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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습니다 - 최지은 기자의 페미니스트로 다시 만난 세계
최지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괜찮지 않습니다>는 <매거진 t>, <텐아시아>, <아이즈>를 거치며 10여 년간 대중문화 기자로 일한 최지은 기자가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한국 사회의 대중문화를 분석한 기록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온라인 대중문화 매체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멋진 남자들의 세계에 빠져들고, 찬사를 보내고, 그들의 '다양한' 매력을 발굴해 전파하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라고 고백한다. 저자 스스로 "모든 영역에서 남성들에게 더 관대했고, 너무 금세 숭배했다"라는 사실을 자각한 건 2015년 팟캐스트 <옹달샘과 꿈꾸는 라디오>이 해온 여성 혐오, 약자 비하 발언이 공개된 후다. 특집 기획을 제안할 만큼 옹달샘을 좋아했던 저자는 이 사건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가 상정하는 '대중'에 여성이 포함되지 않으며, 여성 또한 한국의 대중문화가 쏟아내는 여성 혐오 서사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을 관찰하고 기록한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대중문화에 퍼져 있는 여성 혐오 서사를 분석한 '대중문화 속 혐오 바이러스', 예능과 영화를 이른바 '아재'로 불리는 한국의 중년 남성들이 잠식하고 있는 현상을 조명한 '한국 남자들이 사는 세상', 여성 스스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길을 모색하는 '그래서 페미니즘' - 이렇게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중문화 기자인 저자의 특기가 발휘되는 제2장 '대중문화 속 혐오 바이러스'와 제3장 '한국 남자들이 사는 세상'이 특히 인상적이다.
남성 연예인들은 도박이나 음주운전을 비롯해 사회적 물의를 빚는 사건을 일으켜도 시간과 인맥을 통해 자연스럽게 복귀할 수 있지만 여성 연예인은 나이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밀려난다. (중략) 새로 시작되는 프로그램의 소개에 따르면 살림도 남자가 하고, 여행도 남자끼리 가고, 딸도 남자가 키우고, 개밥 주는 것도 화장하는 것도 남자들이었다. 남자는 숨만 쉬어도 아이템이 되는 건가 싶을 만큼 '남자', '수컷', '형(님)'을 제목에 내세운 프로그램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89쪽)
저자는 여성 관객이 남성 제작진이 만든 영화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나 여성 독자가 '맨스 플레인'이 창궐하는 남성 작가의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김훈의 소설 <언니의 폐경>에 갑자기 생리를 시작해 피에 젖은 언니의 팬티를 여동생이 잘라내 버렸다는 내용이 나온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래 김훈의 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게 된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언니의 폐경>의 명대사 "뜨거운 것이 밀려나와"라는 지금도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서 틈만 나면 등장하는 유행어다).
저자는 한국 드라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로맨스를 가장한 폭력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수많은 한국 드라마들이 여성을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강압적으로 다루고, 동의 없는 스킨십을 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위협하는 남자들'을 거부하기 힘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나쁜 남자'로 그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콘텐츠를 소비하는 여성 시청자들이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남성이 가하는 폭력이나 학대, 폭언, 고성, 비난, 스토킹 등을 응당 있는 사랑의 표현 방식으로 착각하고 남성에게 '면죄부'를 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피해자는 오직 여성이다.
여성 혐오와 남성 숭배 서사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즐길 거리는 무엇일까. 찾아보면 여성이 여성 스스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콘텐츠가 생각보다 많이 있다.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을 살면서 같은 문제를 고민한 여성들의 책, 영화, 드라마도 적지 않다. 여성 스스로 여성이 만든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언급하고, 더 많이 토론하고, 더 많이 직접 제작하면서 더 많은 여성 서사가 발굴되고 더 많은 여성 콘텐츠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