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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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장이 되어봐, 단 하루만이라도. -p.13​

루시는 불행했다. 여러 이유로.

그녀가 떠나온 고향은 어린 소녀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고국의 암울한 역사는 여전히 삶을 가난하게 했고 사람들의 의식은 변화가 더뎠다. 당시 미국의 이민정책이 없었다면 그녀 역시 고향땅에서 매를 맞거나 목이 베이거나 몸을 팔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죽하면 여자 유다로 낙인찍고 마찰이 일 때마다 증오와 분노와 경멸로 상대했을까.

열아홉, 목덜미를 옥죄던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구명보트가 되어준 곳은 미국 상류층의 부엌에 딸린 작은방이다. 그녀는 친절한 미국인 부부와 사랑스러운 네 아이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오히려 지우고 싶던 고향땅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의 삶은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었고 영원히 그럴 것만 같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 -p.21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p.26

어떻게 하면 그래요? -p.37​

이곳은 루시가 지금껏 경험한 세상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곳이다. 피정복자와 점령지.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느끼고 흘리는 눈물의 맛은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는 한 절대 맛볼 수 없는 차원의 것들이다.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과 풍경을 대하는 태도와 아낌없는 친절과 진심 어린 위안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랐다.

루시는 고향에 남겨진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몇 통의 거짓 안부를 띄운다. 엄마가 전하는 고향의 소식은 그녀에게는 고통의 연속이다.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구질구질한 공포는 오래도록 쌓여 온 애증에 증오심만 키울 뿐이다. 결국 그녀는 차단하는 쪽을 택한다. 눈 덮인 세상의 부드러움을 견디고 싶었다. 굉장하지 않아? 아름답지 않아? 라는 머라이어의 감정에 언젠가는 동조할 수 있는 처지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꽁꽁 봉투를 봉했으리라.

내게 머라이어는 엄마 같았다. -p.89 엄마는 떨쳐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머라이어와 가까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쩌면 자신이 원하던 엄마의 모습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이지 않은가. 엄마와의 닫힌 문 대신 또 다른 문이 되어준 머라이어가 있었다는 사실이. 긍정의 기운이 루시에게 옮아감을 보았다.

넌 정말 화가 많은 애구나. 그렇지? 그녀의 화는 자격지심에서 오는 빈정거림이 아니었다. 불평등한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는 단지 어렸을 뿐이었다. 루시는 새로운 사람과의 첫 대면에서 상대가 내뱉는 첫마디에 예민하다. 페기와 휴는 좋았지만 다이나는 싫었다. 그뿐이다. 머라이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제는 이해하고 진실과 허위를 구별할 줄도 안다. 루이스와 머라이어 사이에 균열이 일고 산산조각이 나는 과정을 보며 삶의 기복의 당연함도 깨닫는다.

하루키 데뷔작에 등장하는 쥐라는 인물도 그렇게 낯선 세상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살면서 익숙해진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일 아닐까?"라는 휴의 말까지 곱씹어 보니 이것은 루시의 입장과 비슷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으면 공감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루시는 삶을 담는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모습들을 담는다. 뚜렷한 이유가 없는 즐거움. 그건 치유다.

멀찍이서 들여다보면 루시는 이제 겨우 스무해를 살았다. 그렇지만 인생에서 성장기가 차지하는 비중의 중요성을 알기에 루시의 화에 공감이 된다. 태어나기전부터 성가신 존재였고 태어나서는 귀찮은 존재에게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엄마를 보며 같은 여자지만 그점은 참으로 공감하기 어렵다. 마지막 돈까지 탈탈 털어 인연을 끊고 싶어했을 루시가 어찌나 안스럽고 외로워보이던지.

다른 건 몰라도 엄마를 보며 보고 배운 교훈의 효과는 확실했다. 남자를 쉽게 믿지 않은 건 박수! ㅎ 스무 살 루시의 독립기는 이제 시작이다. 노트에 적은 문장을 보며 다시 한번 사랑과 증오가 나란히 공존함을 보았다. 혀의 맛이 아닌 오로지 감각으로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마침내 난 여전히 두렵긴 해도 숲속을 걷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서 혼자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숲에 근사한 면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조금씩 확장해가는 내 세계에 그렇게 또 하나를 덧붙였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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