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 타이완 여행기 - 2026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2024 전미도서상 번역부문 수상, 2024 일본번역대상 수상, 2021 타이완 금정상 수상
양솽쯔 지음, 김이삭 옮김 / 마티스블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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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에 가보고 싶다. 타이완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 타이완어로 타이완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그것만으로 타이완의 모든 걸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 2026 부커상 인터내셔널, 2024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대만의 여성 작가 양솽쯔의 소설 <1938 타이완 여행기>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이 책은 제목에 '여행기'라는 단어가 들어 있지만 일반적인 여행기는 아니다. 이 책의 여행지는 '지금'의 타이완이 아닌 '1938년'의 타이완. 규슈 출신의 20대 여성 작가 아오야마 치즈코는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청춘기>의 타이완 개봉을 계기로 타이완 주재 일본인 부인 단체의 초대를 받아 1년 간 타이완에 머무르게 된다. 


일본에서 지금 잘나가는 여성 소설가가 타이완에 왔으니 사람들은 치즈코에게 일본 여성의 삶이나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치즈코의 체류를 돕는 일본의 관료들이나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는 타이완 사람들은 치즈코가 일본 제국주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식탐이 왕성했던 치즈코의 관심사는 오로지 음식뿐이다. 치즈코는 타이완에 머무르는 동안 타이완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가능한 한 많이, 다양하게 먹어보고 싶다. 음식이란 그저 허기를 달래려고 먹는 게 아니라 그 나라, 그 지방 사람들의 역사와 자연, 문화와 전통을 복합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에 타이완까지 와서 일본 음식을 먹고 싶지 않다. 


그런 치즈코의 소망을 충족해 줄 비서 겸 통역사로 타이완 여성 왕첸허가 배정된다. 두 사람은 1년에 걸쳐 함께 타이완 곳곳을 여행하며 타이완 각지의 다양한 음식을 '많이' 먹는다. 이 과정에서 치즈코는 그동안 몰랐던 타이완의 역사와 문화, 자연, 전통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이렇게 많은 지식을, 이토록 다정한 태도로 알려주는 왕첸허라는 여성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품게 된다. 대체 어떻게 왕첸허는 젊은 나이에 이렇게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을까. 이렇게 능력이 출중한데도 꿈을 포기하고 집안에서 정해준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불만은 없을까. (혹시라도 나와 함께 '다른 미래'를 꿈꿀 가능성은 없을까...)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치즈코가 자신의 과오 내지는 한계를 깨닫는 장면이다. 사실 치즈코 정도면 그 시대 기준으로 '깨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스무 살만 넘어도 노처녀 소리를 듣던 시대에 치즈코는 결혼 대신 소설가로 사는 삶을 택했다. 일제에 협조하라는 요구가 들어오면 단호히 거절했고, 타이완 사람이 타이완 사람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장면을 보면 참지 않고 나섰다. 그러나 '사회적 다수에 속해 있으면서 사회적 소수를 이해하는 것'과 '사회적 소수로 사는 것'은 다르다. 지배국(일본) 사람인 치즈코는 첸허를 사랑해도, 피지배국(타이완) 사람인 첸허의 경험이나 감정, 생각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


치즈코는 타이완 음식도 좋아하고 타이완의 역사와 자연, 문화와 관습에도 관심 많은 '친타이완' 성향의 인간이지만 '타이완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는 모른다. 첸허는 일본어도 잘하고 일본의 음식이나 문화, 관습 등에 대해서도 잘 알지만, 타이완 사람이기 때문에 치즈코와 같은 숙소에 묵어도 차별 대우를 받고 옷차림에도 규제를 당한다. 치즈코는 첸허에 대해 알수록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강하게 느끼지만, 첸허는 치즈코가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자신은 피지배국 사람이고 치즈코는 지배국 사람이라는 차이점을 선명하게 느낀다. 어쩌면 (여성 간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적 한계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정치적 상황보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둘의 사이를 벌리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소설은 내용도 흥미롭지만 형식도 특이하다. 양솽쯔 작가는 자신을 작가가 아닌 번역가로 설정하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오야마 치즈코의 <1938 타이완 여행기>라는 책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처럼 이 책을 구성했다. 그래서인지 치즈코도 첸허도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 같고, 치즈코가 쓴 <1938 타이완 여행기> 역시 실물로 발행된 적 있는 책처럼 느껴진다.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게 독특하고 애틋한 사연을 품은 사람들과 그들의 사연을 품은 책들이 그동안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게 영영 잊힐 뻔한 사람들과 사라질 뻔한 책들을 소설로 소환했다는 점이, 이 책이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인정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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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랑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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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이란 뭘까. 현실에서 일어나면 괴롭지만 현실이 아닌 상황에서 일어나면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소설가 최은미가 5년 만에 발표한 소설집 <다른 사랑>을 읽으면서 여러 번 떠올린 단어가 '반전'이었다. 이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대부분의 단편에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상황이 나온다. <상리>에서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여진'은 5년째 수임 중인 마을의 분쟁을 해결하러 갔다가 뜻밖의 인물과 마주친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대화가 쌓이면서 감정의 결이 점점 달라지는데, 그러다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도하고 그때까지 계속 치솟기만 했던 감정이 곤두박질치는 상황이 벌어진다. 사람 마음 뭘까 싶고, 이런 상황을 재치 있게 또 서늘하게 묘사한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어지는 <무장하는 날>, <정선>, <김춘영>에도 반전 같은 상황이 등장한다. <무장하는 날>에서 매장 문화재 발굴 일을 하는 '나'는 신입 연구원 시절 일한 적이 있는 장소에 다시 오게 된다. 그 시절 잠깐 '썸'을 탔던 군인을 떠올리던 '나'의 앞에 운명처럼 그가 다시 나타나지만, 뜻밖의 상황이 잊고 있던 기억을 소환하면서 이야기는 나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간다. 이 책에서 나의 예상을 가장 많이 배반한 작품은 단연 <정선>이다. 강원도 정선이 고향인 '나'는 오래전 가족과 살았던 집을 보러 간다. 옛날 생각도 하고 옛 친구도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어떻게 보면 힐링계 소설처럼 보였던 이야기가 정반대 방향을 향할 때 묘한 쾌감을 느낀 건 나뿐일까. <김춘영>도 처음에는 탄광촌 여성들의 구술 생애사 작업을 하는 '나'의 어떤 하루를 그린 이야기로 상상했다가 상상과 전혀 다른 결말을 보았는데 그 기분이 기묘하면서도 짜릿했다. 


<그곳>과 <이 모든>은 앞의 세 작품에 비하면 밝고 희망적인 편이다. <그곳>은 폭염을 피해 체육센터로 피난을 간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이 모든>은 튀르키예 지진 피해자들이 모여 사는 컨테이너촌을 방문한 한국인 캘리그라퍼의 이야기를 그린다. 둘 다 표면적으로는 재난에 관한 소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재난을 대하는, 재난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그리는데, 그 태도는 크게 '나를 지키는 것(매일 같은 루틴으로 운동하고 성실하게 일한다)'과 '남을 배려하는 것(나의 힘듦을 말하기 전에 남의 힘듦을 먼저 듣는다)'으로 형성된다. 


<고별>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시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재난' 상황에서 망자의 며느리, '허준기'의 아내라는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힘듦보다 남편의 상황을 더 많이 살피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단, 앞의 두 소설과는 전혀 다른 전개를 보인다는 점에서, 역시 반전이 돋보이는 소설집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걸맞은 작품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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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문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3
요 네스뵈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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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읽은 해리 홀레 시리즈이다. 이 책이 해리 홀레 시리즈 13편이라는데, 솔직히 이제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도 잘 안 나고(누가 죽었는지, 아직 살아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도 기대도 안 되는데(새로운 인물이 나오면 사실은 나쁜 놈이거나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새 책이 나오면 어김없이 사는 내가 나도 이해 안 된다. 심지어 사놓고 나서 읽을까 말까, 이제 그만 읽을까 이런 생각도 하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면 또 재밌게 읽는다. 이 책도 두꺼워서 다 읽는 데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아마 14편이 나오면 또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사겠지(그리고 읽겠지). 15편도, 16편도... (그러니까 작가님 계속 내 주세요. 제발 ㅠㅠ) 


전편에서 부인 라켈을 잃고 경찰을 떠난 '해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술만 마시며 지내는 중이다. 가진 걸 다 소진하고 다시는 노르웨이 땅을 밟지도, 경찰 일에 관계하지도 않겠다고 다짐한 해리. 하지만 술집에서 우연히 알게 된 '루실'이라는 여자 때문에 과거의 해리였다면 결코 수락하지 않았을 어떤 일을 맡게 된다. 그것은 오슬로의 부동산 재발 마르쿠스 뢰드의 개인적인 의뢰다. 최근 오슬로에서 여자들이 죽거나 실종되는 일이 잇달아 발생했는데 그들의 공통점이 뢰드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경찰의 수사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뢰드는 해리에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달라고 부탁했고, 큰돈이 필요해진 해리는 그의 의뢰를 승낙한다. 단, 그의 방식대로 수사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 책에서 재미있었던 대목은 경찰을 떠난 해리가 조사를 위해 동료를 모으는 과정이다. 해리는 말기 암 투병 중인 심리학자이자 친구 스톨레 에우네를 필두로 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는 에이켈란, 비리 경찰로 악명이 자자한 베른트센 등을 자신의 팀원으로 끌어들인다. 더는 형사가 아닌 해리가 경찰 조직에 의지하지 않고 수사를 진행하기 위해 민간인 또는 경찰 내부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을 이용하는 점이 전편들과 달라서 재미있었다. 라켈의 죽음 이후 삶의 목적을 잃은 해리가 자신의 친아들과 만나면서 그것을 되찾는 장면들도 인상적이었다. 범인의 정체는 끝의 끝까지 가야 알 수 있으니 섣불리 짐작하지 마시고 계속 읽으시길. 참고로 나는 범인의 정체를 알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꺼운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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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국보 : 상·하 세트 - 전2권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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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보>의 시놉시스를 듣고 딱 내 취향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원작이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이라는 걸 알고 이건 뭐 내 취향일 수밖에 없겠다고 확신했다. 영화는 개봉 시기를 놓쳐서 못 보고 소설 먼저 읽었는데, 소설이 너무 좋아서 영화는 안 봐도 되겠다 싶지만 보게 되면 보겠지. (어서 OTT에...) 


소설은 도쿄 올림픽을 한 해 앞둔 1963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시작된다. 야쿠자 조직의 보스 '타치바나 곤고로'의 외아들인 '키쿠오'는 가부키를 좋아하는 계모의 영향으로 가부키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고 가부키 배우 흉내도 곧잘 한다. 나가사키의 내로라하는 야쿠자 조직의 조직원들이 모두 모이는 신년회에서 여흥으로 짧은 가부키 공연을 하게 된 키쿠오. 그 모습을 우연히 그 자리에 참석한 오사카를 대표하는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가 보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이의 눈에 든 키쿠오가 그 길로 가부키에 입문해 배우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일들이 남아 있다. 


우선 바로 이날 야쿠자 조직 간에 싸움이 일어나 키쿠오의 아버지 곤고로가 세상을 떠나고, 그때까지 기세가 등등했던 곤고로의 조직도 힘을 잃는다. 그전까지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유복하게 살았던 키쿠오는 당장 중학교 졸업도 힘든 상황에 놓인다. 나이는 키쿠오보다 위지만 키쿠오의 심복, 오른팔 역할을 하는 토쿠지도 소년원에 갇혀 있다. 사실 키쿠오는 여자친구 하루에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신세. 이런 와중에 소년원에서 탈출한 토쿠지가 키쿠오를 찾아와 복수심을 자극하고, 일련의 소동 끝에 도망치는 신세가 된 키쿠오는 토쿠지와 함께 오사카로 가서 약간이나마 안면이 있는 한지로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 수업을 받는다. 


배우 수업을 받는다고 해도 한지로의 후계자는 한지로의 외아들 슌사쿠가 이어받는 것으로 사실상 정해진 상태. 그러나 돈도 없고 돌아갈 고향도 없어진 키쿠오로서는 장래고 뭐고 그저 열심히 수업을 받아서 하루 빨리 한 사람 몫을 하는 배우가 되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키쿠오에게는 한지로도 인정한 미모와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가부키(그리고 연기, 예술)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 향상심이 있다. 이것이 여러 면에서 키쿠오와 정반대(출신 배경과 외모, 성격 등)이면서 꼭 닮은(연기와 예술에 대한 열정, 집착 등) 슌사쿠의 특징과 상호 작용을 하면서, 서로의 연기 인생, 나아가 인생 전체에도 큰 영향을 준다. 


아직 안 봤지만 영화에선 키쿠오와 슌사쿠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사실 나는 이 소설의 진히로인은 토쿠지라고 생각한다. 일단 아버지가 죽은 후 조용히 살고 있던 키쿠오를 자극해 복수를 감행하고 고향을 떠나게 만든 게 토쿠지이고, 키쿠오가 어떤 문제에 휘말리거나 휘말릴 뻔할 때마다 자신을 희생해 키쿠오를 구하기 때문이다. 키쿠오와 슌사쿠의 관계가 <패왕별희>라면 키쿠오와 토쿠지의 관계는 <영웅본색>이랄까... 소설의 결말도 토쿠지와 관련이 있는데 영화는 등장인물 소개에도 토쿠지의 이름이 없어서, 소설과 영화의 결이 약간 다를 것 같다는 짐작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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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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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아쿠타가와 수상작, 이동진, 신형철, 은유, 요시다 슈이치 추천... 이중 하나라도 읽을 이유가 되기에 충분한데 이만큼의 명분이 쌓였으니 읽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작가가 2000년대생인 점(그렇게 어려?)과 이 소설을 30일 만에 완성했다는 점(그렇게 빨리?)이 마음에 걸렸지만, 막상 읽어보니 작가의 나이는 어려도 내용의 깊이는 오히려 원숙함에 가깝고, 소설을 완성하는 데에만 30일이 걸렸을 뿐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공부나 준비는 아마도 평생에 걸쳐 해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만큼의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뭐 했나 하는 자괴감만 남은...) 


이야기는 일본의 저명한 독문학자이자 괴테 전문가인 히로바 도이치의 사위인 '나'가 장인과 함께 떠난 독일 출장에서 장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도이치는 몇 년 전 결혼 25주년을 기념에 아내, 딸과 함께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찾았다. 그곳에서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홍차를 마시다 각자의 티백에 포춘쿠키처럼 각기 다른 문장이 인쇄되어 있는 걸 발견한다. 도이치의 티백에 인쇄된 문장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말했다는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아내와 딸은 괴테 전문가인 도이치의 티백에 괴테의 문장이 인쇄되어 있다니 역시 도이치와 괴테는 운명이라며 기뻐했지만, 도이치는 기뻐할 수 없었다. 평생 괴테를 연구했건만 이 문장이 정말 괴테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도이치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문제의 문장이 정말 괴테의 것이 맞는지, 맞는다면 어느 책의 어느 대목에 나오는 문장인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처음에는 자신이 소장한 괴테의 책들 중에 떠오르는 책이 있으면 뒤져 보는 식으로 찾다가, 나중에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동료, 스승, 후배, 외국의 지인들에게도 도움을 청한다. 이 과정에서 도이치는 괴테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괴테의 생각을 표현한 언어와, 그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탈락하거나 추가된 해석과, 어떤 문장을 인용할 때 발생하는 오해와 그래서 필요한 윤리, 철학, 사유 등에 관해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중에는 독일에 직접 가기도 한다. 그 결과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는 그의 인생을 바꾼 문장이 된다. 


이 책에는 괴테의 수많은 저작이 인용되는 것은 물론이고 괴테가 생전에 천착했던 주제들과 그것들의 의미, 해석 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작가가 2000년대생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만큼 그 내용이 방대하고 심오하다. 괴테 외에 괴테와 함께 언급할 만한 서양의 다른 작가나 사상가, 심지어 일본의 작가나 사상가와도 연결하기 때문에 이 책의 독자는 괴테뿐 아니라 서양과 일본의 문학, 철학, 역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면 좋다.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미카미 엔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생각이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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