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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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제사인 아이다(A'ida)와 용접공 사비에르(Xavier). ​​

그들은 끝내 만나지 못했을까.

 

반정부 테러 조직 결성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독방에 갇혀 있는 사비에르. 그런 그에게 아이다는 편지를 쓰고 또 쓴다. 그곳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비밀과 세상의 비밀, 일상의 소음과 세상의 소음, 의심스런 정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

그에게 부쳐진 편지 외에 보내지 못한 편지와 보내지 않은 편지들에 담긴 이야기들에서 그들의 삶의 부재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그럼에도 연애편지 같은 사랑스러움도 묻어난다. 그를 칭하는 여러 언어의 애칭과 그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매일 밤 당신을 조각조각 맞춰 봅니다 - 아주 작은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사비에르는 그녀의 편지 속에 그려진 손그림을 창틀 아래 붙여놓기도 하고 편지 뒷면에 메모를 남기기도 한다. 그녀의 편지가 부드러운 깃털이라면 그의 메모는 날카롭고 강인하다. 그녀의 편지가 하늘로 띄워졌다면 그것은 그가 세상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외침이지 않았을까.

 

이 책은 편지와 메모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앞쪽에는 존 버거가 한국 독자들에게 남긴 편지가 있다.

이 책을 읽은 몇몇 분들이 제가 정말 아이다의 편지를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혼자 꾸며낸 것인지 묻습니다. 물론, 그 질문에 답을 드릴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 그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

 

아룬다티 로이는 이 책에서 절제된 분노를 보았고 옮긴이는 세계화에 대한 저항을 보았다. 그녀와 그의 단순한 사적 이야기가 아닌 세상을 향한 저항과 투쟁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미소는 때론 다정하고 때론 당당하며 때론 든든했다. 그는 갇혔지만 그녀는 살아남은 자들과 꿋꿋하게 버텨낸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과 예측할 수 없는 죽음과 어두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끊임없이 삶을 잠식해 들어오지만 잃어버린 습관처럼 우리의 매일을 이어주는 시간들과 예기치 않은 웃음이 가져다주는 힘을 믿는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울음 대신 웃음을 터트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상한 질문이죠. 우린 삶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p.167

 

 

세상은 그를 가두었고 그녀의 주변은 늘 불안하다. 그럼에도 그녀에겐 어떤 믿음이 느껴진다. 그의 강인하고 단단한 신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유머가 그녀로 하여금 더욱 사랑의 크기를 키워나간다. 편지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어떤 편지가 마지막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절망이나 후회 따윈 없다. 단지 그를 오랫동안 만지지 못해 그녀의 손이 쓸모 없어져 버린 것 같다고 말하는 안타까움과 우리가 계속 싸울 수밖에 없는 당위성만이 가득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p. 95

 

 

삶의 파편들에 상처를 입고 살갗이 찢어질지라도 그녀는 이델미스가 그랬듯 사람들에게 치료 약과 진정제와 희망과 경고를 담은 처방전을 나누어 줄 것이다. 그녀는 그들이 막으려 하는 미래가 반드시 올 거라는 확신이 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거리가 들려주는 희망적인 소문들 말이다. 텅 빈 밤을 울리는 사랑해요라는 말 한마디에 가득 채워지는 것 또한 희망이다. 그녀의 입속에서 그에게로 전해질 메아리. 갑자기 터져 나오는 눈물이라도 그렇게만 흘려버릴 수 있다면 다행인 삶이다.

어둠의 침묵을 깨는 건 새소리이며 뚝뚝 끊어진 일상을 이어주는 사이의 날들로 생을 붙잡아 나간다. 그가 보낸 재스민 화분이 그녀에겐 재스민 벌판이 된다. 그곳에서 그녀의 긴긴 팔다리로 그를 껴안을 수 있기를. 그가 그린 탈출 경로를 보며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는 부은 눈으로 살짝 윙크를 해 보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세상 속에 있든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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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2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이구절에 백만번 공감합니다일상의 소음과 세상의 소음, 의심스런 정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 아룬다티 말처럼 저항과 분노를 편지글에 녹여낸 이작품 건빵님 사진과 리뷰 만큼 멋지고 감동적입니다.^.^

건빵과 별사탕 2021-01-22 11:45   좋아요 1 | URL
이 책을 한 삼일 붙잡고 있었는데요. 여전히 울렁울렁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