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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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p.120​

​그저 꿈을 꾸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아만다.

그녀는 지금 열과 싸우며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기 이전의 시간에 대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녀가 쓰러지기 전 만났던 이웃 여자 카를라와 그 여자와 얽혀 있는 기묘한 사건은 자신의 아이 니나와도 연관이 있다.

 

소설은 아만다와 이웃 여자의 아들 다비드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사건의 요지와 과정이 암호처럼 이루어져 있고 원인에 대한 추측도 독자의 몫이다. 목소리로만 들려주는 긴박감과 정체 모를 원인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공포심에 눌린 채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내가 뭘 읽은 거지?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간이 두 손으로 저지른 끔찍한 결과에.

어린 니나가 엉덩이에 묻은 물을 털어냈을 뿐인데 왜 손이 따가운 건지에 대해 간호사는 일사병 약만 처방할 뿐이다. 결국 그들이 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 더 끔찍한 공포감을 불러왔다.

 

짐작하건대 이 마을은 무언가에 중독이 되어 있다. 원인은 물에서 시작했지만 그런 물은 인간이 땅속에 뿌린 독성 비료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그렇게만 추측하고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 물로 인해 생명체가 죽어가고 기형아가 태어난다. 병원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듯하고 그 사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대책에 관한 내용이 없다. 사람들이 한 거라곤 고작 주술적 행위뿐이다.(그러한 다급함이 주술 따위에 의존하게 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책을 읽다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작가의 의도는 이것이 팩트임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이건 정확한 순간이 아니에요.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

다비드는 세세한 것의 중요함을 언급하면서도 어떤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자꾸만 다그친다. 아만다는 일어난 일들을 부정하며 마치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의 희생자가 된 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구조 거리'라고 한다. 다비드 또한 아만다에게 구조 거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한다. 다비드는 그 구조 거리의 중요성을 부각하려 애쓰지만 아만다와 니나, 카를라와 다비드 사이에서 그 구조 거리라는 게 중요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의 삶에서 통하는 구조 거리는 대략 얼마쯤일까. 카를라와 다비드 사이의 구조 거리는 고작 일 미터였고 아만다와 니나가 함께 앉아 있던 그 짧디짧은 구조 거리라고 칭할 수 없었던 거리에서조차도 아만다는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었듯 그런 거리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곧 나쁜 일이 일어날 거야'라며 짐작할 뿐이고 예견할 뿐이고 조심하는 것 외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차를 조심하는 것 외에 드럼통을 조심해야 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이 책을 두 번 읽으면서 굵은체로 이루어진 다비드의 대화만 연결 지어 읽어보았다. 이런 일은 언제나 서서히 일어나고 우리는 정확한 순간을 찾으려 애쓴다. 그럼에도 다비드는 이야기를 끝내버린다. 더 이상 가치가 없어요. -p.135​

다비드는 어린시절 자신이 묻어준 동물들의 죽음에 의구심을 품었고 사람들이 쓰려져 가는것에 대한 원인을 찾고자 했지만 아만다에게는 드럼통보다 니나의 생사가 중요했다. 다비드는 드럼통의 실체에 집중했지만 카를라는 저주 때문이라 여긴다.

 

실제 이 사건의 모티브는 아르헨티나의 환경문제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특정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야기에서 그 차이의 극명함을 볼 수 있었다.

벌레 같은 거요, 어디에나 다 있는. ​

다비드가 만들어 놓은 스물여덟 개의 무덤과 마을의 아이들이 실체일텐데 그들은 그 볼 수 있는 실체 앞에조차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결국 우리 두 손에 남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그저 따갑고 쓰라린 통증과 공허라는 실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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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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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설치미술이나 추상화 앞에서 머뭇머뭇할 때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걸 어떻게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여질 때가 있다. 친절하게 작품 귀퉁이에 적힌 해설을 참고해도 작가의 의도가 전혀 와닿지 않을 땐 참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표면적이고 시각적인 사유에만 머물러 있었던 사람인지 깨달았다. 사십 평생을 사는 동안 사물과 현상을 꿰뚫고 내면의 원리와 관계의 이치 그리고 사물과 삶의 연결고리 등에 대한 시선이 참말로 부족함을 깨달았다.

 

예술작가들은 작품에 임하기 전 그 무엇보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 고뇌하는 사람, 세상에 대해 진실된 시선과 겸손한 마음을 겸비해야 작품에 영혼이 깃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마치 대리석 덩어리 속에 숨어 있는 조각상의 형태를 보는 것처럼 -p.11 물론 글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요즘 나도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르는 이미지를 글로 옮길 때가 있지만 너무나 역량이 부족함을 느낀다.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이 책을 들고 다녔다. 산책로에서, 버스 안에서도, 심지어 밥을 먹는 동안에도 한 챕터씩 읽고 삼켰다. 예전에 존 버거의 스케치북을 읽으며 느꼈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때 나도 언젠가 그림일기를 써 봐야겠단 다짐이 안규철 작가의 책을 덮으며 더욱 강렬해졌다. 작가는 매일 아침 그림일기를 쓰는 시간은 그가 일명 '천사가 다녀갔던 시간(순간의 정적)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나도 분명 그러한 순간들에 떠오른 생각들이 있었음에도 금방 망각하기 일쑤였는데 다시 끄집어 내기 위해선 메모가 필수겠다.

 

이 책 전에 읽은 <골든 에이지>의 첫 번째 단편이 <공의 기원>이었는데 이 책의 초반에도 공의 사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여러 우연이 정해주는 대로 위치를 찾아가는 공의 운명. 분명 주체는 공이 아니지만 공을 주체로 내세운 사유가 돋보인다. 이처럼 사물과 현상을 주체로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것들 - 바람이 되고 녹이 되고 나사가 되고 씨앗이 되고 잡초가 되고 귀뚜라미가 되어. 그리고 사물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현상을 재해석한 역설적 발상들이 와닿았다.

 

 

 

 

자연의 조용한 움직임과 기다림을 이해할 때 삶의 속도에 치중한 삶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식물의 시간>편은 느리게 살고 싶단 소망에 불을 지핀다.ㅎ 이 챕터를 읽을 때 마침 물가에서 노니는 오리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오리가 노니는 모습만 보고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하염없이 냇가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아저씨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봄이 오고 바람이 부는 주체는 따로 있다. 우리가 주어라고 배우는 문장들에도 보이지 않는 주체를 생각해야 한다. 자연이라는 혹은 신이라는 주체. 그렇듯 내가 걷고 일하고 웃고 잠을 자는 동안에도 진정 그 주체가 나인지를 의심해야 한다. 관성의 지배를 받고 사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나 자신인지까지도.

 

인생은 간발의 차이로 생과 사가 갈리고 어쩌면 온전한 원을 이루며 살 수 없으며 작은 날갯짓으로 겨우 작은 거리를 이동하며 결함이라는 흔적들을 남긴 채 살아가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머물렀던 그리고 머무를 시간들을 잘 쓸어내리는 것이겠다.

 

우리에겐 기계의 겉에 치중하는 삶이 아닌, 내부의 비밀을 절대 발설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보온병이 아닌, 내부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머그컵 같은 삶이 필요하다. 한쪽으로 버려지는 존재들에 한 번 더 시선을 둔 작가처럼 그런 시선이 필요하다. 나를 위해 사들인 물건보다 나 때문에 버려지는 물건들의 종착역을 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말의 유효기간>편에서 오간 말에 관한 철학에 대해 명심하며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을 말이 아니 글로 순환시켜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그 모든 것들에 부여되는 시각이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언젠가 나도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귀뚜라미 소리가 우는 게 아닐지 모른다고. 인간들이 자기들 멋대로 운다고 해석한 것일 뿐이지 실은 웃고 있는 걸 수도 있다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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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에이지
김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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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노년을 대신하는 용어들이 늘어나고 있다. <골든 에이지>도 그런 방향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제목만으로 넘겨 짚었던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던 단편이라 많이 당황하고 말았다. 솔직히 처음 날짜가 언급될 때도 눈치채지 못했었고 말미쯤 알아차리고 나서도 2014년이란 숫자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만큼 잊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사실과 너무나 먼일처럼 잊고 있었단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미안했다. 그냥 모든 것들이.

 

우습게도 첫 단편 <공의 기원>을 시작하면서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어디서 읽은 것만 같아서. 작가 소개란을 보고 나서야 젊은 작가상 수상집에서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ㅎㅎ

 

공의 기원. 작가는 우리나라 공의 역사에 관해 한바탕 뻥을 늘어놓았는데 토마스 굿맨이란 브랜드를 검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실과 허구를 의심했단 증거다. <스테판, 진실 혹은 거짓> 또한 마찬가지. 스테판 켄달 고디를 검색하고 그의 노래를 검색했으니 작가의 특출난 '아무 말'에 속았다고나 할까.

 

그렇듯 인간의 삶의 뿌리 즉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들은 더욱 설득력에 힘이 실린다. 특히 인류가 기만하고 묵인했던 비극적 사건들을 하나씩 포진시켜 두는 치밀함이란. 호되게 나무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비슷한 주제와 분위기를 지닌 한국 작가들의 단편들 속에서 작가의 단편들이 단연 돋보였던 이유는 팩션이란 세계의 무궁무진한 확장성에 있겠다. 육각 모양의 축구공을 개발한 개발자가 조선인이라는 둥, 유명 뮤지션이 한국 땅에서 원어민 강사 생활을 했었다는 둥, 노벨 문학상이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는 둥, 삽 하나만 있으면 지구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둥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고 톡 쏘는 과장법으로 정신을 간지럽힌다. 단, 스타워즈의 스카이 워커를 모르면 정작 지나칠 수도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달 토끼 열여덟 마리가 인류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 도서 시장에 혼란을 주려던 계획이 실패에 다다르자 애초에 할리우드로 가야 했었다며 후회하는 장면은 너무나 현실적이지 아니한가. 넷플땡땡에 빼앗긴 인류의 정신세계. 심히 걱정스럽다. 그렇지만 '상 받은 작품은 어렵다'라는 편견? 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작품성을 이해하기도 전에 난독증의 자괴감에 먼저 빠진 적도 있었으니.ㅎ 좋은 문학은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 하고 좋은 독자란 문학을 통해 인생을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아닐까 한다.

 

제일 끌렸던 단편은 <그리고 계속되는 밤>이다. 인류의 기술력이 초절정을 거듭해 인간은 나이를 계산할 수 없을 만치 오래 산다. (미래에는 노인이란 단어는 금기어다. <노인과 바다>가 더 이상 명품 고전이 아니란 말씀) 오래 살아서 좋겠다는 생각보다 더 끔찍한 건 죽을 때까지 노동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생명 연장 시술에 따른 빈부격차로 인해 차별과 혐오가 극에 달한다. 징그럽지 아니한가. 단편 제목이 목구멍에서 그만 컥! 걸린다.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수명 연장에 관한 미래는 절대 희망적일 수 없겠다. <조각 공원>의 기괴함과 우스꽝스러움은 뭐랄까. 인류가 점점 개인주의화되다 못해 사회현상에 무심해지는 현상을 꼬집는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의 끈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지 않은 자들의 끈까지 잡아줄 여력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나의 현재를 즐겨야 하니까. 공원에서 도시락 까먹는 것과 같은.

 

<해변의 묘지>의 요지는 난민이다. 국경은 넘을 수 있어도 차별의 벽은 넘을 수가 없다. 요즘 사람들은 다르다는 의미에서 두려움보다 혐오를 키워간다. 두려워서 해하는 게 아닌 무작정 싫어서 해하는 행위. 아시아 혐오를 바라보는 내 맘이 너무 무겁다. 한국인 박흥수를 도와준 알레한드로의 인터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를 살려야 한다는 의지가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고요. -p.207 이 정신이면 테러도, 살인도, 전쟁도 없을 터인데.

 

<공의 기원>은 참 다양한 방향으로 읽혔다. 개발자가 공의 기원을 자신의 증조부와 그럴싸하게 연결 짓는 모습을 보며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얼마든지 사건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굴러갈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거짓은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찍는다. 이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아동 착취의 그늘은 훗날 최첨단 설비로 인해 해결되지만 거대 실업난이라는 또 다른 그늘은 간과한다. 이렇듯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양면성을 외면하면 자본에 따는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

 

<골든 에이지>에서도 잠시 멈칫했다. 홀로그램 우주 안에서 가장 소중했던 순간만을 반복해서 사는 게 최선일까 싶다가도 만약 내가 그런 불행한 시간에 갇힌다면 홀로그램 속으로 들어가고 말 것 같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없는 세상이 마냥 행복할 것 같진 않지만 망각이라도 해서 고통을 줄이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나의 골든 에이지는 아직 열려 있다.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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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튼의 환상 이야기
이디스 워튼 지음, 성소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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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녀석은 겁이 많다. 심지어는 아주 심각하게 귀신이 있냐고 물어온 적도 있다. 귀신 따위가 어딨냐고 엄포를 놓을까 하다 엄만 사십 평생 귀신 본 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귀신을 봤다는 지인은 있었으니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렇게 겁이 많은 녀석임에도 유튜브 알고리즘이 뿌려주는 무서운 이야기는 그렇게 눌러 본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들은 현실과 기묘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호기심을 부르는 건지도 모른다. 갑툭튀가 수시로 등장하는 호러물보다 이런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주는 신비감과 기이한 공포감을 즐기는 이들이 더 많지 않을까. 나 또한 학창 시절에 미드 <환상특급>만큼은 거의 놓친 적이 없었다. 유령은 현실과 사후의 세계를 잇고 있음과 동시에 과거의 시간들을 불러온다. 그것은 낡고 오래된 집일 수도 있고 과거를 품은 물건일 수도 있으며 죽은 혼령 혹은 유령을 보는 자일 수도 있다.

 

<순수의 시대>라는 작품만 떠올렸을 때 이 미스터리 단편들과 이디스 워튼이 쉽게 연결되진 않았지만 당시 시대적 배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인지 고전 미스터리물처럼 재미있게 읽혔다. 어린 시절의 병약함이 이야기로 재탄생한 걸 보면 평생 글을 쓸 팔자였나 보다. 6화. <충만한 삶>에서 그녀가 겪었을법한 증상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괴한 환영에 시달렸다. 서서히 떠나고 있는 삶의 단편적인 장면들, 가슴이 에일 듯한 시 구절들, 과거에 보았던 이미지가 뒤섞인 불길한 예감, 강과 탑, 둥근 지붕에 대한 흐릿한 인상들이 그녀의 마음속에 몰려들었다가 반쯤 잊혔다. 지금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것이라고는 어렴풋한 만족감이라는 원초적 감각뿐이었다. -p.211

그 원초적 감각들을 글로 옮겨 놓지 않았다면 그녀의 정신은 점점 더 무너져가지 않았을까. 마지막 단편 <매혹>에 등장했던 가여운 체니 이모처럼.

 

여덟 편의 단편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비슷하다.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펼쳐보는 미스터리물하고도 느낌이 닮아 있다. 알 수 없는 죽음과 의문의 실종은 기본이고 사후세계를 건너간 자와 떠도는 유령 이야기도 있지만 내게 있어 심각해 보이는 건 겉도는 관계들이다. 부부 이야기도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 6화 <충만한 삶>편은 뭐 거의 탈무드 수준이다. 3화 <귀향길>편에서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공포란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차 안에서 남편이 죽자 주위 사람들에게 숨기기 위해 애쓰던 아내는 남편의 죽음과 같이 중간에 내던져질까 봐 두려워한다. 결국 내리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허둥대다 끝나버린다. 뭐가 이리 허무한지...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꼭 그것이 보이지 않는대서 온다고만 할 수 있을까. 2화 <하녀를 부르는 종소리>와 5화 <밤의 승리>편에서는 보이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 훨씬 극대화되고 있다. 죽은 이는 할 말이 있다. 아니 살아서 하지 못한 말들을 가지고 이승을 떠돈다. 한참···, 한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p.60 누군가의 입으로 알게 되는 사실도 있지만 4화 <기도하는 공작부인>편처럼 전설이 되어 남기도 한다.

 

오, 사실이라···. 사실이라는 게 뭔가 그저 상황이 특정한 순간에 우연히 어떤 식으로 보이는 걸 두고 사실이라 하지 않나. -p.184 5화. <밤의 승리>편에서 붉어진 팩슨의 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진실은 뭘까.

이렇듯 시간을 건너 뛴 이야기들의 구멍을 메워가는 건 독자들의 몫이다. 모호한 결말과 불명확한 관계들 사이에 드리워진 의문이 시원하게 풀리지 않아 답답한 기분도 있지만 인생이 뭐 다 그렇지 하고 느슨하게 풀어두련다. 환상은 잘 짜인 공포보다 훨씬 삶을 독특한 방식으로 관찰할 수 있어 재밌으니 이 즐거움을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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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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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우주에 관한 문학이나 예술작품은 낭만이 넘쳤지만 내게 지구과학 시간은 참 지루했었다. 내가 그 시간에 제대로 집중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행성 이름을 외우고 행성 간의 거리를 구하고 겨울철에 볼 수 없는 별자리를 찾거나 공전주기를 구하는 것이 왜 그렇게 재미가 없었는지.

 

그럼에도 오래전에 지구와 우주를 외면했던 내가 다시 지구와 별과 행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학 또한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고 아름다운 노래의 노랫말이 되며 다채로운 영상이 되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얼마나 많은 전설들이 달로부터 왔었는지, 얼마나 많은 별들이 우리의 영혼이 되어주고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달래주었는지를 안다면 그 호기심은 더 확장되어야 마땅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고 인간의 삶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이 꼭 과학자들의 몫이어야만 할까.

 

천문학하면 일반인들과의 거리가 수억 광년쯤 될 것 같고 천문학자하면 매일 하늘만 쳐다보며 살 거라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히고 과학에 대한 관심도를 끌어낸다. 천문학자의 에세이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작가의 사담 속에 우주와 삶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또한 여성 천문학자의 일상 또한 여느 직장 여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또 밀려온다. 작가가 면접시 받았다던 질문도 화가 나지만 작가는 그저 지구가 돌고 계절이 지나는 일들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여성 최초 우주인 이소연 씨에 대한 잘못된 언론 보도와 편견에 대해서는 일침을 가한다.

 

작가는 천문학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신념과 생각에 빛을 담는다. 차분하고 단정하게 소신껏 써 내려간 글들이 다정다감하다. 우주를 품고 달과 별을 사랑해서일까. 문장은 한층 낭만과 여유가 있고 모든 것들에 애정이 깃들어 있다. 작가의 진심은 학생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더욱 빛을 발했고 천문학에 대한 애정은 자기반성과 겸손함에서 우러나온다.

 

우주를 알면 생각의 폭도 깊이도 확장됨을 작가의 글을 보며 알게 되었다. 때론 문학적 오류를 실측량을 통해 바로잡기도 하고 과학적 원리를 확장해 더 깊은 문학적 언어로 재탄생 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작가의 감각은 과학과 문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독자라는 단어에 愛 자를 덧붙이게 한다.

 

여전히 천체의 원리보단 시각적 이미지에 감동을 하고 <코스모스>보단 SF 소설이 더 좋지만 행성에 얽힌 사실과 우리가 새벽녘에 보는 달이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달의 앞면과 뒷면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되니 우주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창백한 푸른 점' 사진을 본 적 있다. 과학 책이 아닌 환경책에서 말이다. 기후 위기로 인해 지구는 점점 위기를 맞는다. 무시무시한 결말에 두려움이 엄습할 때쯤 이 사진을 보았다. 그 순간 밀려오던 울컥함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달과 화성 탐사도 멋진 일이며 훗날 우주 정거장에서 BTS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미래도 무척 센세이션하지만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라는 낭만적 부탁을 미래에도 써먹으려면 천문학뿐 아니라 곧 기후변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천문학자는 계절의 변화를 별자리에서 찾지만 나는 바람의 온도에서 느낀다. 당장은 별을 관찰한다고 내 눈에 별자리가 들어올 일은 없겠지만 별자리 수업은 관심이 있다.ㅎ 그런 것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우리는, 태양계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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