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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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어느 날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쓴다. 그래서 그냥 쓴다. 타고난 끼가 때를 만나 상까지 거머쥔다. 성공이라는 정해진 운명의 룰렛이 끊임없이 돌아갈 때 그의 책들이 내 서가에 하나둘씩 꽂혔다. 두터운 팬층과 대중성을 동일하게 여긴 오만 때문에 그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여자없는 남자들> 먼지를 털어낸 것도 작년이니까.

두꺼운 장편을 읽을까 하다 하루키의 데뷔작을 소개받았다. 왜 데뷔작부터 볼 생각을 못 한 걸까. 읽은 것이 몇 권 없기에 하루키를 안다고 할 수나 있을까 싶지만 이젠 알겠다. 그의 소설에서 언급되는 상실과 위로가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지를.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p.143

하루키의 글쓰기는 사소한 시도에 불과했다. 자기 요양을 위한. 그래서 글이 이렇게 자연스러운 걸까. '나'라는 인물이 만들어 낸 동경의 작가에게 속은 게 나뿐은 아닐 것이다. 데릭 하트필드의 작품을 뒤질 뻔했으니까. 타고난 작가는 계획이 다 있구나.ㅋㅋ

맥주와 음악만으로도 여름은 젊음을 대변하는 계절로 충분하다.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니까.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만남 같지만 훗날 로맨틱하게 기억될 수도 있다.

'나'와 '쥐' 두 친구는 그저 여름 동안 고향에서 만나 레이의 바에서 맥주를 마신다. 고작 스무해를 산 청춘들임에도 무언가 삶을 향한 조소가 가득하다. 구린 게 많은 부유한 집안의 쥐는 그런 자신의 집안에 대해 냉소적이고 우울하다. '나'는 그저 시간에 몸을 내맡긴 청춘 같다. 여느 청춘들이 그렇듯 그들이 주고받는 말속엔 무심함과 허무가 깃들어 있고 논리가 없는 말들을 담배연기에 태워 보내며 위안을 삼는다. 어떤 장면에서는 마치다 준의 <얀 이야기>속의 고양이와 생선 친구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래? 내가 없으면 쓸쓸할 텐데." -p.66

문득 걸려온 라디오 방송국 전화에 '나'는 추억을 더듬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신청한 곡이 있다는 사실은 묘한 기분을 선사할 것 같다. 비치 보이스의 <캘리포니아 걸스>를 들어 보았다. 처음 듣는 곡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곡들이 상당히 올드하다. 그럼에도 라디오 DJ의 멘트는<토토즐>을 떠오르게 할 만큼 옛 감성에 젖게 한다. 멋진 토요일 밤보다 불금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시대이니까.

'나'는 그녀를 찾아보지만 실패하고 자신을 거쳐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상대들을 떠올려본다. 그러고는 손가락이 네 개뿐인 그녀와의 만남을 드문드문 이어간다. 아무말 대잔치 같은 대화들과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주고받는 관계도 여름과 함께 끝난다.

누구에게나 쿨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시절이 있다.-p.106 트렌드 책에서 '쿨하다'라는 의미가 시대적으로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나'의 쿨함은 그 어느 시대상에도 맞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절반은 감추는 게 쿨한 거라니. 부자라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쥐는 자신의 존재적 이유를 이도 저도 찾지 못한듯하지만 그래도 글을 쓴다. '나'는 동경하는 작가의 세계관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세워간다. 아마 손가락이 네 개뿐이었던 그녀도 짧았던 '나'와의 만남이 시시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 시간에서조차도 분명 진화는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내가 만약 인디언이었다면 나의 이름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할 것이다. '늑대와 춤을'처럼.ㅎㅎ 그의 데뷔작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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