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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 강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2년 전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뜬금없이 사달라고 요청한 책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거미 그림의 강렬한 표지에 이런 걸 읽겠다고? 했으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이라 바로 구매해 주었다. 물론 딸아이는 읽다가 중단한 상태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니까. 2월 9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는 <나일 강의 죽음>을 운 좋게 책으로 먼저 만나보게 되었다. 미스터리물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한번 잡으면 놓지 않고 보는 편이다. 애거시 크리스티의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이다. 책의 두께만 보면 이틀 정도 걸리지 않을까 했으나 몇 시간에 걸쳐 완독이 가능했다. 그만큼 잘 읽힌다. 아니 읽힐 수밖에 없다. 범인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신은 어쩜 그리도 불공평한지. 한 사람에게 몰빵하는 건 아니지 않나.ㅎ 상속녀 리넷 리지웨이는 미모와 재력을 겸비한 행운녀였다. 영국에서 제일 돈이 많은 여자이자 아름답고 몸매까지 완벽한 여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녀 주위에는 그녀를 질투와 시기 혹은 원망과 분노의 눈길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눈부신 미모를 무기로 그녀의 친구인 자클린의 약혼자마저 빼앗게 된다. 떡 벌어진 어깨, 햇볕에 그을린 얼굴 짙푸를 눈, 순수한 미소를 지닌 사이먼 도일을.
누가 봐도 행복한 선남선녀. 그들은 재력가답게 이집트로 긴 신혼여행을 떠난다. 두 사람은 나일 강을 따라 호화로운 유람선에 몸을 싣지만 그들은 내내 불안하다. 리넷의 친구이자 약혼자의 전 여친이었던 자클린을 내내 마주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전부였던 남친 사이먼 도일을 빼앗긴 뒤 그녀는 이성을 상실한다. 두 사람을 총으로 쏴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그들 부부의 곁을 맴도는 것으로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 즐거울 리 없는 리넷은 마침 탐정 푸아로에게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푸아로는 철저히 자신의 관점에서 변명하는 리넷에게 초연하고 냉정하고 날카로운 태도를 유지한다. 탐정은 심리에도 탁월해야 하는구나. 자클린의 상황이 배제된 감상적인 사실과 진실은 그들 부부의 속 사정일 뿐이다. 푸아로가 지적한 죄책감이란 단어에 리넷은 정곡을 찔린다. 용납하고 싶지 않겠지만.
리넷의 부탁은 거절했지만 푸아로는 자클린을 만나 어떤 선택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길인지를 설득한다. 하지만 오뉴월의 서릿발을 품은 그녀에게 들어먹힐 리가 없다.
마침내 자클린은 사이먼과 마주하게 되고 술에 취한 자클린은 흥분한 채 사이먼을 향해 한방을 날린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선상. 그런데 어이없게도 다음 날 아침, 리넷이 자신의 선실에서 차가운 시체가 되어있다.
저 아가씨는 지나치게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군, 그건 위험하지. 그래, 위험해. -p.30
이 사건은 사랑 때문에 벌어진 비극처럼 보인다. 지독하게 자존심이 강했던 자클린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그래서일까. 추리만 했다 하면 헛다리를 짚던 내가 내가 범인의 윤곽을 잡아버린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법이니까 말이야 -p.32 역시 모든 사건의 중심은 돈이다.
푸아로는 승객들의 알리바이와 목격자 탐문 수색을 한다. 그 사이로 각자의 음료 취향만큼 각자의 숨겨진 욕망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리넷과 여러 가지로 돈에 얽혀 있거나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의 실마리는 의심과 의심에 의해 거듭 밝혀지는 것이겠지만 배 위에는 그들과는 상관없이 진실한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의심을 거두고 확신을 주는 사람들 말이다.
이건 불공평해요. 몇몇 사람이 모든 걸 다 갖고 있다고요.-p.170
작가는 이 추리극 한편에서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돈 나고 사람 난 자본주의의 폐해와 타락함을 꼬집고 있다. 그 비틀림의 정점은 혐오와 증오를 넘어선 범죄다. 가진 것 덕에 호강을 한다는 이유로 기생충이 되고 가진 것이 많다는 이유로 거드름을 피운다고 여긴다. 가진 것이 많으면 어딜 가나 부러워하고 탐내는 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더 흉측한 자화상은 욕망과 탐욕에 일그러진 우리의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본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 딱 들어맞는다.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사건은 더 복잡해져갔으나 탐정은 예리했다. 범죄의 동기를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이치에 닿는 진실을 찾는 것이 포인트였다. 오랜만에 고전 미스터리물의 맛을 제대로 음미했다. 2월 화려한 영상으로 그들을 만나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