마다 마음은 초라해질 뿐이다.

<디 아워스>는 영화를 먼저 보길 추천한다. 그래야지만 책 속 문장이 하나하나 들어온다. 영화의 연출이 워낙 훌륭해서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이 차오른다. 그렇지만 책을 지나칠 수가 없어 재독을 했다. 재밌는 문장이 딱 걸려든다.

"그러니까 침대에 들어올 거지?"

"네."

그녀에게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멀리서. -p.314

남편의 요구가 얼마나 싫은지 단번에 알겠다. 왈왈.

정신이 멀쩡한 클러리서는 런던을 사랑하고, 자기 삶의 평범한 즐거움을 계속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어느 미치광이 시인은, 어느 몽상가는 죽음을 택할 것이다.-p.310

리처드는 버지니아와 닮아 있다. 버지니아는 댈러웨어 부인을 죽이지 않았지만 정작 자신은 자살한다. 남편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리처드는 클러리서를 댈러웨어 부인이라고 불렀지만 그녀를 놓아주기 위해 자살한다. 한때의 행복했던 순간을 간직한 채. 버지니아는 댈러웨이 부인을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한다. 한 존재가 살아 있을 때 차지하는 공간이 죽었을 때의 그것보다 얼마나 더 큰지. -p.246

이 소설은 각기 다른 시공간에 사는 세 여인의 하루를 담고 있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공통분모를 안고. 그렇기에 철저히 세 여인의 삶만 들여다보아야 한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리처드나, 버지니아에게 최선을 다하던 남편까지 챙기다 보면 감정이 너절해진다. 그녀를 기억해? 또 다른 당신 말이야. 그녀는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p 294 라고 말하는 리처드의 슬픔까지 생각하면 브라운 부인은 이기적인 년일 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자기만의 방이라고 겨우 들어온 곳이 호텔 방이지만 그녀의 새로운 시도에는 변명이 덕지덕지 따라붙는다. 죽음은 간단하지만 자신의 삶을 더 사랑했음을 깨닫고 차선을 택한 그녀에게 공감해야 한다. 우리는 그녀의 슬픔이 평범한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p.303

수많은 선택지에서 방황하고 어쩔 수 없는 선택지에서 고통받고 또 그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게 인생이다. 누군가는 그 평범한 하루조차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게 인생이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한 팔십이 된 로라는 이런 말을 한다. 여자로서의 삶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어쩌면 자신의 선택에 조금은 뻔뻔해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꽃이 피고 지듯 우리의 순간들도 그렇다. 이 지금의 시간을 살게 해 주는 것들이 그런 평범한 기대감이 아닐까. 시간은 흐르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제 끝날는지도 미지수다. 그러니 내 앞에 놓인 그 시간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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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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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장이 되어봐, 단 하루만이라도. -p.13​

루시는 불행했다. 여러 이유로.

그녀가 떠나온 고향은 어린 소녀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고국의 암울한 역사는 여전히 삶을 가난하게 했고 사람들의 의식은 변화가 더뎠다. 당시 미국의 이민정책이 없었다면 그녀 역시 고향땅에서 매를 맞거나 목이 베이거나 몸을 팔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죽하면 여자 유다로 낙인찍고 마찰이 일 때마다 증오와 분노와 경멸로 상대했을까.

열아홉, 목덜미를 옥죄던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구명보트가 되어준 곳은 미국 상류층의 부엌에 딸린 작은방이다. 그녀는 친절한 미국인 부부와 사랑스러운 네 아이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오히려 지우고 싶던 고향땅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의 삶은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었고 영원히 그럴 것만 같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 -p.21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p.26

어떻게 하면 그래요? -p.37​

이곳은 루시가 지금껏 경험한 세상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곳이다. 피정복자와 점령지.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느끼고 흘리는 눈물의 맛은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는 한 절대 맛볼 수 없는 차원의 것들이다.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과 풍경을 대하는 태도와 아낌없는 친절과 진심 어린 위안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랐다.

루시는 고향에 남겨진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몇 통의 거짓 안부를 띄운다. 엄마가 전하는 고향의 소식은 그녀에게는 고통의 연속이다.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구질구질한 공포는 오래도록 쌓여 온 애증에 증오심만 키울 뿐이다. 결국 그녀는 차단하는 쪽을 택한다. 눈 덮인 세상의 부드러움을 견디고 싶었다. 굉장하지 않아? 아름답지 않아? 라는 머라이어의 감정에 언젠가는 동조할 수 있는 처지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꽁꽁 봉투를 봉했으리라.

내게 머라이어는 엄마 같았다. -p.89 엄마는 떨쳐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머라이어와 가까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쩌면 자신이 원하던 엄마의 모습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이지 않은가. 엄마와의 닫힌 문 대신 또 다른 문이 되어준 머라이어가 있었다는 사실이. 긍정의 기운이 루시에게 옮아감을 보았다.

넌 정말 화가 많은 애구나. 그렇지? 그녀의 화는 자격지심에서 오는 빈정거림이 아니었다. 불평등한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는 단지 어렸을 뿐이었다. 루시는 새로운 사람과의 첫 대면에서 상대가 내뱉는 첫마디에 예민하다. 페기와 휴는 좋았지만 다이나는 싫었다. 그뿐이다. 머라이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제는 이해하고 진실과 허위를 구별할 줄도 안다. 루이스와 머라이어 사이에 균열이 일고 산산조각이 나는 과정을 보며 삶의 기복의 당연함도 깨닫는다.

하루키 데뷔작에 등장하는 쥐라는 인물도 그렇게 낯선 세상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살면서 익숙해진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일 아닐까?"라는 휴의 말까지 곱씹어 보니 이것은 루시의 입장과 비슷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으면 공감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루시는 삶을 담는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모습들을 담는다. 뚜렷한 이유가 없는 즐거움. 그건 치유다.

멀찍이서 들여다보면 루시는 이제 겨우 스무해를 살았다. 그렇지만 인생에서 성장기가 차지하는 비중의 중요성을 알기에 루시의 화에 공감이 된다. 태어나기전부터 성가신 존재였고 태어나서는 귀찮은 존재에게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엄마를 보며 같은 여자지만 그점은 참으로 공감하기 어렵다. 마지막 돈까지 탈탈 털어 인연을 끊고 싶어했을 루시가 어찌나 안스럽고 외로워보이던지.

다른 건 몰라도 엄마를 보며 보고 배운 교훈의 효과는 확실했다. 남자를 쉽게 믿지 않은 건 박수! ㅎ 스무 살 루시의 독립기는 이제 시작이다. 노트에 적은 문장을 보며 다시 한번 사랑과 증오가 나란히 공존함을 보았다. 혀의 맛이 아닌 오로지 감각으로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마침내 난 여전히 두렵긴 해도 숲속을 걷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서 혼자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숲에 근사한 면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조금씩 확장해가는 내 세계에 그렇게 또 하나를 덧붙였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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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 강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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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뜬금없이 사달라고 요청한 책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거미 그림의 강렬한 표지에 이런 걸 읽겠다고? 했으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이라 바로 구매해 주었다. 물론 딸아이는 읽다가 중단한 상태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니까. 2월 9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는 <나일 강의 죽음>을 운 좋게 책으로 먼저 만나보게 되었다. 미스터리물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한번 잡으면 놓지 않고 보는 편이다. 애거시 크리스티의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이다. 책의 두께만 보면 이틀 정도 걸리지 않을까 했으나 몇 시간에 걸쳐 완독이 가능했다. 그만큼 잘 읽힌다. 아니 읽힐 수밖에 없다. 범인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신은 어쩜 그리도 불공평한지. 한 사람에게 몰빵하는 건 아니지 않나.ㅎ 상속녀 리넷 리지웨이는 미모와 재력을 겸비한 행운녀였다. 영국에서 제일 돈이 많은 여자이자 아름답고 몸매까지 완벽한 여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녀 주위에는 그녀를 질투와 시기 혹은 원망과 분노의 눈길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눈부신 미모를 무기로 그녀의 친구인 자클린의 약혼자마저 빼앗게 된다. 떡 벌어진 어깨, 햇볕에 그을린 얼굴 짙푸를 눈, 순수한 미소를 지닌 사이먼 도일을.

누가 봐도 행복한 선남선녀. 그들은 재력가답게 이집트로 긴 신혼여행을 떠난다. 두 사람은 나일 강을 따라 호화로운 유람선에 몸을 싣지만 그들은 내내 불안하다. 리넷의 친구이자 약혼자의 전 여친이었던 자클린을 내내 마주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전부였던 남친 사이먼 도일을 빼앗긴 뒤 그녀는 이성을 상실한다. 두 사람을 총으로 쏴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그들 부부의 곁을 맴도는 것으로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 즐거울 리 없는 리넷은 마침 탐정 푸아로에게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푸아로는 철저히 자신의 관점에서 변명하는 리넷에게 초연하고 냉정하고 날카로운 태도를 유지한다. 탐정은 심리에도 탁월해야 하는구나. 자클린의 상황이 배제된 감상적인 사실과 진실은 그들 부부의 속 사정일 뿐이다. 푸아로가 지적한 죄책감이란 단어에 리넷은 정곡을 찔린다. 용납하고 싶지 않겠지만.

리넷의 부탁은 거절했지만 푸아로는 자클린을 만나 어떤 선택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길인지를 설득한다. 하지만 오뉴월의 서릿발을 품은 그녀에게 들어먹힐 리가 없다.

마침내 자클린은 사이먼과 마주하게 되고 술에 취한 자클린은 흥분한 채 사이먼을 향해 한방을 날린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선상. 그런데 어이없게도 다음 날 아침, 리넷이 자신의 선실에서 차가운 시체가 되어있다.


저 아가씨는 지나치게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군, 그건 위험하지. 그래, 위험해. -p.30

이 사건은 사랑 때문에 벌어진 비극처럼 보인다. 지독하게 자존심이 강했던 자클린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그래서일까. 추리만 했다 하면 헛다리를 짚던 내가 내가 범인의 윤곽을 잡아버린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법이니까 말이야 -p.32 역시 모든 사건의 중심은 돈이다.

푸아로는 승객들의 알리바이와 목격자 탐문 수색을 한다. 그 사이로 각자의 음료 취향만큼 각자의 숨겨진 욕망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리넷과 여러 가지로 돈에 얽혀 있거나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의 실마리는 의심과 의심에 의해 거듭 밝혀지는 것이겠지만 배 위에는 그들과는 상관없이 진실한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의심을 거두고 확신을 주는 사람들 말이다.

이건 불공평해요. 몇몇 사람이 모든 걸 다 갖고 있다고요.-p.170

작가는 이 추리극 한편에서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돈 나고 사람 난 자본주의의 폐해와 타락함을 꼬집고 있다. 그 비틀림의 정점은 혐오와 증오를 넘어선 범죄다. 가진 것 덕에 호강을 한다는 이유로 기생충이 되고 가진 것이 많다는 이유로 거드름을 피운다고 여긴다. 가진 것이 많으면 어딜 가나 부러워하고 탐내는 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더 흉측한 자화상은 욕망과 탐욕에 일그러진 우리의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본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 딱 들어맞는다.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사건은 더 복잡해져갔으나 탐정은 예리했다. 범죄의 동기를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이치에 닿는 진실을 찾는 것이 포인트였다. 오랜만에 고전 미스터리물의 맛을 제대로 음미했다. 2월 화려한 영상으로 그들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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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뚜껑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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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책을 덮고 시집을 읽다 이 책이 갑자기 떠올라서 다시 펼쳤다. 영화도 봤기에 줄거리는 대략 알고 책도 분명 읽었었는데 재독하니 새롭다. 바다의 뚜껑이 노래 제목이었단 사실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무래도 문장에서 풍기는 감성보다는 장면 장면 남아있는 영상 때문일 수도 있겠다.

미래의 트렌드를 파악하다가 이 책이 떠오른 건 마치 짠 음식을 먹은 뒤 자연스레 오는 갈증인지도 모르겠다. 실은 세상의 변화가 나는 버겁다. 나의 성향은 빙수 가게 주인 마리와 비슷하다. 느리지만 그 속에서 재미를 찾는 삶 말이다.

마리는 초라해져만 가는 고향땅을 보며 내내 아쉬움을 느낀다. 동시에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허탈감에 마음은 수십 번 뭉클거리며 끊어 오른다. 그런 곳에서 빙수 하나로 가게를 차린 건 잃어버린 것들과 사라져가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를 지키고 싶은.

어떠한 순간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 주는 경우는 많다. 세상의 흐름에 올라타 기회를 잡고 승승장구하는 이들이 성공적인 삶의 표본처럼 보이겠지만 가끔은 마리처럼 세상의 속도에서 이탈하는 이들도 있다. 이렇다 할 것 없지만 마음에 남는 풍경을 잊지 못하는 이유 하나로. 그게 바로 행복이다.

'꿈을 이룬' 신비한 반짝거림은 분명하게 존재했다. -p.32

그런 사람들에겐 일상의 균열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리의 뛰어난 공감 능력은 하지메의 흉터에 따스한 바람이 된다. 하지메가 있는 일상이 변화라기보다는 최대한 자연스러움이 되도록 맞춘다. 바다와 빙수가 있는 그 공간에서의 여름은 하지메에게 기적을 선물한다. 마리가 어느 곳에서 먹은 빙수처럼. 그것은 진심이라는 마법이 아닐까.

어쩌면 마리 역시 이곳에서의 삶의 단조로움보다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로 인한 공허감이 걱정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일상에 하지메는 추억을 소환하여 옛 감성에 불을 지피게 해 주는 존재였다. 절대로 깨우치지 못할 감각을 다시 불러와 감성을 풍성하게 해 주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어 보다 커지는 경우도 있다. -p.76

어둠은 어둠에 묻힌다. 어둠이 빛을 만나 점점 옅어지다 밝아지는 이야기를 만나서 나 또한 밝아졌다. 하지메는 돌아갔지만 그들은 친구로 남았다. 똑같은 나날의 반복 속에서 하지메는 가끔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 줄 것이다. 마리의 말처럼 자기 주변의 모든 것에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는 마음을 지닌다면 어쩌면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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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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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어느 날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쓴다. 그래서 그냥 쓴다. 타고난 끼가 때를 만나 상까지 거머쥔다. 성공이라는 정해진 운명의 룰렛이 끊임없이 돌아갈 때 그의 책들이 내 서가에 하나둘씩 꽂혔다. 두터운 팬층과 대중성을 동일하게 여긴 오만 때문에 그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여자없는 남자들> 먼지를 털어낸 것도 작년이니까.

두꺼운 장편을 읽을까 하다 하루키의 데뷔작을 소개받았다. 왜 데뷔작부터 볼 생각을 못 한 걸까. 읽은 것이 몇 권 없기에 하루키를 안다고 할 수나 있을까 싶지만 이젠 알겠다. 그의 소설에서 언급되는 상실과 위로가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지를.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p.143

하루키의 글쓰기는 사소한 시도에 불과했다. 자기 요양을 위한. 그래서 글이 이렇게 자연스러운 걸까. '나'라는 인물이 만들어 낸 동경의 작가에게 속은 게 나뿐은 아닐 것이다. 데릭 하트필드의 작품을 뒤질 뻔했으니까. 타고난 작가는 계획이 다 있구나.ㅋㅋ

맥주와 음악만으로도 여름은 젊음을 대변하는 계절로 충분하다.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니까.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만남 같지만 훗날 로맨틱하게 기억될 수도 있다.

'나'와 '쥐' 두 친구는 그저 여름 동안 고향에서 만나 레이의 바에서 맥주를 마신다. 고작 스무해를 산 청춘들임에도 무언가 삶을 향한 조소가 가득하다. 구린 게 많은 부유한 집안의 쥐는 그런 자신의 집안에 대해 냉소적이고 우울하다. '나'는 그저 시간에 몸을 내맡긴 청춘 같다. 여느 청춘들이 그렇듯 그들이 주고받는 말속엔 무심함과 허무가 깃들어 있고 논리가 없는 말들을 담배연기에 태워 보내며 위안을 삼는다. 어떤 장면에서는 마치다 준의 <얀 이야기>속의 고양이와 생선 친구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래? 내가 없으면 쓸쓸할 텐데." -p.66

문득 걸려온 라디오 방송국 전화에 '나'는 추억을 더듬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신청한 곡이 있다는 사실은 묘한 기분을 선사할 것 같다. 비치 보이스의 <캘리포니아 걸스>를 들어 보았다. 처음 듣는 곡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곡들이 상당히 올드하다. 그럼에도 라디오 DJ의 멘트는<토토즐>을 떠오르게 할 만큼 옛 감성에 젖게 한다. 멋진 토요일 밤보다 불금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시대이니까.

'나'는 그녀를 찾아보지만 실패하고 자신을 거쳐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상대들을 떠올려본다. 그러고는 손가락이 네 개뿐인 그녀와의 만남을 드문드문 이어간다. 아무말 대잔치 같은 대화들과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주고받는 관계도 여름과 함께 끝난다.

누구에게나 쿨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시절이 있다.-p.106 트렌드 책에서 '쿨하다'라는 의미가 시대적으로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나'의 쿨함은 그 어느 시대상에도 맞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절반은 감추는 게 쿨한 거라니. 부자라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쥐는 자신의 존재적 이유를 이도 저도 찾지 못한듯하지만 그래도 글을 쓴다. '나'는 동경하는 작가의 세계관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세워간다. 아마 손가락이 네 개뿐이었던 그녀도 짧았던 '나'와의 만남이 시시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 시간에서조차도 분명 진화는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내가 만약 인디언이었다면 나의 이름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할 것이다. '늑대와 춤을'처럼.ㅎㅎ 그의 데뷔작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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