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혁명 - 자긍심을 회복하는 순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최종희 옮김 / 국민출판사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남자로 태어나고 싶었다. 딸만 둘을 낳은 어머니가 할머니로부터 씨받이를 들이겠다는 위협을 받았을 때,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거나 큰 상을 받아도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기는커녕 '딸이 아니라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다'며 혀를 끌끌 찼을 때, 교사로부터 남자아이들이 버젓이 있는데 여자아이가 반장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학급 임원직을 포기했을 때, 나는 여자로 태어난 나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그러다가 여고 2학년 때 친구로부터 페미니즘의 존재를 배웠고 운명처럼 여대에 입학해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그러나 가볍게 훑기만 했을 뿐 깊이 빠지지는 못하다가 최근 한국 사회에 뜨겁게 점화된 페미니즘 논쟁을 보면서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를 다시 들춰보는 기분으로 몇 권의 페미니즘 서적을 읽어보았다. 놀랍게도 페미니즘을 처음 알게 되었던 여고 2학년 때만 해도 멀게만 느껴졌던 이슈들이 30대가 된 지금은 무척이나 가깝고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세계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 Ms.>의 창간인이자 페미니스트들의 대모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쓴 <셀프 혁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미국에서는 1993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나 국내에서는 2016년 올해 처음 출간된 이 책은 1993년 당시 40대 중반의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미국 대통령 경선에 나서면서 오늘날의 자신을 있게 한 멘토 중 한 사람으로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꼽기도 했다. 


'여성들은 너무 강하다'라는 말은 9백만 명의 '마녀'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추동력이 되었고,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종교 체제로의 진전을 위한 은밀한 자극제이기도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너무 강하다'라는 말은 히틀러가 그 자신을 부유한 유대계 은행가들'과 대비되는 노동자 계층의 우상으로 세우기 위해 주장한 것이었다. (p.274) 


요즘도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페미니즘과 동성애를 연달아 비난하고 있는데, 과거에 그 둘 사이의 대비는 훨씬 더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종교 재판이 성행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수 세기 동안 마녀들을 화형에 처했는데, 그때 동성애자 남성은 마녀를 태울만큼 '충분히 뜨거운' 불을 만들기 위해 먼저 화형에 처해졌다. 게이를 경멸할 때 쓰는, 'faggot(장작)'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p.275) 


이 책은 페미니즘 서적이기 이전에 심리학 서적이다. 저자는 수십 년 넘게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 같은 외적 변화가 중요하다고 역설해왔지만 한편으로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내적 변화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내적 변화의 핵심은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는 마음가짐을 일컫는 '자긍심'이다. 자긍심은 개인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불완전성, 공허감, 자기 회의, 자기 증오에 취약하며 (당연하게도) 남녀 구분이 없다. 자긍심이 낮은 남성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저평가하거나 혐오하며, 자긍심이 낮은 여성은 타인이 자신을 비하하는 것을 용인하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 자기를 경멸하게 된다. 


저자는 여성의 자긍심을 높이는 노력이 남성의 자긍심을 높이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남성과 여성 모두 존중받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관습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성향을 가진 남성에 대한 저평가가 대표적이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사회에서는 남성이 관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양육이나 가사노동을 하거나, 패션이나 메이크업에 관심을 보이거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거나 타인의 말이나 생각에 깊이 공감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이로 인해 남성은 가사노동이나 아이들 양육을 기피하게 되고, 패션이나 메이크업에 대한 관심을 억누르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타인의 말에 무관심하게 되면서 자기를 부정하고 심지어는 혐오하게 된다. 여성에 대한 차별 및 관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영역에 대한 비하가 존재하는 한 남성 또한 충분히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흑인이나 유대인들이 비싼 곳이든 싼 곳이든 식당이나 바의 출입을 거절당하면 그에 대한 항의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찬성하면서도, 인류의 절반이자 흑인과 유대인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문제에는 왜 좀 더 진지하고 심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p.20)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 곳곳에 내재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도 정작 그 차별을 없애는 문제에 있어서는 좀 더 진지하고 심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저자에게도 여성 문제에 진지하고 심각하지 못 했던 시절이 있었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저자는 플라자 호텔에서 유명 배우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호텔 로비에서 부지배인으로부터 "동반자를 대동하지 않은 숙녀는 절대로 로비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쫓겨난 적이 있다. 한 달여 후 저자는 같은 호텔에서 다른 저명인사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도 호텔 로비에서 부지배인으로부터 여자 혼자서는 들어올 수 없다는 제지를 받았지만 저자는 "여기는 공공의 장소이며 저는 여기 머무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그러자 부지배인은 저자를 순순히 들여보내주었고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 사회가 '여자라서 안 된다'고 말할 때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당당히 요구하면 결국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관습적인 여성이 보이는 남성에 대한 의존이나 로맨스에 대한 환상, 미와 젊음에 대한 집착 등은 진정한 여성성의 발현이 아니며, 만약 자신에게 그러한 면이 있다면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진짜 욕망 - 남성성의 표출 내지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조화 등등 - 을 발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저자는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과 기도, 쓰기, 그리기, 웃기, 노래하기 등을 제안한다. 이 같은 활동은 '내부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하고, 자아를 인정하고, 가치를 평가받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존중받는 느낌을 준다. 전문 예술인처럼 잘하지 못해도, 익숙하지 않아도 괜찮다. 자기 내면을 확인하고 표현하는 활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우리는 오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우리가 써먹으라고 있는 것이죠. 나는 우리 각자가 자궁 밖으로 나올 때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법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걸 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는 일이 되죠. (p.251)


대학 졸업 후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쉬는 대신 심리학과 예술을 공부했는데 이 책을 읽고 페미니즘과 심리학, 예술이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 또한 운명의 이끌림이 아니었을까.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에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하고 지금까지도 열정적으로 운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라는 인물의 존재 또한 감사하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해 알아갈수록 여자라는 사실이 전처럼 한스럽지 않고 자랑스럽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도 더 이상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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