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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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설치미술이나 추상화 앞에서 머뭇머뭇할 때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걸 어떻게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여질 때가 있다. 친절하게 작품 귀퉁이에 적힌 해설을 참고해도 작가의 의도가 전혀 와닿지 않을 땐 참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표면적이고 시각적인 사유에만 머물러 있었던 사람인지 깨달았다. 사십 평생을 사는 동안 사물과 현상을 꿰뚫고 내면의 원리와 관계의 이치 그리고 사물과 삶의 연결고리 등에 대한 시선이 참말로 부족함을 깨달았다.

 

예술작가들은 작품에 임하기 전 그 무엇보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 고뇌하는 사람, 세상에 대해 진실된 시선과 겸손한 마음을 겸비해야 작품에 영혼이 깃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마치 대리석 덩어리 속에 숨어 있는 조각상의 형태를 보는 것처럼 -p.11 물론 글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요즘 나도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르는 이미지를 글로 옮길 때가 있지만 너무나 역량이 부족함을 느낀다.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이 책을 들고 다녔다. 산책로에서, 버스 안에서도, 심지어 밥을 먹는 동안에도 한 챕터씩 읽고 삼켰다. 예전에 존 버거의 스케치북을 읽으며 느꼈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때 나도 언젠가 그림일기를 써 봐야겠단 다짐이 안규철 작가의 책을 덮으며 더욱 강렬해졌다. 작가는 매일 아침 그림일기를 쓰는 시간은 그가 일명 '천사가 다녀갔던 시간(순간의 정적)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나도 분명 그러한 순간들에 떠오른 생각들이 있었음에도 금방 망각하기 일쑤였는데 다시 끄집어 내기 위해선 메모가 필수겠다.

 

이 책 전에 읽은 <골든 에이지>의 첫 번째 단편이 <공의 기원>이었는데 이 책의 초반에도 공의 사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여러 우연이 정해주는 대로 위치를 찾아가는 공의 운명. 분명 주체는 공이 아니지만 공을 주체로 내세운 사유가 돋보인다. 이처럼 사물과 현상을 주체로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것들 - 바람이 되고 녹이 되고 나사가 되고 씨앗이 되고 잡초가 되고 귀뚜라미가 되어. 그리고 사물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현상을 재해석한 역설적 발상들이 와닿았다.

 

 

 

 

자연의 조용한 움직임과 기다림을 이해할 때 삶의 속도에 치중한 삶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식물의 시간>편은 느리게 살고 싶단 소망에 불을 지핀다.ㅎ 이 챕터를 읽을 때 마침 물가에서 노니는 오리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오리가 노니는 모습만 보고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하염없이 냇가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아저씨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봄이 오고 바람이 부는 주체는 따로 있다. 우리가 주어라고 배우는 문장들에도 보이지 않는 주체를 생각해야 한다. 자연이라는 혹은 신이라는 주체. 그렇듯 내가 걷고 일하고 웃고 잠을 자는 동안에도 진정 그 주체가 나인지를 의심해야 한다. 관성의 지배를 받고 사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나 자신인지까지도.

 

인생은 간발의 차이로 생과 사가 갈리고 어쩌면 온전한 원을 이루며 살 수 없으며 작은 날갯짓으로 겨우 작은 거리를 이동하며 결함이라는 흔적들을 남긴 채 살아가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머물렀던 그리고 머무를 시간들을 잘 쓸어내리는 것이겠다.

 

우리에겐 기계의 겉에 치중하는 삶이 아닌, 내부의 비밀을 절대 발설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보온병이 아닌, 내부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머그컵 같은 삶이 필요하다. 한쪽으로 버려지는 존재들에 한 번 더 시선을 둔 작가처럼 그런 시선이 필요하다. 나를 위해 사들인 물건보다 나 때문에 버려지는 물건들의 종착역을 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말의 유효기간>편에서 오간 말에 관한 철학에 대해 명심하며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을 말이 아니 글로 순환시켜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그 모든 것들에 부여되는 시각이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언젠가 나도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귀뚜라미 소리가 우는 게 아닐지 모른다고. 인간들이 자기들 멋대로 운다고 해석한 것일 뿐이지 실은 웃고 있는 걸 수도 있다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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