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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적당히 협조하고 수긍하서 장단 맞춰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네 편 내 편으로 구분 짓어를 좋아해서다. 그 니편내편안에서도 또 니편내편을 가르며 작은 공동체를 꾸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속력이 때로는 누군가의 목을 옥죌 수도 있다는 걸 까맣게 잊는다. 그러한 것들의 밑바탕에 정치적 신념과 종교가 자리 잡게 되면 더욱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네 편이고 내 편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혼돈은 작중 화자인 '나'를 통해 드러난다. 정작 현실에선 입을 걸어 잠그고 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늘어지는 문장 때문에 번역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했다. 우습게도 블랙유머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문장과 설정들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하자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p.61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진실이 아닌 거짓이란 결론에 체념하고 만다. 이런 시대적 모순과 감정의 아이러니를 문체에 담은 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랬기에 '나'는 철저히 입을 다문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지이든 무관심이든 상관없이 침묵을 택한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침묵은 곧 오해와 고립을 낳는다. 모든 사건의 인과관계는 그 집단의 이익과 연결되고 각자의 욕망으로 흐른다.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사람들의 눈밖에 난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이 위협적인 건 아니었다. 주인공 '나'가 여자 화장실에서 '아무개 아들의 아무개'에게 위협을 당할 때 그녀를 적대시하던 여자들 덕에 위기를 벗어났던 순간들이나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로 불리던 진짜 밀크맨이 총격을 당해 병원 신세를 지고 있을 때 '아무나 사랑하려는 여자' 들 덕에 밀고자라는 혐의를 피하게 된 것과 같은.
이 책은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개인적으로 부커상 작품을 좋아한다. 강한 주제의식, 독특한 서술과 문체들의 난해함이 좋다. 책을 온전히 흡수하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수확량도 만족스러우니까.
이 책 또한 독특한 점이 두드러진다. 인물들에게 고유명사가 없다. 즉 화자인 '나'는 가운데 아이(열 명 중 중간이라서)로, 형제들도 첫째, 둘째, 셋째로, 그녀의 남자친구는 어쩌면 - 남자친구로, 남자친구가 그녀를 부를 때도 여자친구로. 그렇듯 특정 직업이나 명칭으로만 불린다. 게다가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임에도 정치적 용어가 없다. 70년대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을 암시하는 듯한 단어만 존재한다. 물 건너, 길 건너, 반대자, 수호자, 국가 암살단 등. 그러므로 굳이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까지 필수적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의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이 이상야릇하고 우스꽝스러운 현상들이 꼭 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물들에게 고유명사가 없다고 했지만 딱 한 명 등장한다. Milkman!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the milkman(진짜 the milkman도 있다)이 아니라 밀크맨이라고 불린다. 영국에서 밀크맨은 주로 주부들을 유혹하는 대상으로 자주 농담에 등장한다고 한다. 소설 속 밀크맨은 '나'의 주위를 맴돌며 '나'를 온갖 루머를 시달리게 만들고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이다. 무장단체 요원이라고 의심받는 그가 왜 '나'를 미행하고 접근하는지 명확한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정말 웃기는 건 사람들이 생산하는 루머다. 그가 위험한 인물임에도 사람들은 열여덟 살 소녀와 마흔한 살을 불륜으로 묶어 치졸하게 '나'를 질타하고 압박한다. 마치 네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왔다는 것처럼. 게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나'를 비난한다. 그녀가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굴지 않는다는 점과 걸어 다니면서 책을 본다는 점은 사회와 자신의 안전을 망각하는 위험하고 기이한 행동으로 결론 내려 버린다. 그녀를 믿어주어야 하는 가족은 물론이고 절친까지도 조심성 없는 그녀를 탓한다. "그럼 조심해야 해" 291
사회적 제약과 억압으로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납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미 그녀의 시도도 '거짓말'라는 단어 앞에 무력해진다. 획일화된 생각과 고정관념을 깨부수기도 힘들뿐더러 그들 스스로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나'는 분명 남자친구와 함께 일몰을 보았음에도 하늘이 파란색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본 다채로웠던 하늘의 색상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세부적인 사항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애초에 없는 것으로, 본 적이 없는 것으로 하고 사는 편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곳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조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함을 당하고 수치를 감당해야 하고 구타와 총살을 당한다. 그래서 침묵에 부적응까지 필요해진다.
경미하여 공동체에서 용인할 수 있는 정신이상이 있고 경미하지 않고 상도를 벗어난 정신이상이 있다. -p.94
수시로 폭탄이 터지고 군인들과 경찰의 불심검문에 시달려야 하는 이 전쟁이라는 불가항력 시대에 맨정신으로 버티는 게 가능이나 할까. 힘든 날만이 아니라 언제나 꾸준한 타인에 대한 공포가 인정사정없이 끼어드는 시대에 말이다. 영화 <벨파스트의 눈물>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떠올라 더 갑갑하다. 빛을 뺏기거나 그 빛이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어느 누구하나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것도 문제다. 불행이 당연시 되고 비극을 그냥 받아들이며 사는건 인간의 삶이 아니다. 어린 시절 강간의 트라우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미쳐버린 아버지, 자녀들을 버리고 자신들의 인생을 찾아 떠나버린 어쩌면-남자친구의 부모, 수녀가 되어버린 첫사랑을 잊지 못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진짜 밀크맨, 핵소년과 알약소녀, 문제의 여성들. 반면 자신의 빛을 내려 하는 이들도 희미하게나마 연약하게나마 존재했다. 프랑스어 선생님과 어쩌면-남자친구, 알약소녀의 동생이 있다.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 팬층을 확보한 셋째 형부는 세상을 향해 이의를 던지고 덤비라는 신호를 계속 보냈으며 누구도 사랑하지 않지만 이웃사람들을 돕는 진짜 밀크맨은 진심으로 그녀의 연민(손수건에 감싸 쥔 고양이 머리)에 손을 내민다. 모이면 그 파워를 무시할 수 없는 여성들은 '나'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뜻밖의 연대의식을 발휘했다.
밀크맨은 과연 누구였을까. 어쩌면-남자친구가 더는 남자친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듯이 밀크맨도 어쩌면-밀크맨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어쩌면-남자친구의 집을 뒤져 자동차 부품 조각을 찾는 것이나 허상이 벗겨진 밀크맨의 이름 앞에서나 그렇듯 철저하게 부풀려 놓았던 거짓 앞에서 바람맞은 꼴이 되었다. 혁명은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른다. 실체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나'의 주위를 맴돌며 긴장감을 유발하던 밀크맨이었지만 오히려 더 기분 나쁘고 경계해야 될 대상은 찰칵 소리다. 그러한 소리에 눈을 돌리고 반응해야 한다. 밀크맨이 조여오던, 공동체가 조여오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애써야 한다.
살다 보면 많은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법이다. 나는 결국 산다는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p.432
밀크맨의 죽음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씩 빛을 내려한다. 사람들이 그토록 믿는 것들에도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욕망이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어떤 색이든 될 수 있음도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라고요라며 삶의 가장자리로 옮겨 앉을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선택을 해야 하는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어둠이 아무리 크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어둠은 없다. -p.122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허구와 풍자의 세계. 넘치고 넘치는 문장들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그 속에서 찾은 유머와 삶의 깨달음이 좋아던 책이다. 두께에 겁먹지 말고 도전해 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