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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누군가를 오래 생각하면 마음이 천리만길을 달려 그에게로 가닿는다고. -p.10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파동을 지닌 생명체는 인간이라고 한다. 그만큼 인간은 서로에게 엄청난 자극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 파동의 심지는 사랑에서 기인하고 수많은 방향으로 다양한 감정들이 뻗어나간다.
이 책은 그러한 순간(문학작품, 영화, 그림)에 대한 작가의 생각노트 같다. 심지어 인간이 사랑을 하는 존재라는 사실도 새삼 신기하다. 아니 사랑이란 단어조차도 참 새롭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을 이해(여행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비밀을 가진 사람, 칼을 놓는 사람, 이별하는 사람, 기억하는 사람, 사랑 이후의 사람) 하기 위함임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들에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사랑이 결핍되거나 사랑이 금지되거나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디스토피아)이 얼마나 끔찍한지 문학작품과 영화를 통해 간접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인생이란 그런 거야"
"인간은 몸이다."라는 문장을 본적 있다. 인간은 움직여야 사는 존재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작가는 누군가의 가방과 신발을 들여다보며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의 삶에 나의 가치관을 대비하는 건 무의미하다. 나 자신의 고집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에게서 인생의 가치와 고통의 여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사소한 순간이다. 사랑은 그런 것들에게서 기인하며 그러한 순간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삶도 그런 일들의 연속인 것 같다. 그런 경험이 낳은 잔상들로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가끔 사진을 찍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진을 꺼내보면서 내게 이런 기억이 있었음을 떠올릴 때 그렇다. -p.88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사진은 기억을 떠올리는 또 다른 수단이다. 그래서 나도 무수한 순간들을 담는다. 한 장의 사진은 그 순간의 앞뒤를 불러온다. 심지어 읽어 둔 책들을 일일이 찍어두는 이유도 기억하기 위함이다.
사소하지만 그것들은 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남기는 일이며 세상에 나의 안부를 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진들은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건지, 나라는 점은 누구와 선을 잇고 살아야 하는 건지를 묻는 또 다른 세상과의 대화법이다. 사진의 차가움보다 그 속에서 나의 사랑과 열정의 부피감을 기억하고 싶다.
한 장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이 덧없는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훼손된 기억으로 왜곡된다고 해도 나는 계속 순간을 담을 것이다. 훗날 기억될 나의 잔상들.
"다 보여줘서는 안 된다. 절반만 보여줄 것."
작가는 글을 사랑했다. 넘치게 사랑했고 그랬기에 진솔하게 다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작가는 마치 서툰 사랑에 헤매듯 교수님의 충고를 몸으로 느끼기까지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거쳤다. 덜어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사랑할 때도 그와 마찬가지다. 자신을 다 보이지 말라고 한다. 상대로 하여금 호기심과 해석의 여지를 남겨야 그 사랑은 오래간다. 글도, 사랑도, 인생도 마찬가지임을 깨닫기까지는 역시 세월이 필요하다. 내가 부딪히고 꺾어지고 베인 세월들이 비로소 해답을 제시한다.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진 말들을 센스 있게 함축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사랑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한 점과 또 다른 타인의 한 점이 만나는 이미지를 목격한다. 개별적인 삶을 살아왔던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은, 그러나 맞닿는 순간 서로의 과거를 포용한다. 포용한다는 것은 서로의 속내를 듣고 이해하거나 존중한다는 차원이 아니다. 두 개의 사건이 맞부딪친다는 것은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 -p.14
사랑은 위대하다. 그렇기에 사랑을 말하고 있는 작품들의 여운은 오랜 잔상으로 남는다. 작가가 언급하고 있는 작품뿐 아니라 더 많은 작품들을 떠올리며 사랑이란 감정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세계를 그려보았다. 영화 <노트북>처럼 진실되며 헌신적인, <봄날은 간다>와 <500일의 섬머>처럼 현실적이고 냉정한, <퐁네프의 연인들>처럼 돌이킬 수 없이 잔인한, 소설 <폭풍의 언덕>처럼 격동적이고 애절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연인 속의 연인>처럼 집착해서 지독한, <나의 미치광이>처럼 요상한 끌림의 순간들. 유한의 삶 속에서 각자가 경험하는 사랑의 사건들이 이처럼 다양하다는 사실이 모처럼 놀랍게 다가온다.
사랑이 없었다면 모든 문학과 예술은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조차도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으리라. 사랑도 유행을 타고 변덕을 부린다. 하지만 유행이 돌고 사람들이 다시 그 유행을 좇듯 우리는 사랑의 유사한 순간들을 찾는다. 사랑이 낳은 수많은 감정선들. 애틋함, 그리움, 배신, 소유, 집착, 불안, 두려움, 아픔 등의 감정들을 보면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몰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큼 몰입하고 얼마큼 머물고 얼마큼 빠져나오고 얼마큼 지속할 것인가에 따라 그 잔상도 달라진다.
내 삶은 나의 것이지만 그 삶은 타인과 맞닿은 무수한 기억의 편린들로 채워져 있다는 작가의 말을 곱씹어 보니 그러한 잔상들이 삶을 지탱해주는 것임을 알겠다.
비록 잘 간직해온 것들이 아니더라도 이해하지 못한 희귀한 순간들이 어느 순간 이해될 때가 삶이 한층 더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