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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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서경식 선생이 쓴 <언어의 감옥에서>를 읽다가 가슴 아픈 구절을 발견했다. 선생은 젊은 시절 60세가 되어서도 살아 있는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 60세가 되어서도 재일조선인이니 디아스포라니 일본의 우경화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머지않아 내 발언 따위는 쓸모 없어질 거라고 막연하게 예상하고 있었'고 '그렇게 되면 이런 글쓰기는 접고 단 한 편이라도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장편소설을 쓰고 싶었다'. 선생의 생각은 틀렸다. 


페미니즘은 어떨까.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도 경제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울부짖으며 <자기만의 방>을 썼던 때나,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여성의 참정권 쟁취를 위해 돌 던지고 주먹으로 때리는 남자들 속으로 걸어들어간 때에 비하면 지금은 나아진 듯 보인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묻지 마 살인'의 대상이 되고, 온 오프라인에서 여성에 대한 온갖 비하와 조롱에 시달리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리하여 서경식 선생처럼 60세가 되어서도 페미니즘 책을 읽고 페미니즘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고, 선생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 - 선생처럼 내가 쓰고 싶은 글쓰기 -를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착잡하다.


스웨덴의 저널리스트 출신인 카트리네 마르살이 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읽으며 처음에 든 생각은 '아니, 스웨덴에도 남녀 차별이 있어?' 였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양성평등 문제에 있어서 한국을 월등히 앞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선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스웨덴의 여성 저널리스트가 양성평등을 논하다니. 그것도 노동에 있어서. 스웨덴도 완전한 양성평등을 이루지 못했는데 한국이 가야 할 길은 대체 얼마나 먼 걸까 싶었다. 


저자는 애초에 현대 자본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주류 경제학의 전제부터 틀렸다고 지적한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남긴 유명한 말을 보자.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평생 독신이었고, 어머니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저녁을 차려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외식을 했다면 식당의 주인 또는 요리사, 종업원에게 음식을 요리하고 식탁 위에 차려주는 비용 등을 치렀을 터. 하지만 그는 가정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저녁 식사를 먹기만 하고 그 돈을 아꼈다(아낀 돈으로는 뭘 했을까?). 그렇다면 어머니가 생산한 '부가가치'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주류 경제학뿐만 아니라 사회의 온갖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여성의 노동은 무시하고 간과하고 배제하고 지워버리는 일 말이다. "여성들은 항상 일을 하고 있었다. 20세기에 변한 것이 있다면 여성들이 일터를 바꾼 것이다." "남성은 항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제학에서도 그랬고 성 문제에서도 그랬다. 여성에게 이 자유는 금기 사항이었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임무가 주어졌다." "남성이 노동한 결과는 측정할 수 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여성이 노동한 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털어낸 먼지는 어느새 다시 쌓인다. 밥을 해먹여도 금방 배고파 한다." "여성의 보수가 낮은 것은 집안일을 더 많이 해서고,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은 보수가 낮기 때문이다." "남성이 육체적으로 해방되기 위해 여성은 점점 더 육체적 현실에 얽매여 갔다." 


여성만이 아니다. 위의 몇몇 문장에서 여성을 지우고 장애인, 외국인, 아동, 청소년, 노인, 비정규직 등을 넣어도 대체로 의미가 통한다. 이는 남성, 비장애인, 내국인, 정규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존재들을 배제하고 그들이 한 노동 또한 평가절하하고 심지어는 노동의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 시대부터 경제적 인간에 관한 이론은 늘 그가 돌보고 그가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옆에 있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경제적 인간이 이성과 자유를 대변하는 것은 누군가가 그 반대 역할을 담당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65쪽) 


한국이 오늘날의 성장과 번영을 맞이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덕분이다. 그중에는 나라 밖에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 어느 나라도 그들의 인권과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주지 않는 디아스포라로 살아간 사람들의 희생도 있다. 마찬가지로 애덤 스미스가 유일하게 '경제적 인간'으로 인정한 남성들이 이 때까지 정치가로, 기업가로, 사회 명사로 활약하고 부를 쌓고 자아 실현을 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수많은 여성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덤 스미스라는 이름은 알지만, 애덤 스미스에게 밥을 먹이고 그가 공부를 하도록 지원해준 어머니의 이름은 모른다. 그녀의 이름은 '마거릿 더글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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